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6화
진혁이 서늘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호의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알겠습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진 주영모는 흠흠, 헛기침했다.
“자네가 하는 이 프랜차이즈 계획은 사실 프랜차이즈라기보다 직영점에 가깝군. 그건 알고 있지?“
“….“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자네가 상급반 이후 과정에 강사로 와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진혁 쉐프에게 관심이 있는 학생들도 있으니, 그 학생들 중 하고 싶어 하는 애들이 있으면 직영점으로 데려가서 키워 봐.“
주영모는 학생들이 만든 케이크와 과자들의 포트폴리오를 보여 주었다.
“세계 조리기능대회 준비반하고 디저트 대회 준비반이 따로 있지. 얘들은 지금 가을 필리핀 청소년 케이크 대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제 고2, 고3 애들이야.”
“생각보다 어리군요.”
“대학 특기 입학 전형에서 국제대회 입상은 큰 경력이 되니까 말이야.”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제빵사로 일하고 싶어 하는 애들은 없습니까?”
“아예 없지는 않지, 하지만 드물어.”
진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 학생을 모집할 때는 어떤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까?”
“경력을 바탕으로 필기와 실기, 그리고 면접시험을 본다네. 아무나 뽑지는 않아.”
“제가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인데?”
◈ ◈ ◈
주영모와 세부 사항을 조정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혁은 대강 이야기를 나눈 후 자리를 떴다.
‘이 시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오랜만인데.’
밤늦은 시간에는 항상 연습을 하고 있었으니, 가게나 연습실이 아닌 곳으로 향하는 게 어색했다.
함께 밥을 먹으려고 미리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진영이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 있지 않고?”
“잠깐 나온 거야. 네 볶음밥 미리 시켰어.”
“형은 오늘도 해물 짬뽕이야?”
“응.”
이 중국집에서는 항상 같은 메뉴를 먹는다. 백진영은 해물 짬뽕, 임진혁은 달걀 볶음밥이다. 진혁이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렸다.
‘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호오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맘에 들어.’
습관적으로 같은 음식을 먹어도 괜찮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밝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행복을 발견할 때마다 소소한 즐거움을 느꼈다.
미리 주문한 음식은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준비되었다.
백진영이 따스한 국물을 숟가락으로 뜨며 호호 불었다. 그가 익은 홍합 속살을 꺼내며 물었다.
“주영모 쉐프님하고 이야기는 잘 했어?“
“유키코 쉐프님하고도 했던 얘긴데,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당장 땅이나 가게보다는 솜씨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이야.“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 그쪽 아카데미에서 실습 지도를 맡을까 해. 괜찮은 애들이 있으면 좀 데려오려고.“
“실습 지도라….“
“세계 대회 준비반이라는 게 있더라고. 태국이나 필리핀 같은 곳의 국제 청소년 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하는 게 목표래. 개인 작업, 팀 작업 따로따로 준비하더라.“
“우리 스승님이 하시는 바리스타 아카데미에서도 비슷한 걸 하던데.“
“잘됐네.“
“응? 뭐가?“
“형도 바리스타 학생들을 데려와야지. 기본적으로 음료를 팔아야 마진이 나는 구조고, 카페에 바리스타가 없으면 안 되니까.“
“….“
백진영이 눈을 껌뻑였다.
“다른 학생들을 데려와서 키운다라….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신감 없이 주저하며 중얼거리는 이야기를 들은 진혁이 피식 웃었다.
“프랑스에서 마셔본 커피들도 맛있었지만, 형이 만든 커피도 그에 못지않았어.“
“그래?“
“그쪽은 물이 달라서 그런지 아니면 기준 자체가 높은 건지 길거리 아무 데서나 마시는 커피들도 다 맛있더라. 그리고 아이스 커피도 팔지 않고 커피는 뜨거운 거라고 생각해.“
“그 얘기는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여름이라 더운데 뜨거운 커피만 팔더라.“
“냉면 같은 건지도 모르지. 우리도 누가 냉면을 데워 달라고 하면 ‘왜 저러지?’하고 생각할 거 아냐. 처음부터 따뜻한 차 종류라고 생각하고 마셨다면 계속 그렇게 먹을 법도 해.“
“음식도, 음료도 바다를 건너가면서 각양각색으로 변하나 봐. 미국에서는 아이스 커피를 꽤 마시는데 다른 나라에선 그렇지 않잖아. 밀크티만 해도 영국에서는 흔히 마시는데, 당장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왜 차에 우유를 넣는지 의아해한다고 하더라고.“
“확실히 진영이 형이 음료에 대해서는 잘 알아.“
“이 정도는 상식인데, 뭘.“
진영이 쫄깃한 조갯살을 오물오물 씹으며 알싸한 국물을 마셨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유럽에서 커피의 기본은 에스프레소고, 우유를 넣은 커피를 아예 팔지 않아. 시럽 같은 걸 넣기보다 원두 본래의 맛을 살리는데 충실해. 이승주 스승님이 그런 계열을 추구하셔서 나도 배웠을 뿐이야.“
진혁이 달걀 볶음밥을 한 숟갈 떴다.
신선한 달걀과 쌀, 소량의 소금만으로 요리해낸 단순한 요리에서 포슬한 달걀 향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여기 볶음밥은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아. 기본에 충실한 맛이야.“
중국식 볶음요리는 기름을 듬뿍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식으로 개량된 황금 볶음밥(蛋花炒飯)은 다르다. 강한 화력에 달군 웍을 사용해 고슬고슬한 밥알 한 알 한 알을 일일이 기름으로 코팅하되, 기름을 쓰는 양은 요리사마다 다르다. 이 가게의 요리사는 그 기름을 최소한의 양만 사용하여, 자신이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래? 다음에는 나도 볶음밥을 먹어볼까.“
백진영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다음에도 짬뽕을 시킬 거면서.“
매번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고민하지만 결국 같은 결론을 내린다. 백진영은 모험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식당에 들어가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습관을 바꿀 리 없다.
