제 318화
임진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마워. 내가 빨리 와서 같이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빈자리를 발견하고서 혀를 찼다.
“동진이는? 또 지각이야?”
“금방 오겠죠.”
동진이가 미리 해뒀어야 할 분량의 반죽은 혜정이가 대신 해놓은 것이 분명하다. 진희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걔는 왜 매번 이렇게 늦는 거지?”
대학 때 조별 과제 모임에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료 조사를 맡은 사람이 자료를 보내지 않으면 결국 PPT를 만들기로 한 사람이 대신 조사해야 한다. 진희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혜정이가 쩔쩔매면서 말했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잖아요.”
그녀는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진희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무슨 사정인데? 나는 그렇다 치고 진혁이, 아니 진혁 쉐프님은 사정을 알아야지.”
2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저쪽 대문 앞에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임진혁이 보인다. 그는 시계처럼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왔다. 옛날에 가족들과 만나기로 하면 두시간은 기본으로 늦던 진혁과는 다른 모습이다.
‘동진이 녀석도 지금은 싹수가 노래도 나중에는 진혁이처럼 바뀔 수도 있겠지.’
이것은 자신과 동진이의 일이 아니라, 동진이와 혜정이 사이의 일이다.
그녀는 잠시 여기에 배우러 와 있을 뿐이고, 국제 청소년 대회에 출전할 사람은 석현아와 김동진, 조혜정 세 명이다.
‘동진이가 진혁이를 무시하려고 일부러 늦게 오는 것도 아닐 테고.’
진희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혔다.
석현아와 혜정이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현아가 입을 열었다.
“동진이는 개인 사정이라서 제가 말하기가 좀….”
혜정이가 끼어들었다.
“걔는 아침마다 조리실 청소를 하고 와요. 여기서 돈을 안 내고 다니는 대신에 일을 하거든요.”
즉 근로 장학생이라는 이야기다. 진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더 일찍 일어나서 청소하고 시간 맞춰서 와야지. 저렇게 하다가 잘리면 어떻게 하려고?’
대학교 때, 진희 역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생활비가 부족해 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학생 일을 하면서 수업에 지각하거나 결석했던 적은 없다. 도서관 근로 일은 학생들이 서로 다투어가며 하고 싶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각 따위를 했다가는 바로 해고되고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남의 일이야, 남의 일.’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노르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빵은 상태가 좋다. 반죽까지는 확실히 괜찮았다. 하지만 김동진이라는 녀석은 이걸 구운 것을 본 적이 없다. 혜정이가 대신 구워줬기 때문이다.
-달칵.
“안녕하십니까!! 쉐프!!”
학생들이 일제히 차렷 자세를 하며 인사했다. 진희도 옆에서 머쓱하게 함께 인사했다.
‘주방이 진짜 군대 같은 분위기이긴 한가 봐.’
그녀는 가족들이 함께 일하는 주방에서 일해왔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어색했다. 임진혁은 대수롭지 않게 에이프런을 허리에 두르며 물었다.
“조혜정, 석현아. 김동진은?”
“늦어서 죄송합니다!”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온 동진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진혁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지각?”
“죄송합니다!”
“손님에게 제가 늦었기 때문에 빵을 굽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할 셈인가?”
김동진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진혁이 차갑게 말했다.
“일단 세 사람 다 손과 얼굴부터 씻고 와.”
“예? 얼굴이요?”
“셋 다요?”
“저도요?”
석현아와 조혜정, 김동진 세 명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곱게 화장한 두 여고생과 미처 눈썹과 구레나룻에 붙은 먼지를 털지 못한 남학생이다. 진희가 물었다.
“얼굴은 왜?”
“얼굴에 냄새나는 가루를 발라서 괴상한 냄새가 빵하고 같이 섞이잖아. 김동진 너도 마찬가지다.”
“….”
창백하게 질린 석현아와 입술을 깨문 조혜정, 두 사람이 화장실을 향해 뛰쳐나갔다. 김동진은 남자 화장실 쪽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세 명이 사라지고 나서 임 씨 남매 두 사람만 남았다. 진희가 속삭였다.
“야. 얼굴에 냄새나는 가루라니 조금 말이 심하지 않았냐?”
“석현아는 분을 바르고 복숭아향 입술연지를 발랐던데. 조혜정은 알로에 크림에 딸기 맛 입술연지.”
“그것까지 알 수 있어?!”
진혁이 딱 잘라서 말했다.
“입술에 저런 걸 바르고 있으면 제대로 맛을 구별할 수 없어. 빵을 맛볼 때 다른 맛이 섞여 버리잖아.”
“….”
맞는 말이다. 엄청나게 화난 것 같진 않은데 무표정하게 말하니 무서울 뿐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열심히 화장했을 텐데 말이야. 진혁이 너 엄청 사랑받고 있다고.”
“임진희.”
“응?”
“케이크 굽는 거, 네가 직접 하지 않았지?”
“혜정이가 와서 오븐에 넣어 줬더라. 설마 냄새로 알았어?”
“다음부터는 네가 직접 해.”
“…알았어.”
‘일봉 매니저님이 왜 무서워했는지 알겠다니까.’
세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손과 얼굴을 씻어냈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진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업은 길지 않았다.
“석현아, 뭘 잘못한 것 같지?”
“오븐에 너무 오랜 시간을 구웠어요.”
“그래, 맞아. 레시피대로 하면 30분이 맞지만, 오븐 온도를 보면서 상태를 계속 관찰해야지. 5분만 덜 구웠어도 더 좋았을 거야. 그리고 조혜정, 너는?”
