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4화
“솔직히 내가 가게를 경영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왜 말이 안 돼?”
“나는 아직 나이도 너무 어리고….”
진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너랑 나랑 동갑이라며? 네가 정신 연령이 더 높아서 누나 하겠다며.”
그녀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검지로 감아서 꼬았다.
“그건 어렸을 때 얘기잖아.”
“웃기지 마. 내가 하는 건 다 할 수 있다며.”
어린 시절 아웅다웅할 때부터 계속해서 주고받아오던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방과 후 활동으로 진혁이는 태권도, 진희는 미술을 하라고 권유받았는데, 진희가 자기도 태권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어머니가 항복하여 둘이서 같이 태권도를 다니게 되었다.
진희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하는 건 나도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나이가 들고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는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진희가 남아서 어머니의 일을 돕는 동안 진혁이가 자기는 집안일을 못 한다며 밖으로 돌았다. 백 원짜리를 가지고 오락실에서 버텼다. 진희는 왜 내가 할 수 있는 걸 네가 못 한다고 하냐며 진혁이를 구박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울컥해서 쏘아붙였다.
“당연히 다 할 수 있지! 넌 라면도 못 끓였고…! 엄마 생신도 맨날 까먹고!”
진희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진혁이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한 번 하기로 한 걸 안 한다고 말 바꿀 건 아니지?”
“아니, 야!”
“너 가게 주고 싶어서 하는 제안은 아니야. 프랜차이즈를 하면서 믿을만한 점장이 필요해서 그런 거라고.”
뜻밖의 이야기에 진희가 놀라서 물었다.
“프랜차이즈화를 한다고?
일봉이 만든 포도 맛 초콜릿 쿠키를 집어 먹으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서울에 올라와 <해와 달>로 돌아온 지 일주일.
해외에 있는 동안에 밀려 있던 일도 전부 처리했고 비축한 반죽의 양도 넉넉해졌다.
백진영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던 도중에 진혁이 이야기를 꺼냈다.
“형이 우리가 전부터 했던 그 이야기 말인데. 이번에 생각해 봤어. 점장으로 적당한 사람도 찾았고.”
“프랜차이즈 말이지?”
“응.”
“당분간은 내실부터 다져야 한다더니 왜 마음이 바뀌었어?”
“나는 원래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위해서 빵을 만들었거든.”
“그런데?”
“프랑스는 그냥 동네 아무 빵집에서나 빵을 먹어도 맛있어.”
이번에 프랑스에서 수많은 빵을 먹어보며 그는 자신이 이번 삶에서 목표로 하고 싶은 진정한 대의(大義)를 찾았다.
정파를 말살하여 지배한다거나, 부하의 원수를 찾아내 피의 복수를 한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일월신교의 뜻을 널리 떨쳐야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이 반드시 일월신교의 교리를 알리고 경문을 읽고 따라야 하는 한 가지의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진혁은 자신이 종교를 설립해 포교를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 빵을 만든다는 핑계로 유일무이한 교주(敎主)로서의 진정한 일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오며 바라본 태양은 압도적인 힘으로 그를 따뜻하게 포용했다.
그것을 보면서 진혁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태양의 기운을 받아 자라나는 작물에는 일력(日力)이 깃들어 있어.’
더 많은 사람들이 맛있는 빵을 먹으면 된다.
검과 창을 들지 않고, 식생활을 바꾸는 것으로 충분하다.
곡물을 통해 태양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점점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
진혁은 이 사실을 자신을 맞이하러 온 소망시의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저마다 이전보다 몸 상태가 많이 좋아져 있었다.
굽어 있던 허리를 완전히 편 금천복 어르신부터 사흘 동안 두들겨 맞은 복어처럼 비쩍 말라 있던 감호철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氣)가 밝았다.
그는 정지숙을 비롯해 자신이 만든 빵을 꾸준히 먹어온 사람들이 “몸이 가벼워지고 편해졌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계속해서 들어왔다. 하지만 그 이유는 오행진 때문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니 손님들의 육체적 상태가 어떠한지 시간을 들여 꼼꼼히 들여다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월신교의 교도들 중 특정 지위에 오른 자들은 일광욕을 통해 해의 힘을 체내로 받아들이는 의식을 한다.
하지만 지금 손님들은 그 일광욕을 하지 않고서도 의식을 한 자들처럼 건강해졌다.
진혁이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밀이 갖고 있는 본연의 일기(日氣)를 깨워, 일월(日月)의 진신(眞身)을 체내로 받아들이도록 도운 것이다.
‘나 혼자 만드는 거로는 부족해. 좀 더 많은 빵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샌드위치 공장에서 만드는 빵의 경우 진혁이 직접 새겨놓은 진을 통해서 오행기를 일부 흡수한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날 그는 샌드위치 공장에서 나오는 빵들을 확인하고 왔다.
그가 손수 반죽해 만든 빵에 비해서 덜하기는 하지만 다른 공장제 빵에 비하면 일기(日氣)가 충만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사이에 일봉이 만들어둔 반죽을 살펴보니 샌드위치보다 훨씬 더 태양의 기운이 풍부했다.
‘오행진이 설치된 조리대와 오븐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만든 빵에 태양의 기운을 넣을 수 있어. 하지만 공장제 빵은 사람이 만든 것에 비해서는 부족해. 그러니 직접 반죽을 할 수 있는 빵 가게를 늘리는 것이 좋지.’
