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07화 (307/656)

제 307화

갈등하는 진혁에게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아, 10유로 있니?”

“여기 있어요.”

그는 양팔에 빵 봉투를 안은 채 카페 트럭 앞으로 걸어갔다.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주자 그 돈을 받은 아버지가 카페 트럭 주인장에게 건넸다.

백발 단발을 한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에 쪼글쪼글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뽑아낸 커피에 능숙하게 우유를 넣고 휘젓는다.

진혁이 소매치기 패거리 두 사람의 발목을 흙 속에 파묻기 적당한 시간이었다.

『끄어어억?!』

‘아버지에게 좋지 않은 마음을 품었으니 이 정도면 적당하겠어.’

흑도의 깡패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한두 명만 손봐줘도 서로 알아서들 정보를 교환하고 다시 쳐들어오지 않게 마련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었다. 점점이 흩어진 수준 낮은 점조직들이 제멋대로 먹이를 찾아 헤매는 것에 가깝다. 제대로 된 우두머리가 있는 집단이라면 그 대장에게 교훈을 새겨주는 것으로 충분한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한도 끝도 없다.

“자, 너부터 마셔라.”

따뜻한 플랫화이트 한 잔과 카라멜 마키아토 한 잔이었다. 얇은 플라스틱 컵에 담긴 마키아토에는 우유 거품과 연갈색 커피, 그리고 다시 하얀 우유 층이 선명하게 보였다.

커피를 마시던 아버지가 신기해하며 말했다.

“이것 봐라. 커피 층이 계속 다시 생겨.”

“그렇네요.”

진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뒤쪽에서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아악!』

중국인 부부에게 작업을 하려다가 느닷없이 내려앉은 바닥에 목까지 파묻힌 소매치기의 비명이었다.

다른 패거리 역시 허리까지 묻혀서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었다.

‘앗, 저놈은 조금 덜 판 쪽에 묻혔네.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갔기 때문인가.’

진혁이 한가롭게 구경하고 있는 데에 반해 아버지는 크게 놀랐다.

“아이쿠! 저게 무슨 일이야!”

임운정은 커피잔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의 커피잔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가볍게 받아든 진혁이 말했다.

“요즘 싱크홀이 많다던데, 파리에도 있나 봐요. 이 공원은 위험해 보이니까 우리도 자리를 피하죠.”

“그, 그래.”

진혁은 아버지의 행동 패턴을 파악했다.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며 쓰러지면 바로 다가가 심폐 소생술을 하려고 한다. 특히 학생 정도로 보이는 나잇대일 경우에는 더 적극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성인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이가 쓰러지고,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러 갈 때는 굳이 나서지 않는다.

‘좋아.’

진혁이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하지 못할 일은 아예 손대지 않는다.

진혁은 아버지가 적당하게 선을 지켜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이제 숙소로 돌아가자. 빵도 먹어보고.”

“예.”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진혁은 아예 문제가 생길 만한 인간 군상들은 아버지 근처에 접근하지 않도록 미리 차단했다.

예비 소매치기일지도 모르는 대학생들부터 몸에 나이프 같은 금속제 물건을 지니고 있는 성인들에게 살기를 뿜어 아예 다른 방향으로 보내버렸다.

『이상하게 오싹오싹하네.』

『이 길 말고 저쪽으로 가자.』

행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이쪽 길이 원래 사람이 많았는데 오늘따라 한산하네?”

아버지가 궁금해했다.

“평일 오후라서 그런가 봐요.”

진혁은 아무런 기색도 내비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마리오가 그 앞에 서성이다가 두 사람을 보고 반색했다.

“어디 갔어! 전화도 안 받고!”

“공원에.”

“빵은 뭐 그렇게 또 많이 샀어!”

“맛있어 보여서.”

“진혁이가 참고용으로 좀 산다고 하길래….”

아버지가 머쓱해 하자 마리오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소리 지를 거 다 지르고 난 다음에 갑자기 예의 바른 척해도 이미 늦었다, 이놈아.’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너그러운 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연락을 하고 오지! 많이 기다렸나? 우리 진혁이랑 같이 팀 해서 대회까지 나가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또 기다려서 어떡하나.”

“예에에. 진혁이가 문자에 대답도 없고, 전화도 안 받더라구요.”

‘아버지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을 모르고 눈치 없이 찾아와서 기다린 미래의 부하직원을 보며 진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여는데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 둘, 이제 또 서울 가게에서 같이 일한다며?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한다.”

“물론이죠! 저한테만 맡겨 주세요.”

“…아니, 아버지. 누구에게 누구를 부탁하는 거예요?”

“친구하고 같이 일하면 다투기도 많이 하지만 그만큼 즐거울 거야. 실력도 빨리 늘고 말이지. 나도 전에 철우나 다른 애들하고 같이 일할 때, 그때가 제일 실력이 부쩍부쩍 늘었다.”

“제가 진혁이한테 거의 배우고 있는데요, 뭘. 물론 진혁이도 저한테 배우는 게 아예 없지는 않지만요! 하하하!”

마리오가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같이 가려고 빵집이랑 맛집 리스트를 이것저것 알아 왔는데, 벌써 빵을 이렇게나 많이 사 오셨으니까 숙소로 같이 돌아가요.”

‘너도?!’

“그래, 그렇지 않아도 많았는데 너도 좀 같이 먹자. 네 형은?”

‘루이스까지!!’

진혁이 입을 뻐끔거리는 동안 마리오가 웃으며 말했다.

“형은 금방 돌아올 거예요. 두 분이 꼭 드셔봤으면 좋겠다면서 디저트를 사러 갔거든요.”

