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09화 (309/656)

제 309화

“…그럴 때는 시야가 넓다고 하는 겁니다.”

진혁은 말을 돌렸다.

“하하! 역시 외국어는 오래 해도 어렵습니다.”

랑비에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는 진혁이 표현을 지적해 준 것에 대해서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프랑스 진출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마침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          ◈          ◈

진혁이 랑비에와의 미팅을 마지막으로 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는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임진혀억! 왜 이렇게 느읒게 와아!”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처럼 양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마리오를 슬쩍 피하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벌써 술 취했냐.”

폴폴 풍기는 술 냄새는 몇 미터 밖에서부터 느낄 수 있을 정도다.

“훗훗훗! 그래도 너 먹을 디저트는 따로 빼놓았어!”

마리오는 냉장고로 달려가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지인혁이가 나랑 같이 디이저트를 안 먹으러 간다면 내가아 디저트으를 갖고 오면 되지~♬”

괴상한 가락을 붙여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깨춤까지 춘다. 보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술버릇이 귀엽네.’

진혁이 자리에 앉자 마리오는 자기가 이 숙소 주인인양 차가운 물까지 가져다주었다.

“♪무울부터 마시고오~ 디저트를 먹어라~♬”

“….”

‘술 취한 놈은 상대할 필요가 없어.’

진혁은 마리오를 무시하고서 차분히 물을 마셨다. 강 씨 형제들과 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그 미팅들을 벌써 다 끝낸 게냐?”

“예.”

“양손에 든 것들은 다 뭔데?”

바게트를 뜯고 있던 루이스 역시 궁금해했다.

“미팅하는 데서 받았어? 쇼핑백이 한두 개가 아니네. 서류라고 보기에는 너무 부피가 크고.”

“이건 카를로비바리 사의 샘플 나이프. 해리 & 호프만의 조리복과 조리모, 그리고 에이프런.”

“해리 & 호프만?!”

마리오가 비명을 지르며 부엌에서 달려왔다. 방금 꺼낸 판나 코타 접시를 떨어드릴 뻔했으나 진혁이 잡아주었다.

“130년 된 맞춤 쉐프복 브랜드잖아!”

지금도 영국 왕실의 쉐프들에게 직접 납품한다고 하는 유서 깊은 쉐프복 전문 업체다.

“거기 옷 무시무시하게 비싸던데!”

일단 기성복이 아니라 개인별로 치수를 재서 한 벌 한 벌 제작한다는 점에서부터 가격이 올라간다. 거기에 기능성 의류에 사용하는 쿨맥스 원단의 경우는 돈을 더 받는다.

비즈니스 미팅을 한다고는 들었지만, 여기와 한다고는 듣지 못했던 마리오는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이 스컬캡 좀 봐! 진짜 부드럽네. 엄청 편하겠다.”

기능성 섬유로 만들어져 부드러우면서도 동그랗게 각이 져 있다.

“안에는 심을 넣었나?”

검은 스컬캡에는 은실로 브랜드 이름이 수 놓여 있었다.

“음, 심은 들어있고. 주문을 받으면 이 브랜드 이름 옆에 모자 주인의 이름 이니셜을 넣어준다고 하더라.”

“역시 해리 & 호프만인데!”

진혁의 경우 여태까지는 가게에서 위생상의 이유로 종이로 된 일회용 조리모를 써왔다.

“이번에 샘플을 색깔별로 받기는 했어. 하지만 쓸데없이 세탁물이 늘어나는 걸 생각하면 역시 모자는 일회용이 좋지 않나?”

진혁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리오는 모자를 이것저것 자기 머리에 대 보았다.

“나 이거 써 봐도 돼?!”

마리오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신나서 말했다. 고대하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소년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래. 써라, 써.”

같잖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춤을 추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데님 앞치마와 가죽 앞치마라….”

아버지는 다른 것을 뒤적거리며 신기해하셨다. 루이스 역시 끼어들어서 구경했다.

“이건 소가죽이고 이건 양가죽인가? 나는 검은색이 마음에 드는데.”