“전에 프랜차이즈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무슨 일이야?”
“그때 제안한 사람이 별로였어. 아무나 데리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지. 그래서 형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야 당연히 환영하지.”
백진영이 눈을 빛냈다.
“삼촌도 도와주실 거야.”
“틀렸어. 회장님이 도와주시는 게 아니야. 오히려 화웅제과제빵기계공업에서 오븐을 많이 팔 수 있게 우리가 돕는 거지.”
백진영은 손에 들고 있던 닭 다리를 물어뜯었다. 지방이 풍부한 살갗 아래 육즙이 새어 나오는 다리 살이 쫄깃하게 씹힌다.
“…내가 돕는 다라.”
온몸이 뜨겁다. 한여름에 먹는 삼계탕 때문인지, 아니면 진혁이 이야기한 것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이제까지 삼촌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다. 삼촌이 낸 돈으로 학교에 다니고 졸업했으며 집을 얻었고 가게를 했다. 이번에 <해와 달>을 열며 진혁과 함께 동업하면서 독립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삼촌의 도움을 완전히 거절하지는 못했다.
백진영으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브랜드 경쟁력이나 차별성, 수익성은 확실히 있지. 지금도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상권 분석과 본사와의 협력 체계는 어떻게 할 거야? 당장 창업 기초 상황 점검 기준 같은 것도 짜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걸.”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교육하고 시험이야.”
“교육?”
“제대로 된 빵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 내 시험을 통과해야지.”
“시험이라….”
백진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일반 가맹점주나 직원이 있겠어?”
H & J 카페 앤 베이커리 시절에 제빵 보조 역할을 할 사람을 선발하려고 했을 때도 진혁이 까다롭게 굴어서 몇 명이나 돌려보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교육부터 시키고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만 창업할 수 있게 하면 될 거야.”
◈ ◈ ◈
보름 후.
모처럼 <해와 달>에서 제과제빵을 맡고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다 모였다.
“여기 있습니다.”
임진혁이 미리 출력해 제본한 A4 용지 묶음을 내놓았다. <프랜차이즈 계획안>이라는 이름의 표지가 선명하다.
“오, 이게 진혁이가 새로 짰다는 커리큘럼이야?”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던 마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어렵다.”
“어렵다고요?”
“한글이 이렇게 많으니까 어려워. 영어나 프랑스어로 된 건 없어?”
진혁이 가볍게 마리오의 등을 툭 쳤다.
토끼 새끼도 견딜 수 있을 것처럼 적은 힘으로 쳤는데, 안타깝게도 마리오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아퍼, 아퍼!”
“아프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면 그건 별로 아픈 게 아닌 거야.”
“와, 씨. 그냥 읽으면 되잖아! 읽으면!”
김은동은 눈을 크게 뜨고서 마리오와 진혁을 보았다.
“두 분이 사이가 좋네요. 사장님이 저렇게 편해 보이는 건 처음 봐요.”
임진혁은 키가 크고 위압감이 있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김은동은 항상 진혁의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오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 신입 점주용 커리큘럼을 같이 읽어봐요. 우리가 지금 이걸 보려고 모인 거잖아요.”
유키코가 김은동을 타일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종잇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읽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험이 너무 어려운 것 같은데요.”
김은동이 신입 점주가 만들 수 있어야 하는 빵과 케이크, 과자의 목록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지금 여기 목록에 올라와 있는 빵 종류만 서른 개가 넘고, 쿠키만 해도 열 개. 케이크는 열다섯 종류에 음료까지 하면…. 이건 합격하라고 만든 게 아니라, 사람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유키코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여기에 있는 걸 다 만들 수 있기는 한데…. 은동 씨는 여기에 있는 목록 중 몇 개나 만들 수 있지요?”
“…대여섯 개 빼고는 거의 만들 수 있는데. 진혁 쉐프가 말하는 ‘합격선의 맛’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리오는 목록 페이지를 펼쳐서 읽었다.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 만들 수 있는데.”
김은동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보통 프랜차이즈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유키코 쉐프님이나 마리오 쉐프님처럼 실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 더 잘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리스크를 좀 줄이고 실패하기 싫어서 하는 거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유키코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정도를 할 수 있다면 굳이 프랜차이즈 제과점을 차릴 필요가 없다고 봐요.”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습니까.”
“너 내가 보통 페이스트리 쉐프라고 생각해? 난 무려! 쿠프 드 몽드에서 우승한 한국팀 팀원이라고. 국가대표급이란 말이야.”
진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 쿠키는 없다.”
기죽은 마리오가 소심하게 덧붙였다.
“치사하게 먹을 걸 가지고 그러냐! 여하튼 내 실력은 진짜라고.”
“마리오 쉐프님 솜씨는 최고 수준이에요. 사실 자기 가게를 차려도 괜찮으신 분이죠. 저도 그렇고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잡은 기준이 낮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방향을 바꿔 보죠. 마리오 쉐프님. 지금 윈도우 베이커리를 여는 게 아니라 진혁 쉐프님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당연히 진혁이가 나보다 더 잘 만드니까 그걸 배우려고.”
“저도 마찬가지예요. 진혁 쉐프님에게 배우는 게 있기 때문에 계속 가게에 있는 거지요. 오히려 그쪽에 집중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그쪽이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