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08화 (308/656)

제 308화

진혁은 냅킨을 집어 손을 닦았다. 서늘한 눈빛으로 그가 눈앞의 두 사람을 응시했다.

부사장은 초조한 마음에 발로 바닥을 톡, 톡 두드렸다.

‘이런 게 어딜 봐서 풋내기냐고. 수십 년은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사람 같은데.’

분명히 20대 초중반에 경력이 부족한 애송이라고 들었다. 동양인이지만 키가 크고 모델처럼 프로포션이 좋다. 제과제빵계에서 혜성처럼 솟아오른 신인이었다.

페이스트리 쉐프들 사이에서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존재하는 신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있는 장인들 아래에서 길러지고 다듬어져 세상에 나오는 제자 쉐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승이 은퇴하기 전에는 더 유명해지기 어렵다. 스승의 이름을 이어받기 위해 경쟁하다가 단 한 명, 선택받은 수제자만이 그 이름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이름에 스승의 이름을 더해 유명을 떨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남자는 이레귤러다. 임진혁은 전통을 중시하는 세계에서 자신의 가장 귀한 속내-레시피를 아낌없이 내보였다. 그리고 그 실력을 최연소 쿠프 드 몽드의 우승으로 재차 증명했다.

거기에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멋진 외모까지 더해져, 마침 쉐프 나이프의 모델을 구하고 있던 회사들이 전부 달라붙은 것이다.

‘대장장이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다듬은 명품 칼 사이에서, 누군가 방금 잘라내 다듬은 죽창이 훨씬 더 강하고 아름다운 것과도 비슷할까.’

다이아몬드는 누가 보아도 다이아몬드인 법이다.

카를로비바리의 부사장, 카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우리 회사 쉐프 나이프의 품질에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의 계약은 독점 계약이어야 합니다. 어스나 펠로톤과 함께 계약할 수는 없죠.』

조금 전까지 통역사를 통해 이야기하던 진혁이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계약 조건에 대한 조정을 해주신다면 고려해 보지요.』

조정을 한다고 해도 바로 계약한다, 가 아니고 고려해 본다는 것이다.

‘영어를 하는데 일부러 통역의 도움을 빌리고 있었던 건가? 정보를 계속 얻으려고? 사회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 애송이라며.’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이 오간다.

부사장은 자신의 선에서 내놓을 수 있는 조건들을 머릿속에서 팔랑팔랑 넘겼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진혁이 서늘하게 미소지었다.

◈          ◈          ◈

진혁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의뢰를 하는 곳은 쉐프 나이프를 제작하는 회사들만이 아니었다. 최상급 조리복 회사와 주방 도구 회사들이 줄줄이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그중에서 진혁이 실제로 만난 것은 몇 되지 않았다.

카를로비바리 쉐프스 나이프 컴퍼니와의 미팅을 마치고 랑비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파리 13구 주거 지역에 있는 사무실은 임운정의 숙소에서 고작 850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아버지에게 갈 수 있어야지.’

외지인이라 멀리 나가기 어렵다며 이 근처로 미팅 장소를 잡았으면 좋겠다고 주장해, 일부러 이쪽에서 미팅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랑비에와의 미팅을 마치면 오늘의 모든 미팅이 끝난다.

“그동안 5개의 과일 맛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를 추가로 개발하셨다고요?”

“틈틈이 했습니다.”

“아니, 그럴 시간이 없으셨을 텐데!”

“납작 복숭아가 맛있더라고요. 녹색 멜론과 노란 멜론, 줄무늬 멜론도 괜찮았고.”

프랑스에서 처음 본 과일들을 언급하며 진혁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납작 복숭아는 이곳에서 처음 본 과일이었다.

‘복숭아를 꾹 눌러 놓은 것처럼 생겼어서 즐거웠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는 권력의 끝에 도달해 본 인간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고는 해도 수백의 인간을 손끝으로 부리던 그는 당시 하층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온갖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맛보았더랬다.

당시에 일반인들은 손도 못 댈 서역에서 온 흑차(黑茶, 커피)부터 귀한 소금이나 설탕을 아낌없이 사용한 각종 당과류는 물론이고, 색색의 사과부터 복숭아까지 과일 역시 맛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복숭아를 눌러놓은 것처럼 생긴 과일은 본 적이 없었다.

‘이 나이에도 이렇게 새로운 것을 보는구나.’

그래서 그 과일들을 남기고 싶었다.

마침 오렌지 초콜릿과 비슷한 컨셉이라고 생각했기에, 몇 개 더 만들었을 뿐이다.

“이, 이걸 맛봐도 될까요.”

긴장한 랑비에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뻗었다.

“예. 레시피를 읽기만 해도 맛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진혁은 태연하게 샘플 초콜릿을 내밀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따로 만들어 굳혀 둔 초콜릿이다. 특별히 색깔을 입히지는 않았기에 초콜릿 본연의 색깔인 짙은 갈색이다.

“여기 이게 납작 복숭아 맛이에요.”

“…!!”

랑비에는 초콜릿을 입에 넣기도 전에 먼저 코로 향기를 맛보았다.

처음에 서래마을에서 만나 바게트를 먹었을 때와는 또 다른, 새로운 감동이 파도처럼 그에게 몰려왔다.

“하아.”

찐득하게 손에 달라붙어야 할 초콜릿은 입안에서 산뜻하고 가볍게, 과육처럼 사르륵 녹아내렸다. 혀 위를 감로수처럼 촉촉하게 적시는 산뜻한 맛은 과일 주스처럼 상큼하다. 봄바람처럼 서늘하기까지 한 그 유쾌함에 그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웃음을 터트려 버릴 뻔했다.