“가죽은 관리하는 게 힘들지만 오래 쓰면 그 나름의 문양이 생겨서 멋지잖아요.”

“허리에 두르는 에이프런도 좋지만 이렇게 X자 모양 끈으로 등 뒤에서 묶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아버지는 거울을 보며 에이프런을 둘러 보셨다. 그냥 셔츠 위에 둘렀는데도 앞치마를 두르자 일하는 남자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그게 마음에 드세요?”

어차피 뭘 입어도 똑같은 작업복일 뿐이다. 암행할 때 검은 옷을 입는 것은 깊은 밤 그늘 속에 숨어 몸이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주방에서 설 때 흰 조리복을 입는 것은 무언가 튀었을 때 잘 알 수 있게 하여 위생적으로 조리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갈색이나 브라운, 진청색 컬러의 앞치마는 쓸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호응이 좋았다.

자기가 직접 걸쳐 보았던 앞치마를 내리고서 아버지가 말했다.

“진혁이 너 이거 걸쳐 봐라.”

“…예?”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너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거로 골라 보자.”

“그래! 스컬캡도 써 봐!”

“아니, 그렇지 않아도….”

분명히 어머니와 진희의 옷가지 쇼핑 때에는 아무 관심 없던 아버지다. 하지만 지금 저 눈빛은 위험하다.

진혁이 뒷걸음치며 무어라 변명할 말을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대뜸 나서서 진혁의 팔목을 잡았다.

“어디, 여기 쉐프복하고 바지도 같이 있네.”

“칼라와 단추가 있는 상의하고, 그냥 티셔츠도 있어요. 티셔츠도 상의도 전부 기능성 섬유를 사용해서 땀을 잘 흡수하겠는데요. 이건 우리도 좀 사고 싶다.”

옷은 한두 벌이 아니었다.

단순한 라운드넥 티셔츠, 그리고 차이나칼라에 두 줄 단추를 단 쉐프 자켓.

“이것도 입어 봐라.”

결국, 여섯 벌의 에이프런을 이것저것 걸치며 거울 앞에서 걸어 다녀 봐야 했다.

아버지가 너무나 흥이 나 있어서 거절할 수 없었다.

“화이트 쉐프 자켓에 데님 에이프런도 괜찮네.”

진혁은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여기에 청바지를 입으면 페이스트리 키친 분위기 자체가 달라지겠다. 가게가 홍대에 있다고 했지? 아예 이런 식으로 가도 좋지 않아?”

루이스 역시 즐거워하며 말했다.

확실히 무엇을 입어도 잘 어울렸다. 티셔츠를 입으면 젊은 티셔츠 모델 같고, 쉐프복을 입으면 영화에 출연하는 쉐프 역을 맡은 배우처럼 느껴진다.

“우리 아들, 제빵사가 아니라 연예계에 나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아버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강 씨 형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모델인 마틴보다 백배는 더 잘 어울리네.”

“….”

이것저것 옷을 입어보느라 정신적으로 지친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양쪽 팔을 펴며 늘어졌다.

마리오가 라운드넥 블랙 티셔츠를 진혁의 목 아래에 갖다 대보며 감탄했다.

“요즘에는 기능성 티셔츠로 조리복을 대체하기도 한 대요. 와, 얘는 이것도 잘 어울리네.”

“그냥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만 입혀 놔도 괜찮은 애야. 하지만 아예 칼라를 세운 제대로 된 조리복도 잘 어울리니까 양쪽 다 포기할 수가 없네.”

아버지가 진지하게 말했다.

“진혁이는 골격이 좋으니까 뭘 입어도 멋있지. 하지만 라운드 화이트 셔츠하고 청바지, 데님 앞치마를 입으면 더 젊고 세련된 느낌이 나니까 난 이게 제일 좋다고 봐.”

루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최종 평가를 했다. 얼굴만 봐서는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의 심사를 하는 것처럼 신중해 보인다. 아버지가 유쾌하게 말했다.

“그래도 남자는 역시 레더지! 가죽으로 된 앞치마는 여기서 처음 보는데 진짜 괜찮다. 전원주택 마당에 비비큐용 그릴을 설치한 다음에 그 앞에 이거 입고 서 있으면 딱 맞겠는데.”

