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02화 (302/656)

제 302화

‘광고! 적당히 광고 보내라고요.’

PD는 알리샤가 보낸 수신호를 무사히 접수했다.

심사위원들이 최종 심사 회의를 하는 동안 스폰서 광고를 내보내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다.

카메라맨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장면을 더 잡았다.

‘깨끗한 접시.’

아무도 케이크를 남기지 않았다. 접시는 깨끗이 비워졌다. 설거지를 한 것처럼 희기만 하다.

빵 조각이나 크림 한 점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 케이크에 진짜 마약이라도 넣은 거 아니야? 그럼 바로 탈락일 텐데.’

접시를 마지막으로 방송 화면은 빠르게 바뀌었고, 알리샤는 여유를 얻었다.

『참가자 여러분, 신사 숙녀 여러분.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심사위원석과 무대에 두꺼운 장막이 내려왔다. 알리샤는 커튼 뒤에서 심사위원들을 한 명씩 흔들어 깨웠다.

『엘리자베스 쉐프님! 일어나세요!』

『무지개…지금 내 혀 위에 무지개가 있어.』

몽롱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알리샤는 마음을 굳혔다.

『의료팀 불러서 마약 검사를 할까요?』

『아니야, 이건 그냥.』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끼처럼 눈이 빨개진 채, 그녀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토니오 바트에게 다가가 느닷없이 그를 확 껴안았다.

『나는 이제 당신을 피하지 않을게요.』

『오, 나의 베스! 드디어!』

멍하니 있던 안토니오 바트는 두 손을 들어 엘리자베스 포크너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입술을 맞대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커튼을 치길 잘했다.’

알리샤는 현실 도피를 하기 시작했다. 저 케이크에 사랑의 묘약이 들어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안토니오 바트와 엘리자베스 포크너는 이십여 년간 제과제빵계의 라이벌로 지내왔다.

대외적인 프로그램 따위를 진행할 때에는 사이좋은 모습을 연출하지만, 실제로 무대 뒤에서는 쉴 새 없이 티격태격하며 사이가 나쁘다.

타국에 방한한 국가 원수가 갑자기 자국의 대통령과 느닷없이 키스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황당한 기분이다.

『…그러니까 그 티격태격하는 게 사랑싸움이었다는 거네요.』

사이 나쁜 두 사람을 사회자로 선정한 대회 위원회를 욕하면서, 엘리자베스와 안토니오가 대회 외에는 최소한으로 마주칠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해왔던 알리샤는 허무한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춥, 춥.

사무실에서 퇴근 시간이 지나서도 남아서 야근하며, 두 사람의 숙소가 멀리 떨어져 있도록 신경 쓴다거나 식사 쿠폰을 별도의 레스토랑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식당과 교섭한다거나 했던 그 많은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

‘두 사람은 그냥 사이가 나쁜 게 아니라 사랑싸움을 거창하게 하고 있는 거였어.’

안토니오 바트의 윈도우 베이커리는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그리고 엘리자베스 포크너의 베이커리는 파리에 있다.

가게의 경영자일 뿐만 아니라 오너 쉐프이기도 한 두 사람이니 서로 관계를 시작하거나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쉐프님도 힘드셨겠어.’

하지만 키스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알리샤는 손에 들고 있던 마이크를 일부러 떨어뜨렸다.

- 우당탕

그 소리를 듣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있던 심사위원들이 깨어났다.

유난 취가 입가에 흐른 침도 닦지 않은 채 넋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은 아름다워.』

『둘이 서로 초등학생처럼 싸우더니 잘 어울리네.』

십여 년 이상 같은 업계에서 두 사람이 아웅다웅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던 알버트 그림슨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가게를 접고 투스카니나 프로방스로 이사가면 되겠군.』

라이언 윈체스터가 파리와 로마 중간에 있는 작은 도시 이름들을 대면서 킥킥거렸다.

축복해주는 건지 욕하는 건지 알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야기하는 표정을 보면 모두 미소를 짓고 있다.

