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17화 (317/656)

제 317화

“무슨 소리야, 내가 형에게서 배운 게 더 많지.”

진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한테 뭘 배웠다고?”

“가게를 꾸릴 때 경영 일반도 전부 형이 하고 있고. 이번 직영점 초안도 다 형이 잡았잖아. 그리고 일반적인 조리사 훈련 과정에서는 체력 단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

백진영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웃었다.

“…에이, 설마 네가 정말로 그렇게 했으려고. 체력 단련은 셋 다 말렸잖아.”

“….”

진혁은 잠시 침묵했다.

“설마 진담이었어?”

“하하하하.”

그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수라간의 숙수들도 분명히 전투 훈련을 했는데 말이야. 이제는 더 이상 그 시절이 아니라는 걸 자꾸 착각해 버리네.’

요리 재료에 독버섯 따위가 섞여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약과 독을 구분하는 훈련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체력 단련을 병행한다.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방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살수가 은밀하게 주방에 잠입해 독을 넣거나 하는 것을 막으려면 기감은 물론이고 뛰어난 전투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기에 일월신교의 숙수란 기본적인 훈련과정을 거치고 생존한 전투원들 중 후각과 미각이 뛰어난 자들이 선발되어 수행하는 업무다.

‘일반 무인들은 하기가 어려운 일이야. 특수부대원에 가까운 전문직종이지.’

고된 암살업무 중 후각이 유난히 예민한 이들은 피비린내를 견디지 못하고 초반에 탈락하기 마련인데, 일정 이상 경지가 오르면 오히려 오감이 민감한 자들이 유리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그나저나 방송국에서 가게로 널 찾는 전화가 왔던데 연락은 받았어?”

“방송국이라니?”

“전에 너랑 같이 일했던 PD님이 무슨 섭외가 어쩌고 하면서 연락을 꼭 달라던데.”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길래?”

백진영이 기억을 되새기며 말했다.

“너한테 꼭 직접 얘기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

“글쎄, 지금 하는 목표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관심은 없는데.”

진영이 킥킥 웃었다.

‘임진혁 저 녀석은 정말 단도직입적이라니까. 불도저도 아니고, 한 방향만 보면서 쭉 달려가잖아.’

“사실 뻔하잖아. 방송에 나와 달라는 거 아니야? 세계 대회에도 나왔고, 요리 평론이나 쿠킹 방송 같은 거겠지. 아! 세계 대회 다큐멘터리일 수도 있으려나?”

“그럼 마리오한테도 연락을 했을 텐데?”

“마리오 쉐프는 딱히 연락받은 게 없는 것 같던데.”

“흐으음. 지금 연락해 보지 뭐.”

진혁은 궁금한 것은 바로 해결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백진영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김산호 PD님, 임진혁입니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일을 처리한다. 진영은 턱을 괴고 하품을 했다.

‘요리 평론도 그렇고 쿠킹 방송도 그렇고 진혁이가 지금 하고 싶어 하는 ’대한민국에 맛있는 빵 가게를 늘린다’라는 목표하고는 거리가 멀 텐데. 분명히 단호하게 거절할 거야.’

“흐음…, 그렇습니까? 나쁘지 않군요.”

하지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임진혁의 대답은 백진영의 예상과 달랐다.

“글쎄요, 관심은 있습니다만…. 그 방향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럼 다음에 만나서 듣겠습니다.”

임진혁은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백진영이 놀라서 물었다.

“뭐야. 네가 관심 있는 일이야?”

“응.”

“우리 가게 홍보나 직영점 마케팅 같은 것 때문에 네가 쉬는 날에 무리해서 촬영을 할 필요는 없어. 이미 디저트 서바이벌 쇼 덕분에 <해와 달>은 충분히 유명하다고.”

김도을을 비롯한 열성적인 팬클럽 회원들이 SNS에서 신작 빵이나 쿠키가 나오는 즉시 리뷰를 올리는 것 역시 도움이 되고 있다. 진혁이 과로할 것을 걱정한 백진영이 말을 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아니, 정말로 괜찮은데, 이건 좀 더 재미있어 보이는 컨셉이야.”