아버지는 아직 새것인 연갈색 가죽 앞치마를 손바닥으로 쓸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감촉이 아주 좋아. 좋은 가죽을 제대로 손질해서 일일이 손으로 바느질한 게 아주 명품이구만. 이거라면 이십 년은 너끈히 쓰겠다. 내 가게 주방이나 학교 실습실에서도 잘 어울릴 거야. 지금 내 앞치마가 낡아서 너덜너덜한데….”

진혁이 킥킥 웃었다.

“아버지, 그거 가져가세요. 비비큐 그릴 딸린 전원주택은 다음에 같이 보러 가고요.”

“하하하! 무슨 소리냐. 당연히 농담이지.”

‘소망시 바깥쪽에 요즘 펜션 분양을 많이 하던데.’

진혁은 머릿속으로 가족들이 휴가를 갈 수 있는 전원주택에 무엇이 필요한지 떠올려 보았다. 소망시 주변의 부동산 가격은 잘 모르지만, 민병철에게 물어본다면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줄 것이다.

“이거 네가 샘플로 받은 건데 정말로 내가 써도 되겠냐?”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아버지에게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한 번에 한 벌밖에 못 걸쳐요. 가게에서 일하면서 앞치마 패션쇼를 할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저한테 남은 건 가져도 된다고 했으니까 누굴 주건 제 마음이죠.”

마리오가 궁금해했다.

“해리 & 호프만이랑 정확히 뭘 하기로 했길래 샘플을 줘? 모델 하기로 했어?”

“비슷해.”

“쉐프복 모델? 올해?”

“3년간 스폰. 쉐프복과 모자, 신발 일체.”

“히야아! 잘됐다!”

마리오가 손뼉을 치며 방방 뛰었다. 진혁이 씩 웃었다.

“나만 받는 건 아니야. 내 가게의 점원들도 전부 받기로 했어. 그러니까 마리오 너도 같은 걸 입게 되는 거지.”

“앗! 데님이 멋있는데! 진혁아, 지금이라도 데님으로 입자.”

루이스는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 그는 지인이 이전에 해리 & 호프만과 계약한 조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조금 더 놀랐다.

‘아무리 루키라고 해도 보통 1년 계약으로 쉐프 본인만 계약하는 경우가 보통인데? 직원 전부에다가 쉐프복 일체를 지원한다니. 진혁이 도대체 무슨 조건을 내건 거지?’

루이스는 궁금해하며 무어라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다.

그 순간 진혁이 마리오에게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이미 결정은 끝났다고.”

“에이! 데님이 좋은데!”

진혁은 마리오가 아쉬워하며 데님 앞치마를 걸쳐 보는 것을 보았다.

“대신 그 데님 앞치마는 너 줄 테니까 네가 입어.”

마리오가 희색이 만연해 외쳤다.

“고마워! 혹시 이 데님 모자도 같이?”

진혁이 피식 웃으며 아까 마리오가 눈여겨보던 하얀 캡을 던져주었다.

“옛다, 가져라.”

“앗싸!”

아버지가 물었다.

“아니, 이건 네가 샘플로 받은 거잖아. 그걸 그렇게 줘도 되는 거냐?”

“괜찮아요. 어차피 에이프런은 뭘 써도 별로 상관없고요.”

“하긴, 진혁이 너는 어떤 앞치마를 입어도 별로 옷이 더러워지지 않더라.”

진혁은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자그마한 밀가루 입자 하나도 앞치마에 닿기 전에 적당히 튕겨내기 때문에 더러워지려야 더러워지지를 않는다. 진혁의 가게는 앞치마를 개인이 세탁하도록 맡겼는데, 그는 호신강기를 앞치마와 쉐프복까지 확장해서 항상 옷이 더러워지지 않게끔 했다.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신경 쓰고 있으니까요.”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느냐고.”

“움직이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면 됩니다.”

“그렇다고 옷이 안 더러워진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말이지.”

강 씨 형제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궁금해했다.

“그래서 너는 최종적으로 뭘 선택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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