말투가 세기는 하지만 진심으로 축복하는 모양새다.

쿠당탕

시몬 리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며 접시를 밀쳐, 하얀 도자기 접시가 바닥에 떨어졌다.

와장창

그는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표정으로 냉철하게 쏘아붙였다.

『엘리자베스! 안토니오! 차라리 방을 잡지 그래. 여기서 무슨 짓이야.』

두 사람보다 2, 3년 정도 경력이 많아 선배 연배에 속하는 시몬이다. 그가 야단치자 두 사람은 아쉬운 듯이 떨어졌다.

『이십 년 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고.』

안토니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리자베스가 조그맣게 호호 웃었다.

알리샤는 정말로, 정말로 존경하는 선배님의 연애 사정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하는 학급 반장처럼 딱딱하게 말했다.

『방금 전의 케이크를 맛보시고 다들 이상 반응을 보이셨어요. 마약 검사라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 알리샤! 절대로 그렇지 않아. 이 케이크는 그냥 나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 줄 정도로 맛있을 뿐이야.』

『내가 계속 숨기고 있던 진정한 사랑을 찾게 할 정도로 말이지.』

이중창처럼 동시에 대답한 엘리자베스와 안토니오가 서로 마주 보고 씩 하고 웃었다. 알리샤는 감히 존경하는 선배님을 무시하기로 했다.

『다른 심사위원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주 좋았어.』

『심사를 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야. 내가 이 정도 클래스의 케이크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안 드는군. 이건 케이크가 아니라 작품이야.』

『박물관에 전시하고 수천만 명의 손님들이 감상하도록 해야 한다고.』

『그럼 맛을 못 보잖아.』

『음, 그럼 안 되겠군.』

알버트 그림슨과 라이언 윈체스터가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스테피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진짜 맛있었어요. 다른 말이 생각이 안 나요.』

『여태까지 먹었던 케이크가 4비트 미디곡이라면, 교향곡 오케스트라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었지.』

『사랑이라는 주제를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맛있기까지 했어요.』

『심사를 할 필요도 없다니까.』

◈          ◈          ◈

한국 팀은 제일 먼저 무대에서 내려왔다. 마리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몬 리옹 쉐프, 저런 얼굴도 할 줄 아네.”

“항상 아그리파 석고상같이 굳은 표정을 하고 있던 사람이 저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임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여태까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지음(知音)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저기 저 심사위원 중에서는 극한까지 혀를 연마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맛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알아봐 줄 만한 맛을 보여주는 것이 예의다.

마리오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물었다.

“진혁아, 우리 케이크에 마약 넣은 건 아니지?”

“너도 같이 만들었잖아.”

“그래도 엄청난 반응이었어. 맛있는 게 아니라 맛없어서 그런가 해서 걱정했는데, 빈 접시 보고 안심했다.”

뒤늦게 무대에서 내려온 다른 나라의 팀원들이 말을 걸었다.

“진혁! 무지개 케이크, 굉장하더라.”

『‘로미오와 줄리엣’을 컨셉으로 한 거야?』

『심사위원들이 완전 뿅 갔던데.』

토마스 브라운이 검지를 머리 옆에서 빙글빙글 돌려 보였다. 그 무례한 제스처를 본 브라이언 신이 토마스의 어깨를 쿡 찔렀다.

『톰.』

『알았어, 알았어. 교수님.』

그 호칭에 루이스 강이 물었다.

『교수님?』

『하도 고지식해서 교수님이라고 부르고 있어.』

브라이언 신이 머쓱해 하며 머리를 긁었다.