임진혁은 종종 진영의 그런 습관을 놀리며 즐거워하곤 했다. 그때마다 으레 백진영은 같은 대답을 했다.
“그거야 그렇지. 이 얼큰한 국물을 포기할 수가 없어. 신선한 해물에 비린내도 전혀 없고, 조개 해감도 완벽하고. 후루룩 들이마실 수밖에 없는 탱탱하고 꼬불꼬불한 면발도 말이지.“
짬뽕을 먹는 이유는 짬뽕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진혁이 킥킥 웃었다.
“짬뽕 예찬은 나한테 할 이야기가 아니라고. 주방에 얘기해주면 좋아할 거야.“
“그건 부끄럽잖아.“
“엄청 좋아할걸. 어쨌든 형, 새로 꾸려서 키울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만드는 식사 빵도 이런 볶음밥 같은 느낌이면 좋겠어. 먹을 때는 담백하고 자꾸 생각나는 가정의 맛 말이야. 프랑스 빵들이 딱 그런 느낌이었거든.“
“진짜로?“
“응.“
백진영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지금 네 컨셉부터 바꿔야 해. 일단 그 피하고 살인 사건 컨셉 좀 버려 봐.“
“엑? 왜?“
“누가 살인 사건 현장 쿠키를 보면서 가정적이고 따뜻한 이미지를 생각하겠냐고. 그건 할로윈이나 쇼 테마에나 어울리지.“
“그건 내 컨셉이고, 후배들 하는 식사 빵은 또 식사 빵대로 되잖아?“
“다들 널 닮고 싶어 할 거야.“
“디저트 컨셉까지?“
백진영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 모방하지 말고 네 방식을 찾아라, 하고 계속해서 이야기해도 말이지. 일하는 습관부터 어떤 식의 커피를 굽는지까지 전부 좇게 되어 있다고. 내가 스승님, 그러니까 이승주 선생님을 보면서 그랬거든.“
“호오.“
“커피 원두를 관리하는 방법까지 다 따라 하게 되더라. 날짜별로 라벨을 붙이는 방법이나, 씁쓸한 맛이 강한 원두의 경우에는 초록색, 그리고 산미가 강한 원두는 붉은색 띠지를 봉투에 둘러 구별하는 것까지 전부 다 스승님한테서 배운 거야. 원래 과일 향이 풍기는 원두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데 그것도 스승님이 자꾸 맛있다 맛있다 하시니까 저절로 좋아하게 되더라고.“
결국, 입맛까지 변해 버렸다며 옛이야기를 하던 진영이 킬킬거렸다.
“살인 사건을 테마로 한 쿠키를 만드는 백 명의 제자들을 양성하는 게 목적이라면,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름대로 특색 있잖아.“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이승주 바리스타님의 커피와 형 커피는 맛이 다르던데?“
“음, 나도 처음부터 내 커피 맛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야. 화웅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원두로 맛없는 커피를 만들 수 있을까 연구하다가…. 아하하.“
그는 옛일을 떠올리며 킥킥 웃었다.
“맛없는 건 내가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 맛있는 걸 개발하고 난 다음에 네 빵을 만나서 다행이지. 넌 내 은인이야, 임진혁.“
“짬뽕 먹다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이빨에 고춧가루 끼었어.“
백진영은 머쓱하게 웃었다.
진혁의 제안이 아니었더라면 독립할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촌 누나와 형 사이에서 삼촌의 눈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백 번 천 번 고맙다고 이야기해도 모자라지.’
하지만 진혁은 고맙다고 이야기해도 별 것 아닌 것처럼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더 이상 감사의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넌지시 표현하는 게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휴지를 집어 들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후에 진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넌 후각과 미각이 예민하고 정확해서 피드백을 해주면 도움이 많이 돼. 더 이상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건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든 됐지.“
“맞다. 형, <달커피>에 갔던 건 잘 됐어?“
진혁이 주영모 아카데미의 원장, 주영모를 찾아간 동안에 백진영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같은 시간에 그는 달커피 바리스타 교육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승주를 찾아갔다.
“달커피는 주영모 아카데미처럼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교육원은 아니니까. 스승님이 서너 명씩 받아서 교육시키는 게 고작이야. 나 때는 2년간 나 한 명밖에 없었고.“
“교육이 목적이 아니구나.“
“지금은 이름이 알려져서 가르쳐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꽤 늘었더라고. 지금 후보로는 다섯 명 정도 추천을 받았어.“
“실력은?“
“스승님이 추천하실 정도면 나쁘지 않을 텐데, 네 새 제자들이 만드는 빵하고 어울릴지 어떨지는 앞으로 맞춰가야지.“
“걔들은 창업에 관심이 있대?“
백진영이 씨익 웃었다.
“질 좋은 커피 원두를 사용하는 직영점에 채용되어서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 싶어 하는 애들이야.“
“유키코 씨가 짚어주었던 것이 도움이 됐어.“
“그래. 프랜차이즈 사업을 바로 시작하는 것보다 이편이 낫지. 재능이 있고 실력이 뛰어나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자본이 없는 사람들을 채용해 직영점을 늘리는 거야. 품질관리를 제대로 하는 직영점부터 시작해서 체계를 만들어두고 나중에 프랜차이즈로 확장하기도 용이할 거라고.“
백진영이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너랑 달리 달커피에서 강사를 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일단 보조 격으로 우리 가게에 바리스타 두 명이 번갈아서 오기로 했어.“
“빠른데?“
“네가 행동력 있게 일을 추진하는 걸 보고 배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