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10화 (310/656)

제 310화

진혁은 대충 아무거나 남은 걸 집었다. 그것은 허리까지 오는 검은색 앞치마였다. 홍대의 카페라면 누구나 사용하고 있을법한 지극히 평범한 물건이다.

“너무 흔한 디자인 아니야?”

“그러게.”

“이게 마음에 드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천대의 잠행복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무 무늬 없는 검은색 앞치마가 좋았다.

“골라도 이렇게 재미없는 걸 고르냐.”

무지개색으로 염색된 화려한 비닐 에이프런을 바라보던 마리오가 탄식했다. 루이스가 설명서를 보며 말했다.

“기능성 섬유를 사용해서 빨래하기도 용이하고 마르기도 쉽게 마른대. 진혁이가 잘 골랐네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가죽이 예쁘긴 하지만 매일 출퇴근하면서 일일이 손질하기는 쉽지 않지. 데님도 밀가루 묻은 건 털기 힘들 테고. 실용적인 걸로 잘 골랐구나.”

“여기 데님은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어서 가루가 잘 묻지 않는다는데, 데님은 별로야?”

마리오가 물었다.

“흠.”

진혁이 대답을 명확히 하지 않고 웃었다. 아직도 열어 보지 않은 쇼핑백이 여러 개 있었다. 그중 옷처럼 보이지 않는 상자를 보고서 아버지가 물었다.

“이것도 열어도 되냐?”

“네.”

아버지는 종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해리 & 호프만의 조리화였다. 슬리퍼처럼 생겨서 발뒤꿈치가 없는 샌들이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임운정이 외쳤다.

“이거, 샌들처럼 생겼는데 발가락이 있어야 하는 부분에 금속제 보호대도 제대로 있구나. 아주 편한데? 너한테 좋겠구나.”

그는 기뻐하며 신발을 진혁에게 내밀었다.

“답답하다면서 조리화를 신기 싫어하는 너한테 딱 맞는 신발이야.”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한여름 새벽에 나가던 날,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양말을 챙겼다.

조리화 내부에 있는 쇳조각에 맨발이 닿는 게 싫다고 불평하던 자신을 위한 배려였다.

지금도 아버지는 자신을 신경 써주고 있다.

‘지금은 신발을 통째로 강철로 만들어 신어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야.’

자신은 완전히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아버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돈이 생기고, 새로운 지위를 얻고, 말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곳에 와 있는데도 먼저 아들부터 챙기는 점이 똑같다.

돈과 지위가 생기면 사람은 변하게 마련인데도 말이다.

진혁은 몇 번이나 보아왔다.

청죽(靑竹)처럼 곧기만 하던 소년 문사가 벼슬자리에 올라 권력과 돈의 맛을 보고 나서 순식간에 탐관오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말이다.

드물게 그중 변치 않는 자들이 있긴 하다만 정말로 희귀하다.

‘아버지가 그때 당시에 선비였다면 대쪽같이 청청하게 구는 청백리였을 거야.’

그 사실이 자랑스럽고 기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다.

‘아버지. 그때 제가 신발 때문에 발이 아프다고 했던 건, 일부는 사실이지만 사실은 핑계였습니다. 일하기 싫고 새벽부터 나가는 것도 싫은데 그렇게는 말 못 하고 신발 이야기를 꺼낸 거지요. 그다음부터 꼬박꼬박 양말을 챙겨 주셔서 더 곤란했어요. 아버지는 모르셨지요?’

아버지가 챙겨준 양말을 신으면 더 불편했다.

꼭 맞는 조리화 속에 양말을 신으면 발이 더 끼어 땀이 송송 솟는다. 일이 끝나고 나면 땀에 젖은 발이 붓고 좁은 신발 안에서 끼어 아팠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버지가 챙겨주는 양말을 주머니에 뭉쳐놓고 모른 척했다.

그렇지만 눈치 없는 아버지는 양말이 얇아서 불편하냐며 두꺼운 겨울 양말을 사 왔다.

옛 추억을 삼키며 진혁이 서늘하게 웃었다.