『별로 그렇진 않은데…. 그보다 임진혁, 마지막에 만든 케이크는 도대체 무슨 맛이야? 보고 있으니까 너무 궁금해지더라.』

『맞아, 그걸 판매할 계획은 없어?』

『따로 팔 생각은 없는데? 나 혼자 만든 게 아니니까 루이스 형이나 마리오하고 의논해야 해.』

마리오가 감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드디어 내 가치를 알아주는구나.』

누가 봐도 ‘여태까지 네 맘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라는 말이 생략된 문장이다. 루이스 역시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진혁이 네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함께 이것저것 실험하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케이크야.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 따르지.』

리처드 베이커가 호탕하게 웃었다.

『훌륭한 팀이야.』

질시하거나 질투하는 기색 없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진혁은 새삼스럽게 미국 팀의 팀원들을 쳐다보았다.

‘평범한 무림대회라면 이쯤 되었을 때 정파의 물정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튀어나와 「감히 너 같은 애송이가 이런 대회에 나와 좋은 성적을 거두다니! 사술을 쓴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면서 칼빵이라도 놓으려고 덤벼야 할 텐데 말이야.’

암기 하나 날아오지 않고, 칼을 든 암살자도 접근하지 않는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때 프랑스 팀의 쉐프 한 명이 다가와, 굳은 표정으로 진혁에게 말을 걸었다.

『임 쉐프.』

진혁은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태까지 한국 팀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순위를 다투고 있던 팀인 만큼, 이쪽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당장 칼이라도 뽑아서 꽂으려고 하면 재미있을 텐데.’

하지만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도, 그렇게 적극적인 녀석들은 없었다.

라이벌을 해치우고 순위를 높이기 위해 암살을 청부한다거나, 경쟁 상대의 신체 일부를 훼손시켜-즉 손목을 분질러 버리거나 혀를 뽑아버리는 정도의 일은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난다.

하지만 현대의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유치원생처럼 순진하고 개처럼 선량하기만 하다. 기껏해야 질투심에 못 이겨 험담 한두 마디를 하는 정도다.

살수 부대의 후보 1명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악의가 부족하고 어리석다.

무림에 떨궈놓으면 한 시간도 못 되어서 죽어버릴 사람들이다.

‘그런 점이 귀엽단 말이지.’

무력적으로는 형편없지만, 제과제빵이라는 세계 속에서는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재킷을 빼앗겨도 화를 내지 못하는 마리오.

진혁이 만들고 싶어 하는 특이한 주제를 어떻게든 평범하게 재탄생시키고 싶어 하는 루이스.

진혁처럼 빠른 속도로 작업하고 싶어서 밤을 새워서 연습하던 리처드 베이커.

친부모와 양부모, 두 쌍의 부모에게 편중되지 않은 애정을 주려고 계속 한국과 미국을 오가고 있는 브라이언 신.

유치원생이 재롱잔치에서 꼬까옷을 입고 파닥거리는 것처럼 재미있고 귀엽다.

진혁은 눈앞에 다가온 프랑스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는 짧은 말로 인사했다

『헤이.』

지금 눈앞에 다가온 조제프 쇠비어 역시 프랑스의 대표로 이 대회에 출전한 만큼, 분명히 제과제빵계에서 떠오르는 신성(新星) 중 한 명이다.

조제프는 결심한 듯이 어렵게 입을 뗐다.

『임 쉐프. 스승님, 아니 시몬 리옹 교수님이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들다니….』

프랑스 팀의 두 사람이 뒤에서 거들었다.

『수염에 크림을 묻히셨지.』

『눈썹에도 조금.』

주느비에브와 필리프였지만, 진혁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조제프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주느비에브가 거들었다.

『스승님은 우리한테도 웃어준 적이 없어. 저렇게 행복해하시는 표정은 물론이고….』

그녀는 아까 전, 시몬 리옹이 맹한 표정으로 얼굴에 크림을 묻히고 접시를 핥고 있던 스크린샷을 보여 주었다.

필리프가 소곤소곤 물었다.

『언제 찍었어?』

『라이브 방송 보고 있던 친구가 캡쳐해서 보내 줬지.』

옆에서 들여다보던 마리오가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진짜 흑역사다. 백 년 동안 이불에서 못 나올 수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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