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06화 (306/656)

제 306화

“무슨 소리야. 네 아버지가 너보다 나이를 덜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진혁이 웃으며 아버지를 부축했다.

‘나는 내가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아버렸지만 말이지.’

“그럼 이제 들어가자. 아버지를 숙소에 모셔다드리고 들어가야겠어.”

늦은 시간 펍 밖의 거리에는 가로등이 점점이 불빛을 드리워져 있다.

펍에서부터 아버지의 숙소까지 가는 동안에 진혁은 단 한 걸음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마침내 숙소 앞에 도착하자, 진혁은 어렵지 않게 아버지를 지탱해가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자신과 키가 비슷한 성인 남자를 가볍게 끌고 가는 그 모습을 보며 마리오가 말했다.

“전에 휘핑기 없이 혼자 휘핑할 때부터 느꼈지만, 쟤는 무슨 힘이 황소 같아.”

“네 친구를 황소에 비교하면 안 되지.”

“칭찬인데?”

“그래도 안 돼.”

강 씨 형제의 이야깃소리를 뒤로 하고, 진혁은 아버지의 방에 도착했다. 침대에 눕도록 도울 무렵에는 이미 아버지가 반쯤 코를 골고 계셨다.

“내일 봐요, 아버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옷까지 갈아입히고 나서 진혁은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몸을 한쪽으로 돌리며 베개를 껴안듯이 안고서 아버지가 잠꼬대했다.

“진혁아…, 아주 잘했다. 너는 내 자랑이야….”

진혁은 아버지의 가슴께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          ◈          ◈

다음 날 아침, 진혁은 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한가롭게 거리를 거닐었다.

“덥구나.”

아버지는 수학여행 온 중학생처럼 신이 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벌써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있나 봐요. 다음 주에는 더 더워진대요.”

빼곡하게 모여있는 오래된 건물들, 고풍스러운 유럽 양식의 빌딩들, 그리고 프랑스어로 씌어 있는 표지판들.

한쪽 구석에 검은색 개 두 마리 곁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어린아이만 한 커다란 개 두 마리 모두 목줄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목줄의 끄트머리를 쥔 채였다. 개 두 마리는 모두 멀끔했지만 남자는 온통 더러워지고 얼룩진 옷에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애써 그쪽을 외면하며 다른 곳을 보았다. 노숙자를 직접 바라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참 멀어진 후에는 궁금했는지 입을 열었다.

“노숙자와 개가 같이 있는데….”

“개와 함께 있는 경우에 더 구걸을 하기가 쉽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어째서 그렇다더냐?”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혁이 마리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달해 주었다.

“집을 잃어버릴 정도로 어려움에 부닥쳤는데도 개는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 좋게 보인다던데요.”

“허, 참. 우리하고 다른 점이 많구만.”

15분 정도를 걸었을 뿐이지만 벌써 세 군데의 빵집을 지나쳤다. 알록달록한 마카롱이 색색이 줄지어 있는 마카롱 가게, 크림과 우유, 치즈로 만든 디저트를 파는 곳, 그리고 직접 구운 바게트와 호밀빵 등 식사용 빵을 파는 빵집이다.

“이 나라는 진짜 빵집이 많네.”

“한국의 백반집이나 반찬가게 같은 느낌이 아닐까요?”

“그런가 보다.”

아버지는 한 군데 앞에 멈춰 서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빵 냄새가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들어가 볼까? 몇 개 사서 먹어 보자.”

“그래요.”

가게 안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하지만 다종다양한 빵들로 꽉 차 있었다. 당장 바게트만 해도 서른 종류가 넘었다. 크고 작은 갈색과 연노란색 빵, 크루아상과 뺑 오 쇼콜라, 프레첼과 식빵들이 보였다. 그밖에도 이름을 모르는 빵이 수없이 쌓여 있었다.

아버지가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빵들이 다 맛있어 보이는데, 어떡하지? 어떤 것부터 골라야 할까?”

“다 하나씩 먹어보죠.”

진혁은 바구니를 들었다. 하얀 종이를 바구니 안에 깔고서, 집게로 빵을 하나씩 집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간단한 기준으로 빵을 골랐다.

‘아버지의 시선이 닿았던 빵 중에서 제일 신선한 것.’

올망졸망 쌓여 있는 똑같은 빵들 중에서도 유난히 잘 구워진 것들이 있다. 특별히 생기가 폴폴 뿜어져 나오는 빵들 중 아버지가 관심 있게 보았던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올려놓자 곧 바구니는 꽉 찼다.

진혁이 물었다.

“바게트도 하나 살까요?”

“아니, 너무 많지 않아?”

“어차피 먹어보고 연구할 재료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오늘 아침, 점심 정도가 아니라 며칠을 먹어야겠는데.”

“바게트 같은 경우는 작게 잘라서 팔기도 한다고 하니까요.”

식사용 빵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던 아버지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음, 괜히 많이 사서 버리면 어떡하냐. 만든 사람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저도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잖아요? 우리 빵 가짓수가 좀 더 늘어나도 좋을 것 같으니까요. 식사 빵은 최대한 많은 종류를 먹어보는 게 연구개발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이렇게 다시 파리까지 오기도 어려울 거고요.”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니 또 그게 맞는 것 같구나.”

계산대로 다가가는 임진혁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강 쉐프?』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다시 불렀다.