진혁이 어떤 컨셉의 방송인지 설명하자 백진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건…흠. 미국에서 방송했던 프로그램하고 비슷한 포맷인데?”

“이런 게 이미 있었다고?”

“실력 있는 쉐프가 요식업을 하고 있는 초보 가게를 찾아가서 장사를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거잖아. 그런 프로그램은 꽤 있었어.”

“흐음. 그럼 기존 방송 프로를 보고 결정해야겠다.”

백진영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아! 내가 DVD 빌려줄게. 내가 이러려고 3시즌 전부 프리미엄 박스 세트로 샀나 보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DVD 플레이어가 없어.”

“…컴퓨터에서 재생하면 되잖아.”

“컴퓨터도 없는데.”

집에서 하는 일은 운기조식과 요리하기 밖에 없다. 심지어 잠도 거의 자지 않는다. 양치하거나 씻을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진혁의 집에는

무림 고수의 짧은 답변에 백진영이 뜨악해했다.

“맞다, 그랬지. 우리 집에 와서 봐….”

“고마워.”

◈          ◈          ◈

진혁은 다음 날 바로 김산호 PD를 만났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주셨군요.”

그는 따로 고맙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진혁이 새벽부터 가게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하자, 아예 일을 시작하는 시간에 맞추어 왔다.

전날 저녁에 연락했는데 익일 새벽 4시에 <해와 달>의 주방까지 방문한 것을 보면 이쪽도 필사적이다.

‘이 사람은 항상 급하게 사람을 구한단 말이지. 미리미리 구해두면 좋을 것을.’

당장 다음 달에 할 암살 사건이 쌓여 있는데 살수를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것과 똑같은 일이니 말이다. 사건 1을 처리할 살수를 한 명만 교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을 준비해 두어 예비를 두는 것은 감독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진혁은 김산호의 직속 상사가 아니었기에 그를 훈계하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반죽을 치대며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밤을 새웠는지 충혈된 눈을 한 김산호는 두 팔을 벌리며 열렬히 말했다.

“…바쁘시니 용건부터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이야기 드렸다시피 이번에 새로 촬영하는 프로그램의 컨셉은 ’악마의 주방‘ 프로그램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촬영해서 인기를 얻었죠! 미국에서 유명한 쉐프인 고드릭 램지가 진행해서 식당 주인과 종업원들이 좀 더 가게를 잘 꾸려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는데요. 혹시 보셨습니까?”

“예.”

어제저녁 늦게 백진영의 집에서 고작 한 편 봤을 뿐이지만, 진혁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김산호 PD가 흥분해서 말했다.

“보셨다니 이야기가 빨라지겠습니다. 임진혁 쉐프님이 함께 출연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함께‘라는 단어를 들은 임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국제 대회에서 입상한 재능있는 쉐프로 자신의 가게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뿐이다.

무공 수련을 하는 자는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출연하기 전의 진혁은 자신이 다른 제과제빵사들과 비슷한 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름난 국제 대회에 출전하여 상을 타고,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의 수준을 파악하면서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신흥 문파의 문주 급. 이제 막 떠오르는 루키지만 오룡 이봉처럼 무림 전역에 유명하지는 않아.’

20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탑급 쉐프인 아드레아노 존부나 고드릭 램지의 레벨은 아니니, 그 역할을 하는 메인 쉐프가 분명히 따로 있을 것이다.

“고드릭 램지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아, 이건 먼저 눈치채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주영모 쉐프님입니다. 사실 주영모 쉐프님이 추천해주시기도 했지만, 임진혁 쉐프님이 워낙 실력이 있으시니까 섭외를 왔죠, 네.”

진혁은 완성된 반죽 덩어리를 손바닥만 한 크기로 떼어냈다. 트레이 위에 동글동글한 반죽이 하나씩 놓였다. 그는 주영모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을 떠올렸다.

‘주영모 쉐프님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좋은 소식 없냐고 계속 묻던 게 이 얘기였군.’

