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3화
소망시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서미란은 능숙하게 사회를 보았다.
“그럼 이번 노래는 <소양강 처녀!> 하겠습니다! 불러주실 가수분은 누구십니까!”
“나요, 나!”
햇살 노인정 식구들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통에 소망시까지는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게 한국식 관광인가?’
진혁은 다시 하지 못할 그 경험을 나름 흥겹고 신나는 좋은 추억으로 간직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즐거워하셨다는 점이 좋았다.
소망 베이커리는 물론이고 시청 앞의 현수막 걸이대까지 플랜카드가 진혁의 우승을 축하하며 내걸려 있다.
“저건 또 언제 만든 건지….”
진혁은 이마를 짚었다.
아버지가 대회장에서 들고 있었던 조그마한 현수막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들어오면서 진혁은 자신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플랜카드가 시청 정문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뭡니까?! 저건.”
“우승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주문했어요.”
서미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 언제까지 붙어 있는데요?”
“글쎄요. 저번에 소망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한 달쯤 걸었어요.”
진혁은 말을 잃었다.
‘이따가 적당히 강한 바람에 찢겨나가도록 해야겠어.’
하지만 소망 베이커리의 간판 아래에도 똑같이 생긴 현수막이 작은 사이즈로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진혁은 입을 딱 벌렸다.
“아버지, 저건 아버지가 걸라고 하신 겁니까?”
“진희가 출력해와서 네 어머니가 걸었다.”
“…감사합니다.”
시청 앞 광장을 지나 소망 베이커리를 지나친 버스는 곧 햇살 노인정 앞에 멈추었다.
진혁은 먼저 내려가 문 앞에 섰다. 햇살 노인정의 노인들이 그다음으로 내렸다.
“내 너는 크기 될 줄 알았다 아이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버스에서 내린 다른 이들 역시 진혁에게 거듭해 인사를 했다.
“진혁이 우승 축하해!”
“정말로 잘 됐어.”
“네가 우리 마을의 자랑이야.”
헤어지면서도 다들 축하하는 말을 건넨다. 진혁은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축하하는 말은 이미 여러 차례 들었다. 하지만 낯선 이들이 하는 것과 그가 처음 빵을 만들었던 때부터 지켜보았던 친인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르다.
표정에 담긴 진심이 칼날처럼 선명하게 마음속 깊숙이 베어 들어온다.
‘이렇게까지 기뻐해 줄 줄은 몰랐는데.’
한두 명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기쁨에 들떠 있는 것만 같은 양상이다.
버스 기사까지 미소지으며 말했다.
“잘 했다, 잘 했어.”
이모님들은 집 근처의 숙소에 아예 방을 잡아드렸다. 이모들을 배웅하고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어머니는 진혁의 곁에 나란히 서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진혁아, 많이 피곤하지는 않니? 비행이 길었는데 서울에서 쉬면 좋은데, 집까지 내려오느라 고생이 많다.”
“괜찮아요, 비행기 안에서 많이 자서요.”
축하의 말보다 진혁의 몸 상태를 염려하는 것이 먼저다.
‘역시 어머니는 다르셔. 선물을 그만큼 사 오길 잘했지.’
“네가 정말로 자랑스럽단다.”
진혁은 뿌듯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내가 잘 키운 덕이지!”
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어머니 역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맨날 빵집에 가 있었잖아요. 내가 키웠죠.”
“허허허. 그런 셈이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자 금방 집에 닿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진혁은 어머니에게 사 온 선물부터 내놓았다.
어머니는 기쁨 반 근심 반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비싼 구두를 많이 샀어?”
구두 상자만 열 켤레였다. 상자 안에서 나온 구두를 보고서 진희가 깜짝 놀랐다.
“무지개 색깔별로 갖춘 거야?”
빨강, 노랑, 주황, 보라, 파랑, 초록 등 원색이 선명하다.
진희는 부모님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말없이 눈알을 굴리며 진혁을 쳐다보았다.
‘….’
진혁은 쌍둥이 여동생을 무시하고서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이런 거 좋아하시잖아요. 저번에 생일 선물로 사드린 구두랑 완전히 똑같이 생겼고, 색깔도 비슷하고.”