“잘됐네! 그럼 내가 방으로 초대하지. 마침 응접실도 있고.”

“감사합니다!”

진혁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이미 신난 마리오는 아버지보다도 먼저 숙소의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진혁을 바라보았다.

“내가 네 의향을 묻지 않고 손님을 초대해버렸네. 어제 뒤풀이가 괜히 나 때문에 엉망이 된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긴 했는데. 괜찮으냐?”

아버지는 진혁이 약간 꺼리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미안해하고 계셨다. 진혁이 대답했다.

“…예에, 뭐어. 괜찮습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라 하나를 부수는 것도 아니고, 살인 청부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와 함께 빵을 먹고 싶다는 작은 소원이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차피 계약서도 다 썼으니까요. 이제 같은 주방에서 동고동락할 처지인데 미리 이야기할 것을 더 해두면 좋죠.”

“네가 제대하고 친구도 없이 일만 했잖니. 사람도 안 만나고.”

“하하하.”

고등학교 동창회나 군대 동기들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별히 대답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십년지기 친구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오히려 몇십 년간 함께 일월신교를 지킨 광안마나 혈도객 같은 녀석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처음엔 아버지 얼굴도 헷갈렸으니까 말이지.’

“라이벌이자 친구인 녀석을 직원으로 데려오다니, 우리 진혁이가 인복은 있어.”

진혁이 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애들하고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저는 오후 미팅을 다녀올게요.”

“애들? 누가 애들이냐?”

“아니, 강 씨 형제 두 사람이요.”

진혁은 말실수를 수정했다.

“그래, 루이스는 너보다 연상이잖냐.”

“네, 네.”

◈          ◈          ◈

루이스가 사 온 디저트는 플랑(Flan)과 초콜릿 무스였다.

“이 플랑은 아주 촉촉하구나! 젤리처럼 탱탱하면서도 보송보송한 감촉이 최고야.”

임운정은 혀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폭신한 커스터드 크림의 맛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플랑은 달콤하고 푹신푹신한 커스터드 크림 디저트로, 원래는 스페인의 디저트였으나 현재는 변형되어 세계 각국으로 널리 퍼졌다. 프랑스에서도 사람들이 널리 즐기고 있으나 아직 한국에서는 그리 흔치 않다.

마리오가 조잘거렸다.

“이 가게 주인은 레시피도 공개했는데 그대로 만들어도 그 맛이 안 나요.”

“공개하지 않은 자기만의 비결이 있겠지.”

“아주 단순한 레시피거든요. 우유에 설탕을 넣고 끓이다가 식히고, 달걀을 풀고 바닐라 추출물 넣고, 캐러멜 바른 틀에 두 가지 재료를 섞은 다음에 오븐에 굽기만 하면 끝이에요. 그런데 내가 하면 조금 다르게 나온다고 해야 하나.”

“우유에 설탕을 젓는 속도부터 캐러멜을 얼마 정도 바르는지까지, 달라질 수 있는 포인트는 한도 끝도 없이 많으니까.”

“그거야 그렇지. 재료도 다를 거고.”

“진혁이라면 이걸 똑같이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겠지.”

임운정이 수긍하고, 루이스가 중얼거렸다.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게 무섭다.”

“그러고 보니 진혁이는 무슨 미팅 갔어요?”

마리오의 철없는 질문에 임운정이 씩 웃었다.

“그건 직접 듣게나.”

루이스가 플랑을 한 조각 집으며 말했다.

“프랑스 쪽 사람들이면 같이 가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혼자 가서 걱정입니다.”

벌써 플랑 한 판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 탱글탱글한 플랑 조각을 하나 더 집으며 임운정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 녀석을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서 본 적이 있나?”

“아니요.”

“볼 일이 없는 게 좋을 거야. 위엄이 넘치는데 꼭 다른 사람 같거든. 나도 아주 깜짝 놀랐어.”

“그 정도예요?”

“어디서 그런 걸 배웠냐니까, 군대에 있을 때 잠깐 예비군 훈련 조교를 도왔던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 요즘 군대에서는 정말로 별걸 다 배우는 것 같아.”

“그래요? 우리는 그런 걸 한 적이 없는데.”

마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대마다 다르다고 하더라고.”

“그런가보다.”

“이 초콜릿 무스도 드셔보시겠어요?”

“물론.”

세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디저트와 빵을 맛보는 시간을 가졌다.

◈          ◈          ◈

카를로비바리 쉐프스 나이프 컴퍼니.

임진혁은 현재 세계 3대 쉐프 나이프 회사 중의 하나로 불리는 그 회사 내부 사무실에 있었다.

모델링 초콜릿 건으로 인해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그 후에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에서 우승을 하면서 받은 모델 제의였다.

한국인 통역사가 부사장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모델 이미지 촬영 건은 별도입니다. 당연히 평소 사용하시는 식도(食刀)는 모두 카를로비바리 제품으로 바꿔주셔야 하고요.”

“저희는 공용 주방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이프는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니고 제 직원들 모두에게 카를로비바리의 쉐프 나이프를 지원해 주시는 겁니까?”

“공용 제품을 지원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새겨드린 개인 제품은 따로 지원해 드릴 테니, 이건 대회 참가 등 개인적인 일정이 있으실 때도 반드시 사용해주셔야 합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겠군요.”

“그럼 우리 모델이 되는 것을 수락하시는 겁니까?”

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먼저 샘플을 받아서 사용해보고 싶습니다만.”

“예?”

“사실 어스 사와 펠로튼 사에서도 같은 제안을 받았습니다.”

다른 두 개의 쉐프 나이프 회사의 이름을 들은 부사장이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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