“아버지, 그때는 항상 고마웠어요.”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양말 따위는 필요 없다고 아버지 얼굴에 집어 던졌다.

회귀 전의 일이다.

그리고 가게에서 나가며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를 밀치며 차에 치여서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내려다보며 아버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치다가 뒤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제대로 쓰지 못하는 한쪽 팔로 쿵, 쿵, 쿵 자기 가슴을 때렸다.

그때 사실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고맙다고.

핑계 대서 미안했다고 계속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기억 속에만 있을 뿐이며 아버지나 다른 가족들은 전혀 모른다.

몰라서 다행이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아버지가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진혁이 다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로.”

“뭘 새삼스럽게 고마워하냐.”

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카탈로그를 한 장씩 넘겼다.

“이거 봐라. 조리화는 당연히 장화 모양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세상이 넓긴 넓구나!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걸 또 배우고 말이야.”

“저도요. 배울 게 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배우는 게 많네요.”

“이것아, 넌 아직 핏덩이야.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러게요.”

진혁이 아버지와 함께 카탈로그를 넘겼다. 무공 비급을 연구하는 것처럼 신중하게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신발 사진들을 평가했다.

“이거 샌들도 한두 종류가 아니네. 다양한 종류가 있구나?”

“평범한 스니커즈 운동화처럼 생겼는데 징을 넣은 것도 있어요.”

“그런데 이거 촬영은? 너 이제 귀국해야 하잖아.”

“쉐프 복은 한국에서 촬영하기로 했지. 나이프는 모레, 귀국 전날에 파리에서 촬영하고.”

“그러고 보니 이건 카를로비바리 쉐프나이프잖아!”

“키야! 이거 내가 뜯어도 돼?!”

강 씨 형제들이 환성을 지르며 나이프 상자를 뜯었다. 작은 나이프의 칼날은 잘 닦여 있어 마리오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어냈다. 서늘한 날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며 그가 감탄했다.

“와, 너 이번에 진짜 제대로 브랜드로 휘감고 가는구나.”

“대단하다, 임진혁.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를 공개한 거야?”

루이스가 감탄하며 물었다.

“그것도 있고,

“이거 나랑 리뷰 방송 한 번 하자. 어때?”

“계약 조건이 허락하는 한에서 시간이 되면.”

진혁이 설렁설렁 넘겼다.

“계약 조건?”

“네 유튜브 리뷰 방송이 어떤 건지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해.”

“아, 그 정도는 문제없지! 그들도 좋아할 거야.”

진혁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네가 한국의 가게에 들어오게 되면서, 업무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난 일을 빨리 배우거든.”

“그래? 기대하지.”

진혁이 강마리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리오는 갑자기 척추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어, 열, 열심히 해볼게.”

◈          ◈          ◈

<해와 달>은 늦은 시간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진혁의 우승을 축하하며 플랜카드를 거는 것과 동시에 백진영은 이벤트를 시작했다. 가게 SNS에 임진혁의 우승을 축하하는 말을 남기면 바리스타 음료를 하나 더 만들어 주는 행사였다.

이벤트는 꽤 호응이 좋았다.

특이한 쿠키 컨셉과 엄청난 맛으로 유명하던 가게가 이제는 바리스타의 커피도 향이 좋고 맛이 깊다며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날 만들 음료를 위한 밑준비를 마친 백진영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일봉 쉐프님은 퇴근 안 해?”

“백진영 사장님! 저는 남아서 쿠키 반죽 만들어야 해요.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제가 문 잠그고 퇴근해도 될까요?”

“나야 상관없지만… , 새벽에 일찍 나와야 하잖아. 피곤하지 않겠어?”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까요.”

“그럼 나 먼저 간다.”

“예!”

며칠째 일하고 있지만 해도 해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

진혁이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소망 베이커리에서 올라온 유일봉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으으으으으.”

냉장고에 있는 쿠키 반죽 양을 보고서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진혁이가 자기 귀국할 때까지 쓰라고 넉넉하게 만들지 않았어? 테이블 회전율은 비슷한데.”

“백 사장님이 음료 이벤트 하시면서 한 테이블에서 먹는 쿠키 양이 늘어났어요.”

