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3화
『진혁 쉐프. 부탁을 하나 해도 되는지 모르겠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만든 케이크를 먹어보고 싶어.』
조제프 쇠비어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주느비에브가 거들었다.
『네게 묻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 같아. 어떻게 저런 케이크를 만들었는지 말이야!』
정정당당하게 다가와 솔직하게 묻는 모습이, 이전에 루이스나 브라이언과 비슷하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참이었다. 다급하게 끼어든 브라이언 신이 외쳤다.
『나도, 나도.』
리처드 베이커가 밀치고 들어왔다.
『나도 빼놓으면 섭섭하지.』
순식간에 팬 미팅하는 연예인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달려들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강 씨 형제 두 사람은 멀찍이 물러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리오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지. 내가 먼저야.』
◈ ◈ ◈
심사위원들이 의견을 종합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심사평을 발표하겠습니다.』
회의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다른 심사와 비교하면 아주 짧았다.
카메라 감독이 중얼거렸다.
『…마지막 회 심사가 이렇게 빨리 끝나다니. 최초의 대회 때에 딱 한 번 이런 적이 있었어.』
보조가 물었다.
『그때는 무슨 일이었는데요?』
『심사위원들 모두가 만장일치로 같은 의견을 냈지. 다른 케이크의 맛이 기억에 전혀 남지 않게 눌러 죽일 정도로 엄청난 케이크였다고 했어.』
『그때 우승한 사람이 누구더라? 무슨 맛의 주인인가 하는 호칭을 얻었잖아요.』
『마스터 오브 딜리셔스니스(Master of deliciousness)! 시몬 리옹 쉐프 이야기잖아. 그걸 몰라?』
『…제과제빵계에 새로운 신성(新星)이 나타났군요.』
심사위원들이 자리에 앉았다. 안토니오 바트가 마이크를 들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페이스트리 계의 새로운 미래를 선도하는 대회, 최고의 페이스트리 쉐프를 선발하기 위한 대회에 이제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울듯이 모든 축제에는 끝이 있습니다.』
관객들이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땀에 젖은 조리복을 입고 있는 경연 참가자들 역시 같이 손뼉을 쳤다.
진혁은 천천히 서너 번, 다른 사람보다 훨씬 느리게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드디어 끝인가?’
결과가 어떻게 발표 날지는 자명하다. 그는 관객석에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부친을 흘깃 바라보았다. 결과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듯,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무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는 꽤 즐거워 보였다.
양손으로 한글이 써진 작은 플랜카드를 휘두르며,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솟은 모습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저렇게 즐거우신가?’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언제나 가게에서 일만 하고 계셨다. 실습 교수로 학교에서 일하시기도 하셨고, 샌드위치 가게 오픈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일’의 범주에 속해있다.
아들을 응원하기 위해서라며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온 지금 상황은 극히 예외적이다. 회귀 전에는 아예 발생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좋은 일이군.’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으로 흐뭇해하는 아버지 곁에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프랑스인이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다. 젤로스 사 한국 지부장인 랑비에다. 대회 참가를 권유하고 후원해준 스폰서로, 이번에 진혁이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입지가 좋아진다고 했다. 오늘 대회가 끝나면 이미 넘긴 모델링 초콜릿의 레시피에 대해서 의논하겠다며 적극적으로 굴고 있다.
‘아버지를 초대한 것도 랑비에 씨가 분명한데.’
아버지가 외국에 나간다는 아이디어를 혼자 떠올렸더라도, 직접 진행했을 리가 없다. 스마트폰의 메신저 기능만 간신히 사용하는 분이시다. 돌아가는 비행기 표의 날짜를 진혁과 맞춘 걸 보면 애초에 스폰서 역할을 했던 랑비에가 손을 썼다.
‘고마운 일이지만, 말을 하지 않고 진행한 건 조금 괘씸한데….’
은(恩)은 은대로, 원(怨)은 원대로 갚을 일이 있을 것이다.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의 최종 심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최종 총합 점수를 보시면….』
무대 위의 커다란 스크린에 아래쪽부터 점수가 하나씩 떴다.
마지막까지 남은 모든 국가의 점수가 공개되었으나, 어느 점수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1위가 2위보다 압도적으로 점수가 높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세자릿수와 두 자릿수 정도로, 엄청난 차이였다.
『7위는….』
안토니오는 가장 점수가 낮은 아래쪽 국가부터 하나씩 하나씩 공개했다.
가장 먼저 이름을 불린 자들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서로를 위로했다.
마침내 가려진 점수판의 이름은 네 국가만이 남았다.
『그럼 4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외쳤다.
아슬아슬하게 트로피를 받지 못하는 4위는 대만 팀으로 밝혀졌다.
장치앙린은 고개를 숙이며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었다.
『이번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장 대형,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다음 대회가 또 있다고.』
두 사람이 장치앙린을 위로했다.
아직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은 팀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리처드 베이커가 말했다.
『이제 남은 건 우리, 프랑스 팀, 한국 팀인가.』
『그러게.』
브라이언 신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어느 쪽이건 간에 3위 안에는 들었어.』
『3위보다는 더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토마스가 경쾌하게 말했다.