진희가 따졌다.
“어떤 점에서 색깔이 비슷한데?”
“채도가 똑같잖아. 빨간색을 좋아하니까 다른 색깔도 신으시면 좋지.”
어머니는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열린 구두 상자들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동공이 흔들리고, 침을 꿀꺽 삼킨다.
“…내가 이런 구두를 신어도 될까?”
“어머니 구두는 전부 검은색이잖아요. 옷도 검은색이고.”
진혁이 말하고 임운정이 거들었다.
“여보, 당신은 어떤 색깔 구두를 신어도 잘 어울려.”
“…진희같이 어린 애들이 신어야 예쁘잖아. 나 같은 늙은이가 아니라.”
진희가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끼어들었다.
“늙은이는 무슨! 금천복 할머니를 봐요. 은색 구두에 정장 입으셔도 멋지시기만 하잖아요.”
“그분이야 그렇다만….”
주저하는 어머니에게 여동생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진혁이가 모처럼 선물로 사 온 거잖아요. 요일별로 하나씩 신어도 남겠어요. 매일같이 같은 구두만 신으면 그것만 바닥이 닳아서 오래 못 신으니까, 고루 신으면 되겠다.”
“그래?”
어머니는 개나리색처럼 샛노란 색 구두에 시선을 주었다. 진혁은 잽싸게 그 구두 안에 담긴 종이 뭉치들을 꺼내어 어머니의 발에 신발을 갖다 댔다.
신발은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꼭 맞았다.
“와! 꼭 맞네요.”
“엄마! 예뻐요. 신고 걸어 다녀 보세요.”
“이렇게 높은 굽은 처음 신어보는데.”
“일할 때 말고, 놀러 다니거나 할 때 신으면 되겠어요.”
“매일같이 출근하는데 놀러 다닐 시간이 어디 있어?”
“퇴근하고 집에 오실 때 신어도 되고. 슈퍼마켓 갈 때 신어도 되죠?”
어머니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그럴까?”
“그래요, 그래.”
“내 선물은 없어?”
“여기.”
닭고기와 소고기 맛을 내기 위한 육수 큐브와 유리통에 든 통후추, 메이플 시럽과 프랑스산 꿀, 온갖 종류의 말린 향신료 잎을 비롯하여 온갖 재료들을 가져왔다. 선물이 어떤 종류인지 확인한 진희가 입을 딱 벌렸다.
“고마워. 고마운데….”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인다. 그녀가 무어라 하기 전에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혁이 너도 피곤하지? 어서 들어가서 자렴. 이부자리를 준비해 놓았어.”
“안녕히 주무세요.”
방으로 돌아가는데 진희가 따라왔다.
“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
다시 ‘야’가 되었다. 진혁은 바뀐 호칭을 들으며 킥킥거렸다.
“왜.”
“선물 고르기 전에 생각을 했냐, 안 했냐?”
“뭘 좋아할지 모르니까 종류별로 사 왔지.”
“향수나 립스틱, 가방 같은 것도 있는데 왜 하필 구두만 저렇게 많이 사 온 거야?”
“진희 너도 어머니 생신 선물로 구두를 샀잖아.”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구두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여서 또 샀다는 이야기다. 진희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구두가 낡았는데 안 사시니까 새로 사 드린 거지. 지금은 가방이 낡았으니까 새 가방을 사 왔으면 딱 좋을 타이밍인데. 끈이 해져서 떨어지기 직전인데 계속 기워서 쓰시잖아.”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새로 안 사신대?”
“아깝다고 하시거든. 영원히 그 가방만 쓸 기세야.”
“….”
“아휴, 내가 미리 말해줄 걸 그랬다. 파리는 가방이 싸다던데. 사 오면서 내 것도 하나쯤 사 왔으면 더 좋았을걸.”
진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게 진짜 속셈이구만?”
“아니야.”
그녀는 조그마한 은색 상자를 두 개 내밀었다.
“자.”
“응?”
“이건 일봉 매니저님 선물, 이거는 내 선물.”
“아니, 귀국한 건 난데 왜 나한테 선물이야?”
“엄청난 대회에서 우승했다며. 그래서 우리가 만들었어.”
