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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305화 (305/656)

제 305화

화장실은 건물의 아래쪽으로 빙글빙글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건물 밖으로 나서야 했다. 좁은 골목길의 바로 옆문이다.

아버지는 이 길을 찾느라 시간이 좀 걸린 모양이지만, 진혁은 그 기척을 천마군림보로 좇아 순식간에 따라갔다.

『아저씨, 껌 한 개 어때?』

험상궂게 생긴 20대 백인 청년 두 사람이었다. 미식축구 선수처럼 덩치가 큰 둘이 임운정을 둘러싸고 말을 거는 중이다. 말이 통하지 않자 껌을 들이민다. 엄지손가락과 검지로 OK 사인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돈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아직까지 꺼내지는 않았지만, 청바지 뒷주머니 깊숙한 곳에는 작은 나이프가 숨겨져 있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임운정은 그 둘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벅이고만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진혁이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감히 누구에게.’

이곳에는 CCTV가 없다.

청년들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진혁에게 있어서도 유리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이, 거기.』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곳에만 갑자기 겨울이 온 것처럼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갑자기 으슬으슬해지며 전신에 소름이 오싹오싹 돋는 듯한 감각이 들어 백인 청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응?』

그곳에 괴물이 서 있었다.

수천수만 명의 인간을 잡아먹은 것이 분명한 살기.

악의 자체가 인간이 된 것만 같은 그림자다.

겁먹은 백인 청년은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껌 따위는 잊어버린 채 내팽개치고 그 자리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으, 으아아!』

하지만 두 발 다 바닥에 붙어버린 듯 뗄 수 없었다. 다른 청년은 숫제 두려워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있다.

진혁이 두 사람을 대상으로 타깃을 한정시켜 살기를 퍼트리고 있었다.

썰까, 태울까, 묻을까.

그는 선택지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바람이 불 리가 없는 실내에 스산함이 감도는 동안,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혁이, 너도 왔어? 화장실 급하면 먼저 갈래?”

임운정이 입을 연 것이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는 살기를 거두었다. 백인 청년 둘이 거세게 숨을 토해냈다. 한 명은 임운정 쪽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어어, 조심하게. 술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지.”

아버지는 백인 청년을 부축해 주며 웃었다. 눈치 없는 그 모습을 보며 진혁은 살기를 가라앉혔다.

“자네들도 좋은 일이 있었나 봐? 이렇게 비틀거리는 걸 보니 술을 꽤 마신 모양인데. 나는 오늘 아들이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두 청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최대한 진혁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아버지는 즐거운 듯이 떠들고 있었다.

“…아버지, 너무 취하셨어요.”

진혁은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백인 청년의 발을 걸었다.

-콰당탕

큰 소리가 나며 청년이 바닥에 뒹굴었다. 그 일행인 다른 청년이 비명을 지르며 동료를 더듬었다.

아버지가 놀라서 외쳤다.

“웨이터! 웨이터!”

쩌렁쩌렁하게 목소리가 울리자, 저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직원들이 이쪽으로 오는 모양이다.

진혁은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듯이 무릎을 꿇고 앉아 청년의 맥박을 살폈다.

진혁이 없었더라면 저놈들에게 무슨 일을 당했을지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순진한 얼굴이다.

“아버지, 뭐 하세요?”

“내가 이래 봬도 실습 교수잖니. 응급 상황에 대한 심폐소생술이나 응급처치 교육은 다 받았어.”

아버지는 방금 전까지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었다.

곧 소리를 들은 웨이터와 다른 사람들이 달려왔고, 그들은 소란을 피우며 청년을 살폈다.

신음소리를 내며 청년이 눈을 뜨자, 일행이 부축해서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진혁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그동안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리고 진혁에게 물었다.

“너는 왜 거기 서 있니? 이제 안 마려워?”

“…지금 갈게요.”

특별히 뭘 하러 화장실에 온 게 아니었던 그는 수도꼭지를 돌려 손을 씻었다.

석회가 일부 포함된 물은 한국과는 질이 달라 미묘하게 미끈거렸다.

‘지금이라도 머릿속의 혈관을 터트려버릴까. 조금 더 멀어지기 전에.’

진혁이 허공에 손을 살짝, 두 번 내리그었다.

먼 곳에서 아무도 모를 변화가 일어났으나 당사자들은 물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직 한 명, 기술을 시전한 진혁만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다.

그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나한테 껌을 나눠주려고 하던 친절한 청년들인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껌을 나눠주려는 게 아니고, 껌값을 달라고 하면서 칼을 휘두를 놈들이었어요.’

진혁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모르는 채로 지나간다면 제일 좋다.

아버지가 사는 세계, 그리고 자신이 사는 세계.

그 세계가 지금 일순간 겹칠 뻔했다.

만일 이곳에 진혁이 없었고, 아버지가 여기에 혼자 있었다면?

무공을 쌓기 좋고 건강하며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 육체라고 해도, 칼을 맞으면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진혁은 살기를 깨끗하게 가라앉혔다.

‘평생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보호할 수는 없어.’

현대에서 무학을 절대로 전수하지 않겠다던 결심은 가족의 위기 앞에서 먼지처럼 흩어져버렸다.

“아버지, 이번에 한국에 돌아가면 제가 새로운 건강 체조를 가르쳐 드릴게요.”

“그래? 체조가 또 있어? 전에 기체조도 효과가 아주 좋았는데 너무 어려웠잖아.”

“아주 쉬운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진혁이 다짐했다.

‘어려운 걸 아주 쉽게 가르쳐드리면 되지.’