“하하하하!”

“어떻습니까.”

이것은 모델링 초콜릿으로 남을 필요가 없다. 그냥 초콜릿으로 만들어 팔아도 충분히 남는 장사다.

몇 가지의 계산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지나갔다.

하지만 방금 맛본 초콜릿처럼 달콤하기만 하던 그 계산은 눈앞에 앉아 있는 청년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사그라졌다.

동요 없는 고요한 시선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

“저희와 마저 계약해주신다니 큰 영광입니다.”

랑비에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 정 여사님 소개로 서래마을 페스티벌에서 뵈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되실 분이라고요.”

“과찬이십니다.”

“이번에야말로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에 우승하시면서 다들 임진혁 쉐프의 진가를 알게 되었지요. 저 혼자만 알고 있던 보석을 다 같이 알게 된 것 같아 아쉽기도 합니다만, 이제야말로 그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마땅한 자리에 오르셨으니까요.”

‘꼭 광안마 같은 소리를 하는데…?’

진혁은 딱히 나이 많은 중년 남성에게서 부하 직원이 상사에게 하는 찬사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에 화제를 전환했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 모양인데요. 본론을 이야기하시지요.”

“임진혁 쉐프. 이 초콜릿을 직접 가게에서 판매하시는 게 아니라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로 저희에게 넘기시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화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렌지 모델링 초콜릿이 한 번 화제가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 대회 우승에 힘입어 한 차례 더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진혁이 씩 웃었다.

“사업을 국제적으로 확장할 생각이 있거든요.”

“예에에에에?!”

랑비에는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을 떨어뜨릴 뻔했다. 임진혁은 오늘 오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리암 에이든이라는 기자를 떠올렸다.

“알고 있는 기자님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리암이 진작에 조언을 주었기 때문에 잘 모르는 바닥에 대한 정보를 미리 수집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협상 조건을 더 좋게 바꿀 수 있었다.

‘쉐프 나이프만이 아니라 조리복과 조리화까지. 적절한 곳을 선정해주셔서 도움이 됐지. 표지 모델을 거절하는 것도.’

잡지사의 모델 제안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보가 될 텐데 하는 것도 좋지 않아?!’라고 조언한 임진희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그는 리암 에이든과 했던 대화를 잠시 떠올렸다. 몇 시간 전 리암은 당당하게 말했다.

“임진혁 쉐프님은 이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한 차례 출연하셨고, 공신력 있는 대회에서 제일 어린 나이로 우승했습니다. 어쭙잖은 잡지 따위와 인터뷰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아시다시피 페이스트리 쉐프에게 필요한 ‘유명세’는 얼굴이 아닙니다.”

“뭐, 음.”

그때 진혁은 잠시 예전 생각을 했다.

옥면검객이니 뭐니 잘생겼다며 인기를 얻어도 무공 대결에서 져버리면 끝장이다. 본신의 내공과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무림에서 어설프게 이름을 날린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목을 쳐달라고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제 나도 여기에 그럭저럭 제대로 적응해가고 있군.’

아마도 이 남자는 지금부터 ‘외모가 아니라 실력이 중요하다’라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진혁이 전생에서 뼈저리게 겪었던 현실의 벽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랑비에의 이야기는 진혁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바게티아 같이 별 것 아닌 잡지하고 임진혁 쉐프가 인터뷰를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예에?”

“ 하지만 임진혁 쉐프의 뛰어난 실력보다 조각 같은 미모에 중점을 두려고 하는 허접한 삼류 잡지사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외모가 뛰어나다는 엄청난 장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요.”

“…아니, 저기….”

“이미 진혁 쉐프가 레시피를 공개해서 화제가 된 지금 시점에서는! 외모에 중점을 둔 잡지 표지 따위보다 외모를 곁들여 제대로 된 소개를 하는 인터뷰 쪽이 더 도움이 됩니다. 당장 바게티아나 프랑스 브레드 같은 삼류 잡지의 기자와 사진 중심으로 찍는 화보 따위를 했다가는 처음부터 임 쉐프의 이미지가 망가져 버린단 말입니다. 이미 뉴욕 해럴드는 임진혁 쉐프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잡아두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세상과 자신의 꿈을 나눌 줄 아는, 혜성 같은 신인입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인상 깊었다.

분명히 자신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덕분에 이혼을 면했다며 이글이글 눈빛을 불태웠다.

‘쿠키를 한 번 줬을 뿐인데 도대체 무슨 은혜를 갚겠다는 건지.’

마침 갖고 있던 모델링 초콜릿 샘플을 줬더니 숫제 울면서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초콜릿을 왜 뉴욕에서 팔지 않느냐며 슬퍼하더니, 몇몇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결국은 미국으로 오라는 제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나 어머니, 진희를 두고 가는 게 걱정된다면 데리고 가면 되니까.’

전에는 당연히 아버지가 아버지의 가게를 지키는 것이 제일 행복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에서 다양한 문물을 경험한 아버지는 그만큼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한 걸음 더 성장했다.

그렇다면 그 기회를 다른 가족들에게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외 진출을 하신다면 프랑스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한국계 베이커리 프랜차이즈가 프랑스에 진출한 선례는 없다. 놀라운 발언을 하는 진혁을 보면서 랑비에가 흥분해 말했다.

“역시 임진혁 쉐프님은 시야를 보는 눈 자체가 다르시군요!”

진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충성심으로 따르는 중년 남자는 예전 부하들로 충분하다.

‘왜 이렇게 칭찬을 늘어놓지. 설마 갑자기 여기서 부하가 되고 싶다며 무릎을 꿇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당장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는 랑비에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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