진혁은 종이에 감싸여 은색 상자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향기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과일 향이 풍기는 초콜릿 칩 쿠키였다.
‘하나는 오렌지, 다른 건 포도인가? 일봉이 쿠키 만드는 솜씨가 많이 늘었네? 머더 하우스 시리즈 쿠키를 많이 만들어서 그런가.’
거의 아버지 대신에 가게를 책임지다시피 하면서 이것저것 만드는 양이 늘어난 탓도 있어, 실력이 일취월장한 게 눈에 보였다.
‘다음에 이런 대회 나갈 때는 일봉이 녀석도 고려해볼 수 있겠다.’
진혁은 은색 상자를 받아 곁에 두었다. 진희가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말했다.
“안 열어 봐? 이건 내 건데.”
‘호오라. 그걸 사용했단 말이지?’
“딱 봐도 쿠키잖아.”
진혁이 은색 상자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안에서 종이 포장지에 싸인 쿠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이 들렸다.
“앗, 앗. 흔들지 마. 그럼 안에 부서진단 말이야!”
진혁은 진희가 직접 준비했다는 선물 상자를 열었다. 붉은색 리본을 잡아당기고 은색 종이 뚜껑을 열자, 평범한 종이 호일에 감싸인 초콜릿 칩 쿠키가 보였다.
특이하게도 초콜릿 칩의 색깔이 오렌지색이다.
진혁이 눈썹을 둥글게 휘며 말했다.
“이거, 오렌지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로 만들었구나? 내가 공개한 레시피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응. 초콜릿은 식혀서 굳히고 잘라서 칩으로 썼어. 맛있더라.”
약간은 어색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진희가 덧붙였다.
“네가 이 초콜릿으로 상을 탔으니까 이걸로 축하해 주고 싶었어.”
“이건 만드는 게 그리 쉽지 않았을 텐데.”
탑클래스의 실력은 가진 마리오나 루이스도 처음에 배합 비율을 가르쳐주었을 때 몇 번이나 실패했다.
‘진희가 내 생각보다 더 실력이 좋아졌는데?’
“일봉 매니저님이 많이 도와줬어. 매니저님은 포도 맛, 나는 오렌지 맛으로 만들었거든! 한 번 먹어봐.”
그녀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먹어보고 괜찮으면 가게 메뉴에 올려도 되지?”
진혁은 맑은 주황색 칩이 큼직하게 박힌 쿠키를 한 조각 집어 들었다. 검지와 엄지손가락에 포슬포슬하고 말랑한 쿠키의 감촉이 따뜻하게 와닿았다.
강렬하고 농후한 시트러스 향에 씁쓸한 초콜릿 향이 섞여 감돈다.
-바삭
곱게 부풀어 올라 촉촉하면서도 속살이 쫀득하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오렌지 맛 초콜릿과 잘 어울린다. 진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아주 잘 만들었는데. 이 정도면 합격이다.’
일봉이가 만든 포도 맛 초콜릿도 나쁘지 않았다. 진혁이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슬슬 진희 너도 독립해서 자기 가게를 가질 때가 됐지?”
“무슨 소리야! 내가 아직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진희가 정색하며 말했다.
“시키는 것만 만들 줄 알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네 가게를 차리고 싶지는 않고?”
“…내 가게?”
“꿈을 크게 가져야지. 언제까지 부모님 일만 도우면서 같이 살 건데?”
진희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내 지분도 있잖아. 부모님 일을 돕는 게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거지.”
“직원을 하나 더 뽑고 샌드위치 가게 일은 어머니께 완전히 맡기는 게 어때?”
“그럼 난 뭘 해?”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 여기를 봐.”
진혁이 벽에 붙어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그건 또 왜?”
“<해와 달>은 새로운 지점이 필요해. 지금은 강남점과 망원점만 있지만, 다른 대학가에도 하나 더 가게가 있었으면 좋겠어.”
“어디에?”
“대학로 근처에. 미리 알아봐 둔 데가 있어.”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믿을 수 있고 실력 있는 지점장이 필요하거든.”
“뭐어어어?!”
진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그녀가 외쳤다.
“지금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