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4화
시상대 위로 올라가면서 루이스는 자신이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을 반추했다.
주마등처럼 생생하게, 모든 일이 기억났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프랑스에 갓 이민 왔을 무렵, 공립학교에서 어눌한 불어 때문에 무시당하던 때.
제과제빵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다른 프랑스인 학생들에 비해 두 배로 더 열심히 해야 자신을 봐주던 경험.
막상 한국에 와서는 고등교육을 프랑스에서 받은 탓에 제대로 어울리지 못해, 어디서도 자신이 어디에서도 이방인이라고 느끼던 순간들.
이런저런 대회를 전전하며 의미 없는 트로피를 모으다가, 분야를 완전히 바꿔보기로 하고 얼음 조각을 시작하던 때.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전하게 되어, 처음으로 임진혁이라는 자를 만나게 되었던 시간까지.
봄날 어린이가 부는 비눗방울 거품이 모락모락 바람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루이스 강은 눈시울이 절로 붉어지는데 애써 꼿꼿이 허리를 폈다.
‘지금 나는 여기에 대한민국 대표로 와 있는 거야.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안 돼.’
그가 트로피를 받기 위해 서 있는 동안 시몬 리옹이 입을 열었다. 이번의 최종 심사평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최종 우승을 한 아주 훌륭한 케이크에 대한 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 팀은 프랑스의 페이스트리에 담긴 영혼의 불꽃을 그대로 계승하는 데에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캐러멜도, 초콜릿과 생크림이 조화를 이룬 걸 한두 개 정도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섯, 일곱 개나 만든다는 건 수천, 수만 번 레시피 개발을 위해 실험을 반복한 집념 끝에 나온 결과물이 분명합니다. 이런 페이스트리 쉐프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프랑스의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정통 페이스트리의 맛이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몬 리옹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30도 각도로 몸을 숙여, 지극한 예를 표했다.
루이스 강은 금색 케이크 트로피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영모가 천천히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점차 한 명씩 그 박수에 동참했다. 박수를 칠 수 없는 라이언 윈체스터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두 손을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기자석의 기자들, 일반 관객을 비롯해 다른 경연 참가자들까지 모두 손을 멈추지 않고 다 함께 응원의 박수를 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루이스는 몇 번이고 거듭해 고개를 숙였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마지막 막이 천천히 내려간다. 드디어 나흘간의 대회가 끝났다.
막이 드리워지기 직전에 진혁은 아버지에게 눈짓했다.
‘이 앞에서 만나요.’
경연 참가자들은 빠르게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서 조리복을 벗어 던지며 마리오가 악당처럼 킬킬 웃었다.
“와… 1등이라고, 1등! 우승 후보조차 아니었는데! 내가 완전히 쟤들 콧대를 눌러준 거라고.”
‘저 녀석도 나와 같은 걸 느끼고 있었구나.’
제과제빵을 배우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무시당하는 경험은 자신만 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루이스는 홀로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남동생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너 혼자 했냐? 진혁이가 다 한 거지.”
그는 이번 대회에 헤드 페이스트리 쉐프로 출전했다. 하지만 자신이 헤드 쉐프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도,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 다듬는 것이 좋을지 거듭해서 실전을 연습한 것도 거의 진혁이 다 했다.
우승팀의 헤드 쉐프라는 것은 큰 경력이 된다.
‘애초부터 진혁이한테 헤드 쉐프를 맡기는 것이 좋았을지도 몰라.’
경력이 많다거나, 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그는 양손을 뻗어 임진혁의 손을 움켜쥐었다.
“진혁아. 고생했다. 다 네 덕분이야.”
시상대에 올라갔던 탓인지 양손 모두 땀에 젖어 있어 끈적하다. 진혁이 자연스럽게 손을 빼면서 웃어 보였다.
우승을 수십 번 해온 사람처럼 여유 있는 태도였다.
“형하고 마리오가 같이 열심히 한 덕분이지.”
눈치 없는 마리오가 진혁과 루이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정말로 열심히 했어. 무슨 스파르타 훈련처럼 잠도 줄여가면서 계속해서 똑같은 걸 만들었잖아.”
진혁이 뭐라고 하기 전에 루이스가 먼저 말했다.
“노력한다고 다 잘 되는 건 아니다, 마리야.”
“….”
