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2화
그때 그들이 탈 비행기의 탑승 안내를 알리는 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냥 이렇게 하죠.”
진혁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 ◈ ◈
비행하는 동안 아버지는 내내 잠들어 있었다. 중간에 기내식이 두 번인가 나왔지만 전부 물렸다.
아버지의 기혈이 순환할 수 있도록 진기를 슬쩍 보내놓았다.
진혁은 좁고 둥근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래도 이 거대한 쇳덩어리가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사실은 볼 때마다 놀랍다. 과학 기술이 눈앞에 살아 숨 쉬며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것 같다.
‘그래도 떨어뜨리는 건 아주 쉽지만.’
거대한 기계를 하늘로 띄우는 건 아주 어렵지만, 그것을 부수어 망가뜨리기는 아주 쉽다. 진혁은 턱을 괴고서 구름을 관찰했다. 희고 보송보송한 날개구름은 잘 짠 비단 옷감처럼 하늘에 좌르륵 펼쳐져 있다.
쨍쨍하니 파랗기만 이 하늘에서는 지상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있는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태양에 아주 조금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며 더럽히는 저 육지에서 멀어졌기 때문인지 일월의 기운은 아주 농밀하다.
이제 막 신공에 입문한 자라면 운기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아예 하늘에 비행기를 띄워놓고 여기서 운기조식을 한다면 훨씬 더 빨리 경지에 이를지도 모르겠군.’
이미 그 경지를 넘은 진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압도적인 양의 진기가 있다고 해도 특정한 시점에서 ‘깨달음’이 없다면 경지를 넘어설 수 없다. 이미 십이성까지 경지를 이룬 무림인에게 십성의 한계를 돌파하도록 돕는 환단이 있어도 쓸모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창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교주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정말 필요 없는 정보다.
진혁은 자신에게 유용하지 않은 새로운 깨달음 따위는 잊어버리고 보드랍고 폭신폭신해 보이는 구름바다에 관심을 기울였다.
‘구름 모양은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한 번 누군가 만들어낸 적이 있었지. 지나치게 안이한 대처였지만….’
해가 지고 있다.
구름 너머 아스라이 비추던 금빛 그림자는 어느샌가 은빛으로 저물어가더니 끝내 사라졌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바다는 점차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며 뉘엿뉘엿 출렁였다. 보라색 하늘이 쪽빛을 머금고 점점 더 진해지고 하늘이 채 검어지기도 전에, 저쪽에서 달이 냉큼 튀어나왔다. 청명한 보름달이다.
‘아름답다.’
이전에 비행기를 타고 올 때는 해가 보이지 않는 청천(靑天)밖에 보지 못했다.
지상에서 몇 번이고 일몰과 일출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 이 구름바다 위, 하늘 속에서 보는 것보다 더 장엄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들었던 ‘하늘 시리즈’의 치즈 케이크들을 떠올렸다.
‘황혼과 일출, 그리고 한밤.’
하늘을 다루는 케이크는 더 이상 나올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론은 틀렸다.
‘하늘은 그대로 있지만 내가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 산 위에서 주시하는 하늘, 그리고 하늘 위에서 경험하는 이 천지의 변화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 즉 천지(天地)를 관통하는 위대한 섭리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일월신교에서 모시는 태양과 달, 다시 말해 일월(日月)이다. 지구는 태양의 뜻을 따르며 달은 지구를 따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수직적인 종속 관계가 아니다. 달의 영향을 받아 바다에는 조석간만의 차가 생긴다. 지구가 달을 끌어당기는 것만이 아니라 달 역시 지구를 끌어당긴다.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공통과학 시간에 배우는 단순한 지식이지만, 중원에서는 오직 일월신교의 교주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비전(?傳)이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의 누군가에게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이 과거의 누군가에게는 금기라고 여겨질 만큼 귀한 지식이다.
현대에 흔하기 그지없는 후추는 한때 같은 무게의 금과 동일한 가치였다.
하늘에서 보는 해와 땅에서 보는 해는 다르지만, 사실은 같다.
◈ ◈ ◈
비행기는 별다른 문제 없이 공항에 착륙했다.
낯익은 공항의 둥근 지붕을 보자 드디어 한국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난다. 비행기에서 내리며 진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공기부터 다르다.
한국의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진혁은 잠시 떠나 있었던 사이 확 달라진 날씨를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곧 통로를 걸어 수화물이 도착할 곳으로 향했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는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다른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진혁은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 가게 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아버지는 스마트폰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혁이 너는 어디로 간다고 했지? 소망시로 같이 갈 거냐?”
“…예. 진영이 형한테 말해 뒀어요.”
“그래, 그럼 나랑 같이 가자.”
“기차로 돌아갈 겁니까?”
“글쎄다.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아버지! 저기에 캐리어 있어요.”
진혁은 낯익은 보라색 캐리어를 집어 들었다. 대형 캐리어를 두 개, 거기에 면세점에서 산 쇼핑백까지 양손에 가득 들었다. 무거운 짐인데도 불구하고 캐리어와 쇼핑백을 가볍게 끌고 가는 진혁의 뒤를 임운정이 따라갔다.
“세관에 신고할 만한 건?”
“없습니다.”
입국장에서 진혁과 임운정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열렬한 성원을 보내는 인파였다.
[임진혁 쉐프, 쿠프 드 몽드 우승 축하! - 진바라기]
검은색 바탕에 금색 궁서체는 눈에 확 들어온다. 세 명의 사람이 있는 힘껏 펼치고 있는 거대한 플랜카드다. 바깥쪽 문이 열리며 그 플랜카드가 팔랑였다. 진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진혁이 형, 어서 와!”