회전율은 같지만, 사람들이 음료를 마시며 전보다 더 쿠키나 디저트류를 많이 찾는다. 국제적인 제과제빵대회에서 우승한 임진혁이 직접 개발한 쿠키라고 하니 더 그렇다. 지금 이미 진혁이 넉넉하게 만들어두고 간 반죽은 다 떨어진 지 오래다.

“진혁이 녀석이 2주 자리를 비우면서 한 달 팔 분량은 다 만들어 놓았다고 하긴 했는데. 아하하하….”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일단 그만큼 많은 양의 반죽이 자리를 차지해버리면 냉장고에 케이크 놓을 자리도 없어지고요.”

처음에 서울에 파견 근무를 올라왔을 때는 마냥 신이 나 있기만 하던 유일봉이다. 이제 사흘 후면 임진혁이 돌아오는데, 아직까지 출퇴근 외에 다른 것을 해보지도 못했다.

‘서울에 올라오면 남산타워도 가보고, 경복궁도 가고, 이태원에도 가보려고 했는데.’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아드레아노 존부의 디저트 팰리스에도 가보고 싶었다. 서울에 취업한 친구를 만날 생각도 있었다. 본디 백진영은 진혁과 마찬가지로 주 2일의 쉬는 시간을 보장해 주었으니 그 시간에 쉴 계획이었다.

하지만 매출이 급격하게 늘면서 계획이 다 망해버렸다.

‘진혁이 형은 손이 너무 빨라!!’

진혁이 대회 준비를 하면서 혼자 하던 양의 밑준비를 하는 데만도 새벽에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것도 임진혁이 반죽을 미리 만들어놓고 해외로 갔으니 망정이지, 처음부터 혼자 하려고 했으면 벌써 중간에 디저트가 부족해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다.

“그럼 먼저 갈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조심히 돌아가세요.”

밤늦은 시간, 달이 하늘 중천에 떴다.

대학가의 화려한 원색 네온사인들도 점점이 꺼져갈 무렵까지 <해와 달>의 주방은 환했다.

“흐아아아아.”

결국, 세 시간을 들인 끝에야 내일의 준비를 완전히 마칠 수 있었다. 다음날 구워내기만 하면 되도록 충분한 양의 반죽을 숙성고에 넣어둔 유일봉이 기지개를 쭈욱 폈다.

“이제 집에 가서 자기만 하면….”

시계를 본 일봉이 미간을 찌푸렸다. 세 시간 후면 다시 나와서 출근해야 한다.

“흐어흐어허어.”

그가 흐리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를 흘렸다.

‘괜히 먼저 보냈나.’

다른 직원들이 도와주겠다고 남으려고 하는 걸 굳이 고집부려서 보냈다. 도움을 받았으면 한 시간 안에 마치고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싫었다.

‘형이 없는 동안 나도 소망 베이커리에서 계속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2주 정도 빈자리 정도는 내가 혼자서 메꿀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일봉이 실력을 기르는 동안 진혁은 놀고 있지 않았다.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라는 대회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살인 사건 현장 쿠키 시리즈’ 같은 걸 개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진혁이 없는 동안에 가능한 한 미리 도와주고 가려고 파견을 자청했다. 원래는 돌아오기 전에 일을 좀 덜 할 수 있도록 반죽도 넉넉히 만들어 둘 생각이었는데 현실은 상상과 너무나도 다르다.

‘오히려 진혁이 형이 넉넉하게 만들어놓은 반죽 덕분에 여태까지 간신히 버텼지.’

그는 조리모를 벗지도 않은 채 조리대 위에 뺨을 대고 신음을 흘렸다.

“눈 깜빡하면 집으로 바로 순간이동 되었으면 좋겠다….”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는 조리대에 뺨을 갖다 댄 채 거북이처럼 목만 쏘옥 빼서 냉장고 위 숙성고를 바라보았다.

“형이 빨리 와야 내가 저걸 줄 텐데 말이야.”

깜짝 파티에서 축하해 주려고 만들어 놓은 특별한 디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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