우승한 기쁨에 신나서 들떠 있던 마리오는 계속해서 형에게 구박받자 시무룩해졌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돌아온다는 건 허상이야. 노력한다고 뭐든지 다 이루어진다면 벌써 세계평화가 현실이 되고 지구온난화 문제도 해결됐겠지.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형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
“다들 고생했다는 이야기.”
강 씨 형제가 옷을 다 갈아입은 것을 본 진혁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이만 나가고 싶은데.”
“나가자!”
루이스는 진혁에게 굳이 풀어서 설명하지 않았다.
‘프랑스 팀은 졌지만, 국가 프랑스로써는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뛰어난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전부 이 대회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고 있지. 그리고 이 대회는 프랑스식 전통 빵과 프랑스식 코스 요리에 맞는 케이크를 내놓도록 권장하고 있어. 가장 정통적인 레시피를 전 세계에 홍보하는 셈이지.’
마음 한쪽이 복잡했다.
◈ ◈ ◈
“우승이라고?!”
장은효는 너무나도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그만, 익일 납품할 샌드위치 용으로 커팅하려고 손에 들고 있던 오이를 그대로 떨어뜨려 버렸다.
-텅
아직 잘리지 않은 묵직한 유기농 오이는 슬리퍼를 신고 있던 진희의 엄지발가락 위에 정확히 안착했다.
“아야아아아! 엄맛!”
“어머, 어머. 미안해라. 우리 아들이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니 믿기지 않아서 그만….”
“아흐으으으.”
언젠가부터 몸이 튼튼해져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감각은 예민해졌다.
진혁이 강제로 시켜놓은 환골탈태 덕분이지만 진희는 다니던 병원을 사직하고 야간 근무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많이 아프니?”
어머니가 쩔쩔매며 물었다.
사실 그다지 아프지 않았지만, 괜히 과장해서 신음소리를 낸 진희가 킥킥대며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엄마.”
장은효가 딸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그러길래 주방에 들어올 때는 꼭 조리화를 신고 들어오라고 했잖니?”
“좋은 소식을 빨리 전해주려고 왔잖아요!”
“그래, 그건 고맙다. 그나저나 진혁이 혼자 괜찮을까나 몰라?”
“당연히 괜찮겠죠! 국가대표로 나가서 이기고 왔는데, 안 괜찮을 리가 있어요?”
“아니, 그거 말고. 느이 아버지 술버릇 말이야. 좋은 일이 있으면 자제를 못 하잖니.”
진희는 모친의 걱정을 일축했다.
“에이- 엄마. 아빠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설마 거기 가서 술주정을 부리겠어요? 그것도 이렇게 좋은 날에?”
“그렇겠지? 역시 내가 따라가야 했는데.”
걱정스레 말하는 어머니를 보고서 진희가 빙긋 웃었다.
“다음에 진혁이랑 아버지 두고, 저랑 둘이서 가요.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엄마 호강시켜 드릴게.”
“어이구, 말만이라도 고맙다.”
“쟤처럼 가게를 일으키거나, 세계 대회에서 트로피를 따오지는 못하더라도 같이 여행은 가줄 수 있지! 나도 잘할게요, 엄마.”
장은효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런 것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니지? 네가 진혁이 같지 않다고 해서 갑자기 못난 딸이 되는 건 아니야. 비교하덜 말아라.”
“하지만….”
“한 달에 백만 원씩 가겟세에 보태라고 보낸다든가, 새로운 샌드위치 레시피를 한 달에 열 개씩 만들어서 공급한다거나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진혁이가 한 달에 얼마를 보내고 있다고요?!”
“필요 없다고 해도 용돈으로 쓰라며 자꾸 보내네.”
기죽은 딸을 보며 장은효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휴, 진짜 괜찮다니까. 얘, 진혁이 돌아올 때 공항에 마중 나갈 거지?”
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랜카드 다시 주문하려고요. 우승 축하한다는 메시지도 넣을 거예요.”
“그래, 그래. 너밖에 없다, 얘. 역시 딸이 달라.”
“내일모레 오후에 아버지와 같은 편으로 귀국한다고 했으니까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스마트폰으로 새 플랜카드를 주문하는 딸을 보며 장은효는 마음 한구석에 근심을 품었다.