『우리 팀 유머 감각은 충분히 제일 좋은 상을 받을 만하다고. 초콜릿 쇼피스부터 얼음 조각, 그리고 러시모어 마운틴까지 모두 최고였어.』
『고마워, 토미.』
『하핫.』
하지만 토마스가 그렇게 웃는 순간, 스크린의 3위 이름이 뒤집혔다.
안토니오 바트가 그 이름을 소리 내 읽었다.
『3위는 우수한 성적을 보여주신 미국 팀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리처드 베이커는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감사합니다, 항상 열심히 해준 브라이언과 토마스에게 이 트로피를 바칩니다.』
그는 점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트로피를 받았다.
삼각형으로 잘라낸 케이크 조각 모양의 트로피는 무대 조명을 받아 구릿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3위를 한 미국 팀에게는 부상으로 5,000유로의 상금이 수여됩니다.』
『그리고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 명예의 전당에 디저트 쇼피스를 전시할 겁니다!』
쿠프 드 몽드 명예의 전당은 파리 7구에 있으며 관광객들도 다수 방문하는 곳이다.
그곳에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영광이다.
리처드 베이커가 히죽 웃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기자석에서 기자들이 수군거렸다.
『미국 팀이 이번에는 선전했잖아. 최소한 2위는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저 정도면 예년에 비해서는 잘 한 거지.』
『2위는 누굴까?』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은빛 봉투에서 결과가 적힌 종이를 꺼냈다. 관객들도, 참가자들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진혁은 팔짱을 끼고 예상했던 그대로의 결과를 들었다.
『2위는 프랑스 팀입니다! 앞으로도 그 실력 그대로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프랑스가 단 한 번도 우승권에 들지 못했던 국가에게 1위를 빼앗겼다!
충격이 파도처럼 관객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조제프 쇠비어는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 애썼다. 그는 천천히 걸어 심사위원 앞으로 나섰다.
『마지막의 무지갯빛 원색 케이크는 아주 훌륭했어요. 선명한 원색 조합이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지 말고, 맛을 조화롭게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앞으로도 훌륭한 디저트를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은빛 케이크 조각 모양의 트로피를 받은 그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얼굴만 보면 2위가 아니라 꼴찌를 한 것처럼 보였다.
주느비에브가 조제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우리는 아주 잘 했어.』
『하지만 졌어, 쓸모가 없지.』
항상 느긋하고 여유 있던 필리프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조제프. 그 망할 완벽주의 좀 버려! 결국, 너도 패배자일 뿐이야.』
『완벽주의도, 패배자인 것도 아니야.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에게 배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조제프가 냉정하게 말했다.
『시몬 리옹 쉐프님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이야. 우리보다 한참 어리다거나 경력이 부족하다는 건 관계없어. 저 사람과 교류하고 나 역시 실력을 증진시키면 된다. 다음 대회에서 또 만날 때는, 절대로 지지 않아.』
『멍청한 소리 하기는!』
매끈하게 반짝이는 은빛 트로피는 조리대 위에 놓여진 채였다. 프랑스 팀의 누구도 그 트로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안토니오 바트는 봉투 안에서 종이를 꺼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아마도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신사 숙녀 여러분! 1위가 누군지 맞혀 보겠습니까?』
아직 1위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
『한국!』
리암 에이든이 관객석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아내와 기나긴 통화를 마친 그는 최종결과가 발표되기 직전에 회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반짝였다.
제임슨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정말로 돈을 따겠군.』
『…아, 그것도 있네.』
내기 따위는 새하얗게 잊어버리고 있던 리암이 씩 웃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드디어 줄리아랑 화해했다고!』
그는 해맑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멋진 쿠키를 만든 청년이 지금 상을 받고 있군. 최고의 날이야.』
한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마리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줄 알았다.
‘우리가 1등이라고?’
지금까지 나온 결과로는 당연히 대한민국이 1위일 수밖에 없다.
마리오는 정신없이 박수를 쳤다. 하품이라도 하는 것처럼 헤 벌린 입에,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했다. 기쁨이 덩굴처럼 타고 올라와 마리오의 온몸을 감쌌다.
임진혁은 입을 헤 벌리고 정신없이 박수를 치는 중인 마리오를 보았다. 미소를 지은 채 손뼉을 약하게 맞대고 있는 루이스 역시 보인다.
동공이 커지며 입을 벌리고 어깨를 떨며 격렬하게 박수치는 부친과 그 옆에서 점잖던 모습을 집어치우고 오른 주먹을 휘두르며 휘파람을 불고 있는 랑비에를 보았다.
“루이스 형, 나갈 준비 해야지.”
“어어어? 어, 어.”
현실감이 사라진 루이스가 더듬거렸다.
“<러브 스토리> 말이야, 진짜로 대단하긴 했나 봐. 맛도 그렇고, 철학적인 주제도 그렇고….”
“아무렴. 누가 만든 건데.”
진혁이 가볍게 대답했다. 다른 이들이 들떠 있는 것을 보니 그 역시 기분이 좋았다. 고희 잔치에서 손주들이 재롱떠는 것을 본다면 이것과 비슷한 기분일지도 모른다.
‘다들 아주 좋아하잖아? 잘 됐어.’
그가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는 동안 루이스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오스카상을 받기 위해 레드카펫을 걷는 것처럼, 아득한 꿈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철학적인 내용을 맛으로 완벽하게 살려낸 케이크였어요, 정말로 맛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