그가 걸어 나오는 광경을 김도을이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고 있다. 심지어 삼각대까지 설치해 놓은 상태였다. 옆에서는 이재희가 뻣뻣하게 굳은 채로 서 있었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임진혁 쉐프님!”
진혁을 환영하는 이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임진혁의 수상을 축하합니다 - 햇살 노인정 일동]
우아한 은빛 정장을 차려입은 금천복이 플랜카드를 들고 섰는데, 그 곁에는 감호철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잘 맞지 않는 셔츠를 억지로 껴입은 홍 노인을 비롯해 햇살 노인정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감 어르신!”
“니 눈에는 감 씨만 보이냐? 나는 안 보이구?”
금천복이 핀잔을 주었다.
“감씨가 멀대같이 키가 크니까 멀리서도 잘 보여서 그렇지.”
“허! 홍 씨야말로 남의 남편 갖다 이러니저러니 말하지 말고요.”
금천복과 홍 노인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본 임운정이 피식피식 웃었다.
“진혁이를 축하하러 여기까지 와주신 겁니까? 감사합니다.”
“정말로 축하해요. 엄청난 대회라면서요.”
[소망시 산목아파트의 자랑 임진혁 쉐프] 플랜카드가 움직이며 말을 했다. 두 사람이 그 플랜카드를 함께 들고 있는데, 오른쪽 끝을 붙잡고 있던 소년이 워낙 키가 작아 플랜카드에 파묻혀 있어 마치 플랜카드가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혁은 이제 부쩍 키가 큰 소년을 알아보았다.
“환희니? 혼자 왔어?”
이제 중학생이 된 어린 소년이 생긋 웃었다.
“예! 엄마랑 같이 왔어요.”
산목아파트의 부녀회장과 그 아들인 환희였다. 화상을 입은 경험이 있어 불을 두려워했지만, 친구를 위해 그 공포를 극복해낸 용감한 소년이다.
“저 장래희망을 판사에서 제빵사로 바꿨어요. 형 같은 제빵사가 되려구요.”
“진혁이 같은 사람으로 자라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죠.”
부녀회장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진혁은 문득 기시감이 들어 두 모자를 바라보았다.
‘저희 아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세요! 교주님 같은 훌륭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일월신교의 교인들이 졸졸 쫓아와서 자주 하던 말이다. 이렇게 또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다.
‘법대에 가서 판사가 되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더니, 꿈이 제빵사로 바뀌었구나.’
진혁은 환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뒤늦게 인파를 헤치고 어머니가 나타났다. 장은효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남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는 이모들이 허리 아래로 무언가를 들고서 서 있었다.
“여보.”
“어머니. 이모님들.”
장은숙이 짤뚱한 두 손을 휘저으며 팔짝팔짝 뛰었다.
“진혁아! 아주 잘했어!”
“큰이모. 고마워요. 그런데 둘째 이모랑 셋째 이모는….”
장은영과 장은혜-둘째 이모와 셋째 이모가 든 현수막에 쓰인 글씨가 보였다.
[장씨 집안의 조카 임진혁 장하다 ? 회현 장 씨 일동]
임운정이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임씨 집안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데 장씨 집안은 플랜카드까지 만들어 왔구려.”
진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폈다. 밝고 환한 표정에는 기쁨이 가득 담겨 있다. 그저 자신이 이곳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먼 곳에서 여기까지 진혁을 환영하러 온 사람들이다.
마음 한구석이 저절로 따뜻해지며 몽글몽글해졌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자. 자리 막지 말고 돌아가자고.”
감호철이 소망시에서 온 사람들에게 말을 꺼냈다. 임운정이 아내와 처형들을 모시고 발걸음을 옮겼다. 진바라기에서 온 도을과 재희는 그 광경을 카메라로 찍었다.
“노인정에서 진혁이를 환영해 주려고 다 같이 차를 빌려서 오신 겁니까?”
“무슨 소리! 햇살 노인정 정기 서울 소풍하는 김에 여기까지 놀러 온 거지.”
“하하, 금 씨 어르신.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북적북적하는 인파 속에서 뒤늦게 진혁을 향해 달려드는 남자가 있었다.
“헤이즐넛 베이커리 매거진입니다! 임진혁 쉐프님, 인터뷰가 가능하십니까?”
“죄송합니다, 지금은 어렵습니다.”
진혁이 미소지으며 거절했다.
“저를 기다려주신 사람들이 있거든요.”
공항 건물을 나서자, 서미란과 임진희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공항 입구 쪽에서 대형 버스를 대기시키고서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진혁은 대형 버스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소망시의 자랑! 임진혁 쉐프!]
“이건 서미란 씨가 하신 건가요?”
“진혁 씨 같은 분이 계신다는 건 소망시에서 영광이랍니다.”
미란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멘트는 내가 골랐어!”
진희가 씩씩하게 말했다. 소망시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둘씩 관광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전부 진혁에게 있어 의미 있는 사람들이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은 버스에 타는 사람들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하지만 장은숙은 진혁을 껴안아 주었고, 그 이후부터는 사람들이 진혁을 안기 시작했다.
가장 마지막에 버스에 오른 것은 임운정이었다.
“우리 아들, 아버지하고도 포옹 한 번 할까?”
“…예.”
아버지의 품은 따뜻했다.
하지만 등을 토닥이며 아버지가 귓가에 속삭인 말은 그렇지 않았다.
“학교에도 플랜카드 걸릴 거다.”
진혁이 이마를 짚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지요?”
“세계 대회라고! 제과제빵의 올림픽에서 네가 우승을 하고 돌아온 거다. 당연히 축하할 일이지.”
앞 좌석에 앉은 장은숙이 소리쳤다.
“돼지도 한 마리 잡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