아버지는 술에 취한 얼굴로 해롱해롱 웃었다.

진혁은 아버지를 부축해 계단을 올랐다.

환골탈태한 육체는 간 역시 성능이 좋아, 웬만한 알코올은 문제없이 해독해낼 터다.

하지만 독한 양주를 물처럼 마시니 간도 배겨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진혁이 아버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버지, 주량은 어느 정도 되세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

기세등등하게 외치는 부친을 보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아버지 술버릇이 이런 거였구나.’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마시고 싶어 한다.

진혁은 술을 이렇게 좋아하는 아버지가 왜 술자리 횟수 자체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술 먹는 양을 조절했는지 드디어 깨달았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가 아니면 안 드셨지. 어머니께서 조절해주신 건가 보다.’

부하 놈이었다면 벌써 예전에 제재했을 것이다.

광안마 놈은 술에 환장해서, 좋은 술이라고 하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구하려고 했다.

술 술 술 노래를 부르다가 한 번,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섭혼술을 통해 술 냄새만 맡아도 입에서 쓴맛이 나게 조작해주었다.

그 이후에는 한눈파는 일 없이 충성을 다했다.

오히려 술을 혐오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해져, 혐주가로 이름을 날렸다.

진혁은 광안마의 약점을 이용할만한 정파 놈들이 그가 술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정보를 얻은 시점에서 섭혼술을 깨끗이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광안마는 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술병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긴 호리병박도 싫어하게 되었다.

‘조금 너무했나?’

그땐 그랬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현대인의 감각으로 다시 돌이켜보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자리로 돌아오자, 마리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화장실에서 쓰러졌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달려가서 걱정했어. 다행히 백인이라고 해서 바로 아닌 걸 알았지.”

“술을 꽤 많이 드신 것 같은데 이제 돌아가는 게 어때?”

진혁이 시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가 말했다.

“내일 저녁에 특별한 일정이라도 있어?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시는데.”

“미팅이 있어.”

미국의 건강식품과 병원에 납품하는 레토르트 환자식을 만드는 회사의 사장, 알렉스를 만나기로 했다.

작게 꼰 가느다란 면발을 넣은 새로운 수프 레시피를 주고 돈을 더 받기로 했다.

마리오가 안타까워했다.

“그럼 모레는? 내가 너하고 같이 갈 가게들을 찜해 놨는데.”

“모레도 미팅.”

모레에는 젤로스 사의 랑비에 씨와 미팅이 있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에 대한 의논을 할 예정이다.

칼같이 끊는 진혁을 보며 마리오가 투덜거렸다.

“아니, 파리에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뭐 그렇게 바빠?”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도 바쁠 텐데. 이것저것 컨택이 들어오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그 의논도 해야 하는데. 이번의 케이크 레시피들을 판매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연락해오고 있어.”

루이스가 입을 열었다.

“셋이서 함께 의논할 시간이 필요한데. 오늘은 무리겠지?”

아버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술을 많이 드시긴 한 모양이다. 진혁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건강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까 그놈들을 제대로 처분하지 못했지만, 심마(心魔)를 심어놓았다.

일 년간, 그들은 울화가 치미는 것과 동시에 심인성 발기 부전을 겪게 될 것이다.

‘나도 많이 관대해졌어.’

평화로운 해결에 만족해하며 진혁이 말했다.

“루이스 형 생각은 어떤데?”

“레시피를 사가려는 사람들이 많아. 하지만 너는 네 가게가 있으니까 그 가게에서 팔 예정이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 가게 테마하고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하고.”

“두 가지 방법이 있지. 첫째, 이름을 밝히고 레시피를 넘겨서 팔게 하는 것. 그쪽에서 판매를 해주면서도 진혁이나 너, 내 이름도 홍보가 될 거야.”

“그리고?”

“아예 팔지 않고 네 가게의 한정 상품으로 두는 것. 나나 마리오 역시 가게를 열게 된다면 거기에서 판매할 수도 있고.”

두 가지 방법 모두 장단점이 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 내일이나 모레, 점심때에 어때?”

“너 내가 물어봤을 때는 시간 안 된다며?!”

마리오가 따져 물었다.

“미팅은 저녁때니까. 꼭 필요한 의논이라면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지.”

“너랑 같이 <오보브와>도 가야 하고, <생 마르셀>하고 <디저트리>도 가보려면 시간이 부족하단 말이야! 나랑 같이 디저트 먹으러 다니자.”

마리오가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넌 디저트 먹으면 레시피 알아낼 수 있잖아.”

“…뭐, 비슷하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파리의 유명한 맛집들을 방문하는 게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오 저 녀석은 파리 시내를 아주 잘 알아. 450년 된 빵집부터 현대적인 모던 디저트 가게까지 모두 구석구석 다 알고 있지. 진혁이 네가 원하는 컨셉의 디저트가 어떤 건지 말해주면 마리오가 거기에 데려다줄 거야.”

“그래?”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어가 가능한 현지 디저트 전문 가이드가 붙는 셈이니 나쁜 일은 아니다.

“조건이 하나 있는데.”

“뭔데?”

“아버지께 여쭈어보고 같이 가고 싶다고 하시면 가자.”

“아버지께서도 페이스트리 쉐프라고 하셨지? 당연히 좋아하실 거야!”

“영어도 프랑스어도 못하시는 분이 혼자 파리를 다니시면 위험하니까, 같이 다녀야 하거든.”

“부자(父子)가 바뀐 것 같아.”

진혁이 씩 웃었다.

“그건 아니야. 내가 몇 살을 먹었건 이 분이 내 아버지가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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