진혁은 등을 돌리고 미리 예열되어있던 오븐에 트레이를 밀어 넣었다. 그 뒤에서 김산호 PD는 눈치 없이 싱글싱글 웃었다.

“오너 쉐프로 일하고 계시니 저희가 최대한 고려해서 스케줄을 잡을 겁니다.”

‘이놈을 빨리 돌려보내고 허공섭물로 나머지 빵을 구워야겠다.’

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지금 주영모 아카데미의 실습 강사로도 출강 중이라 일정이 꽉 차 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만, 언제까지 답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적어도 이틀 안에는 대답을 주셔야 합니다. 어려우시다고 하면 다른 분을 섭외해야 하니까요.”

김산호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PD가 돌아간 후 <해와 달>의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쳐졌다.

부엌에는 이제 진혁 이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파아앗

밀가루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구름처럼 피어올랐던 하얀 포말은 곧 허공 위에서 뭉쳐지기 시작했다.

뛰어오르며 껍질을 벗어버리고 드러난 주홍빛 달걀노른자가 통통 튀어 밀가루 속으로 뛰어들었다. 투명하고 걸쭉한 흰자는 조르륵 흘러내려 스테인리스 보울 속에 담겼다.

무염 버터는 여덟 조각으로 갈라지며 허공에 뜬 밀가루 뭉치에 합류했다. 소금 그릇에서 분수대의 물길처럼 솟아오른 고운 소금 가루 역시 허공을 뛰놀며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진혁은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가볍게 손가락을 휘휘 저어냈다.

그가 손목을 꺾거나 검지를 들거나 손바닥을 펼칠 때마다 빵 재료들이 군무를 추는 것처럼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명령을 따랐다.

그는 새벽, 아무도 없는 이 고요한 시간을 즐겼다.

시간이 흘렀다.

완연히 해가 뜨면서, 오븐 안의 반죽들이 점차 익어가며 먹음직스러운 향기를 풍겼다.

달걀 물을 발라 노르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식빵이 차곡차곡 쌓였다.

봉투에 넣어 포장하는 일은 조금 후에 올 직원들이 할 것이다.

- 딸그랑.

진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실습 지도는 내일부터고.‘

그때 주영모를 만나면 텔레비전 프로그램 촬영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          ◈          ◈

사흘 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걸 한다고 해서!”

진희는 감지 않은 머리 위에 야구모자를 덮어쓴 채 문을 박차고 나섰다. 새벽 근무에도 익숙하고, 해뜨기 전에 나가는 것도 일상이다.

‘병원도 아니고 어머니 가게도 아닌 곳에서 이런 식으로 달 떠 있는 시간에 출근하다니,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야. 이게 다 임진혁 때문이야!!’

전부 스스로 결정한 일이지만 이렇게 잠이 부족한 채로 씻지도 못하고 나갈 때면 괜히 남 탓을 하게 된다.

주영모 아카데미 대회 준비반은 새벽부터 열려 있었다. 진희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동기들이 반겼다.

“진희 언니! 어서 와요.”

“반죽은 다 부풀었어?”

“그럼요.”

조리고등학교 3학년인 혜정이가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진혁 쌤이 확인하러 오시는 날인데 당연히 체크해놨죠.”

평소에는 화장하지 않고 부스스하게 머리를 묶어오던 혜정이는 오늘따라 마스카라를 비롯해 풀메이크업을 했다. 머리는 세팅한 것처럼 곱슬곱슬하게 퍼머까지 한 걸 보니 임진혁을 만나기 위해 온갖 준비를 한 게 분명하다.

옆에 서 있던 석현아 역시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칠했다. 연분홍빛 블러셔에 얼굴이 작아 보이기 위한 셰딩 역시 빼놓지 않았다.

‘헤어 드라이에 1시간, 화장 1시간. 얘들 3시에는 일어났겠구만.’

진희가 혀를 찼다. 정성스레 꾸미고 오는 것은 나름 귀엽지만, 저러고 오는 게 쌍둥이 오빠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걸 생각하면 닭살이 돋아 견딜 수가 없다.

‘쟤네들이 수면이 부족한 건 다 임진혁 네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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