그녀가 쩔쩔매며 케이크를 살폈다.
“저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너는 지금 기본이 안 되어 있어.”
진혁이 한쪽 구석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크리밍(Creaming), 비팅(Beating), 폴딩(Folding)이다.
“이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진희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임시 실습생이라 이런 경우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다행히 김동진이 더듬더듬 답을 이야기했다.
“버터와 설탕이 하얘지고 몽실몽실하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휘젓는 것이 크리밍입니다.”
“그래. 그 다음은?”
“비팅은 반죽을 쳐서 때리는….”
“틀렸어.”
“크리밍해서 부드러워진 버터와 설탕에 달걀을 넣는 거예요. 한꺼번에 넣으면 분리되어버리기 때문에 먼저 풀어놓은 달걀을 조금씩 조금씩 붓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어…. 공기가 최대한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다음은?”
“폴딩은 밀가루와 다른 건재료들이 들어갈 때 공기를 최대한 많이 넣는 과정입니다.”
“주의사항은?”
“나무로 된 숟가락이나 전자 믹서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래.”
혜정이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가 전자 믹서를 사용해서 밀가루와 설탕을 섞어버렸어요. 죄송합니다.”
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사람을 쳐다보았다.
“석현아, 왜 혼자 케이크 주변이 바삭바삭한 갈색이라고 생각해?”
“자, 잘 모르겠습니다!”
“케이크용 틀에 스프레이를 뿌려서 케이크 빵이 잘 떨어져 나오게 하려고 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오일 스프레이를 과다하게 뿌리면 그것 때문에 가장자리가 타면서 굳어버린다. 알겠나?”
“시, 시, 시정하겠습니다!”
잘했다는 이야기 한 번 없다. 진희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서 있었다.
‘엄격하다니까.’
실수를 저지른 것을 지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수를 어떤 식으로 보완하면 될지 바로바로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조금만 더 부드러워도 좋을 텐데.’
평소에도 그다지 상냥한 편은 아닌데, 가르치는 동안에는 마치 극기훈련 센터의 체육계 조교처럼 엄격하게 군다.
‘애들이 진혁이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오해할 것 같아.’
진희와 학생들이 구워낸 케이크를 식히고 버터크림 아이싱을 하는 데까지 세 시간 정도가 걸렸다.
“아이싱을 할 때는 뭘 주의해야 하지?”
“크림의 온도요!”
“평평하게 하는 거요!”
“그리고 또?”
“그리고….”
진희는 흐뭇하게 학생들과 진혁을 지켜보았다.
11시 30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영모가 튀어나왔다.
“여어. 점심을 먹으러 가야지!”
진혁이 혀를 찼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
“밥도 안 먹이고 수업을 할 셈인가? 하하하! 열정은 알겠지만 말이야. 진희 씨도 같이 식사하겠나?”
임진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학생으로 왔으니까 다른 학생들하고 같이 먹을게요!”
‘교장 선생님하고 식사하는 것도 아니고, 부담스럽다니까.’
“그럼 진혁 쉐프, 이쪽으로 오시게나.”
◈ ◈ ◈
주영모와 임진혁, 두 사람은 주영모 아카데미 앞의 자그마한 일식집으로 향했다.
조그맣고 우아한 가게에는 바 자리에 6인석, 그리고 2인용 테이블이 2개 있을 뿐이었다.
주영모는 당당하게 에어컨 앞 테이블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주영모 원장님.”
가게 주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임진혁 쉐프님은 처음 뵙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봤나?’
그렇게까지 유명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드문드문 사람들이 알아볼 때가 있다. 진혁이 미소지으며 답례했다.
“반갑습니다.”
“주영모 원장님은 여느 때처럼 치즈 돈가스를 드릴까요? 임진혁 쉐프님은요?”
메뉴는 많지 않았다. 히레 가스와 로스 가스, 치즈 돈가스 세 종류뿐이다.
“저도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주인이 물을 갖다 주는 동안 주영모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하하! 이 시간에 오지 않으면 여기서 식사하기 어렵단 말이야. 조금만 지나도 손님들이 몰려온다고. 숨겨진 맛집이야.”
“그건 먹어봐야 알 것 같은데요?”
“농담도 잘하는군. 학생들은 어떤가?”
“기억력이 나쁘고 손이 느립니다. 한 명은 상습적으로 지각하고요. 한 번 더 지각하면 그대로 탈락시키고 싶군요.”
겉치레라고는 없는 솔직한 대답에 주영모는 물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김동진 말인가?”
“예.”
“그 아이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네. 내가 함부로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말이지.”
“그럼 그냥 탈락시켜도 되겠군요.”
진혁이 서늘하게 말했다.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 출전에 지각하면 출전이 금지되지요. 제과제빵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녀석을 데리고 뭘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영모가 뒷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면 듣고 모르는 척 해주게나.”
“….”
“그 녀석은 원래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었어. 그런데 사업 실패로 온 가족이 자살하고 혼자 살아남은 거야. 지금은 보육원에 있는데, 미각이 뛰어나서 내 장학금을 받아서 학원에 다니고 있지.”
진혁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일단 암천대의 입단 전제 자체가 횡액을 당해 가족을 잃은 고아라는 점이다. 그는 이미 99명의 고아를 죽여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사연으로는 눈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영모는 이 이야기를 듣고서 김동진에게 어설픈 동정을 뿌리는 이들을 많이 만났기에, 진혁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편견 없이 그 아이를 받아들여 줘서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