『한국 팀의 쉐프 아닙니까?』

『예?』

『어제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에서 우승한 한국 팀 쉐프요!』

조리모를 쓴 흑인 쉐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주 대단했지. 프랑스 쉐프들보다 더 정통 프랑스 빵 맛을 제대로 재현했다고 그 시몬 리옹 쉐프에게 칭찬받고 말이야.』

진혁은 짧게 대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강씨가 아닌데요.』

『우리 빵집의 헤드 쉐프님도 만만치 않단 말이지! 12년 전에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에 출전해서 우승하셨던 적이 있잖아. 그걸 알고 여기에 빵을 사러 온 거지! 역시 주도면밀하고 대단해! 그렇게 노력하니까 우리보다 더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빵집의 페이스트리 쉐프가 나와서 들뜬 표정으로 빠르게 외국어를 하자, 아버지가 진혁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하는 거냐?”

『….』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진혁은 두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계산해 주세요.』

『하하하하! 계산은 무슨! 우승팀의 쉐프님이 우리 빵을 먹으러 온다니 아주 영광이지. 자, 이것과 이것도 가져가게.』

그는 새로운 종이봉투를 꺼내더니, 진혁이 고르지 않은 빵들까지 가득 담아주었다.

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원플러스원 행사라도 한다더냐?”

“…비슷해요.”

『자, 그럼 강 쉐프! 맛있게 먹으라고. 혹시 괜찮으면 먹고 나서 감상을 들려줘도 좋고!』

『아니, 계산을 부탁드립니다.』

『괜찮아, 괜찮아!』

진혁은 돈을 내려고 했으나 흑인 쉐프는 입을 벌려 크게 웃으며 강하게 거절했다.

‘이놈을 제압하고 돈을 내야 하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키고 빠르게 지폐를 쑤셔 넣고 가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내고 가야 할 것인가? 결국, 공짜로 빵을 받으면 이득이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진혁은 그냥 빵을 받기로 했다.

『고맙게 받지.』

“진혁아, 빵값은 안 내?”

“선물이래요.”

“벌써 사람들이 네 얼굴을 알아보는구나! 하긴!”

아버지가 기뻐했다.

양손 가득 빵 봉투를 안고 빵집을 나서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또 다른 빵집과 카페, 식당과 다른 빵집을 지나치고 나서 진혁이 물었다.

“아버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음?”

“저랑 루이스 형이 닮았어요?”

“닮기는 무슨, 너는 나를 닮았지.”

“역시 그렇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이름 모를 공원 벤치에서 나란히 앉았다.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가 흩뿌려지는 분수 옆에는 청동빛 구리 인어가 꼬리를 말아쥔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하얀 포말이 뿜어나왔다가 다시 흐트러진다.

작은 분수 안에서 순환하는 그 온전한 흐름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대회를 위해서 새벽부터 나갈 필요도 없고, 어딘가에 출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

“생각해 보면 마지막으로 이런 식의 휴식을 취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네. 우리 아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파리 와서 공원 벤치에 앉아 보기도 하는구나.”

아버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묵묵히 빵조각을 뜯어먹던 진혁이 눈을 껌뻑거렸다.

“읍-풉.”

“하하! 잠깐 기다려 봐라. 내가 마실 걸 좀 사 올게.”

“아니, 그게.”

“그 빵 봉지들을 다 들고서 음료수를 사 올 수는 없잖아?”

“그럼 제가 갔다 올게요, 아버지께서 여기 계세요.”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아버지가 제지했다.

“바로 저기에 있는 카페에 갈 거야. 멀리 가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닌데요….’

공원은 결코 평화로운 장소가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1.2km 바깥의 화장실에서는 깡패 여러 명이 한 명을 구타하고 지갑을 빼앗는 중이다. 850m 거리의 아이스크림 트럭 앞에서는 소매치기가 방심한 손님들을 노리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향하고 있는 200미터 거리의 노상 카페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이는 두 명이 서로 바람잡이와 소매치기 역할을 맡아 커피 트럭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다.

‘확실히 해외에 나오니 치안이 나빠. 동양인은 외모만 봐도 확실히 표적이 되고.’

아버지는 가슴팍에 걸고 있던 여권 지갑을 꺼내 손에 쥐었다. 앞쪽에 서 있던 소매치기 패거리 두 사람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녀오세요.”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위협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

‘심장마비를 일으키면 아버지가 심폐소생술을 하려고 하실 거야.’

아예 저런 불쾌한 족속과 상종하게 하고 싶지 않다. 진혁은 이 공원 바닥의 흙 지반이 어떤지 살폈다.

사람들이 발로 밟아 다지고 다니는 부분은 단단하지만 의외로 그 이외의 부분은 바위가 아니라 그저 모래에 불과했다.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통해 이 부근을 지상만이 아니라 지하 역시 살피어 지하수가 흐르는 길을 미리 파악했다.

‘현대에는 이유 없는 싱크홀이 자주 생긴다고 하니까 아 정도는 괜찮겠지. 아버지가 계신 데까지 영향을 끼치면 곤란하니 물길은 피하고….’

진혁은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기환(氣丸)을 만들어 보냈다. 발밑에 디딜 아주 약한 부분만 남겨두고 지반을 푹푹 파내어, 땅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동굴로 흙을 보낸다.

이제 신호 한 번만 보내면, 저 자들은 목까지 깊숙이 땅속에 파묻혀버릴 것이다.

“어? 유로화 지폐를 다 썼나?”

지갑을 열어보던 아버지가 태평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지갑 속에는 신용카드 한 장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거리의 커피 트럭은 신용카드를 받지 않으므로, 지폐가 아니면 곤란하다. 손짓 발짓으로 카페 주인과 대화를 마친 아버지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있던 소매치기들은 아버지에게 흥미를 잃었다. 대신 공원 입구 쪽에 나타난, 금목걸이를 목에 건 중국인 부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진혁은 아주 짧은 순간 갈등했다.

‘이놈들을 묻어, 아니면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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