‘이이가 채신머리없이 젊은 애들 사이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잘 하고 있을 거야.’
◈ ◈ ◈
“자랑스러운 한국 팀에게 건배!”
-쨍
임운정이 맥주잔을 부딪치며 유쾌하게 웃었다. 은은한 상앗빛 조명이 드리워진 실내는 어둡고, 맥주통과 18세기식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높은 천장 아래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하하하! 아주 잘했다, 잘했어. 너희들이 세상을 바꾸었어. 한국 팀이 프랑스 본토의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다니 말이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은 이미 새빨개져 있다. 감동에 젖어있는 아버지에게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들었다.
“저, 여기….”
아버지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괜찮아, 괜찮아!”
시끄러운 펍 속에서 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마리오는 신입생 환영회에 처음 참석해 긴장한 대학교 1학년생처럼, 열심히 임운정의 술잔을 챙겼다.
루이스가 속삭여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술을 따르는 거야? 이미 많이 드셨는데.”
마리오 역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 잔이 비었을 때는 꼭 술을 따라줘야 한다고 하잖아.”
“왜?”
“…안 따라준 잔 하나당 일 년만큼 솔로로 지내야 한다고 하던데.”
“헛소리하지 말고 그만 따라!”
“진짜야! 한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라고 했단 말이야. 내 팬들이 댓글로 알려줬단 말이야.”
루이스가 마리오의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쳤다.
“멍청한 놈.”
진혁이 킥킥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형제가 항상 사이가 좋아.”
“좋기는 뭐가 좋아!”
“내가 고생하고 있지.”
강 씨 형제 두 사람이 발끈해 대답하자,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진혁이랑 진희도 사이가 좋은데. 형제는 또 남매와 달리 동성이라 더 각별한 느낌이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동생이 좀 더 굴리기 쉽지.’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채워진 맥주잔을 한 번에 비웠다. 벌써 열 잔이 넘게 마셨다. 호탕하게 빈 잔을 내려놓고, 드링크 메뉴판을 더듬었다.
“여기는 서양 술이 참 싸고 좋단 말이야.”
“아버지, 그만 드시죠.”
“그래. 나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오마.”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진혁은 아버지를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마리오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따라갔을 것이다.
“진혁아, 저기 화장실은 남녀공용에 한 칸이야. 네가 지금 가도 같이 못 들어가.”
“아니, 화장실까지 부축해드릴까 했는데.”
“허허! 전혀 필요 없다. 아비는 아주 멀쩡해요.”
환골탈태를 시켜놓았다고는 해도 단전에 내공이 쌓인 것은 아니다. 그저 전신의 세맥이 활성화되어 쉬이 아프지 않고 체력이 조금 좋을 뿐이다. 덧붙여 피부도 고와지고 얼굴 주름과 인상도 개선되었다.
하지만 환골탈태에 거기에 간의 알코올에 대한 독성 예방 효과는 없다. 이만큼이나 술을 퍼마시면 몸에 좋을 리는 없다.
진혁은 아주 잠깐 망설였다.
‘아버지를 화장실까지 따라갈까, 말까.’
그런데 루이스가 말을 걸었다.
“다시 한 번 네 아이디어에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어. 나나 마리오가 없었으면 별로 달라지는 게 없었을 거야. 하지만 네가 없었다면 우승할 수 있었을 리가 없어.”
“아니야, 형하고 마리오의 제안대로 <러브 스토리>를 만들었잖아.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왔는걸.”
자신이 혼자 했다면 러브 스토리 케이크가 지금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도 함께할 수 있도록, 영혼결혼식을 하는 모습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해골이 된 유골 두 구를 앞에 놓고 생년월일과 사주가 적힌 종이를 불태우며 천지신명 앞에서 두 사람의 혼인을 맹세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네가 말한 그 영혼결혼식 말이지? 그건 진짜 안 하길 잘했어.”
루이스의 말에 마리오가 킥킥대며 덧붙였다.
“기괴한 것만 잘 아는 녀석.”
그 순간 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 미안해.”
마리오는 놀라서 갑자기 사과를 했다.
“기괴한 것만 잘 아는 건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잘 아는….”
마리오 놈이 횡설수설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진혁은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화장실로 출발한 시점부터 기감을 퍼트려 위치와 공간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제대로 화장실로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던 중, 누군가 아버지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새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