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01화 (301/656)

제 301화

“버터크림 맛이 나는 퐁당이라니.”

단단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말캉하다.

“까만데 맛있잖아.”

비열하게 생겨서 나쁜 일을 하는 새끼는 악당이고 잘생기고 정의로운 짓 하는 놈은 주인공이다.

검은색 음식은 맛없는 게 당연하다는 명제가 지금 이 순간 산산이 조각난다.

‘어디까지 날 놀라게 할 셈인 건가.’

주영모는 한국 팀을 바라보았다. 멀리 있는 임진혁과 한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한참 평가를 기다리고 있을 경연 참가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이유가 없다.

입가에 검은색 크림을 묻힌 채 주영모는 두 번째 케이크에 포크를 올려놓았다.

다른 심사위원들과 이 맛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크림의 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

타닥, 탁.

정적 속에서 간간이 접시를 두들기는 포크 소리만 들렸다. 말을 잃은 심사위원들 모두 바삐 포크를 움직였다.

두 번째 케이크에서 캐러멜은 낯선 향수에 도전해본 여인처럼 독특한 향을 풍겼다.

『벚나무 장작….』

평상시 캠핑을 즐긴다던 스테피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신음소리처럼 내뱉었다.

캐러멜에 스며들어 있는 낯설고 우아한 향기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었던 라이언 윈체스터가 탄성을 질렀다.

『체리 우드(Cherry wood) 장작은 장작 중에서도 희귀하고 고급스러운 재질로 유명하지. 나도 실제로 태워본 적은 없는데.』

사랑을 알게 된 여인은 한결 더 깊이 성숙해지며,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씁쓸하기만 하던 다크 초콜릿은 카카오의 함량이 줄었는지, 조금은 더 달콤해졌다. 험난한 세상을 떠돌던 남자는 드디어 사랑을 알게 되었다.

『…씨실과 날실로 엮어, 케이크에 주제를 아주 탄탄히 새겼어.』

이 상태로라면 앞으로 다른 케이크들이 어떤 맛을 낼지도 대강 예측할 수 있다.

‘캐러멜은 점차 쓴맛을 품게 되겠지. 장작의 향뿐 아니라 아몬드나 피스타치오 같은 견과류를 포함시키면 될 거야. 그리고 초콜릿은 점점 더 카카오 함량이 낮아져서 달아지겠지.’

최종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케이크가 어떻게 될지도 눈에 보인다. 캐러멜과 초콜릿은 원래 아주 잘 어울린다. 주영모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후보군을 떠올렸지만, 최종적으로 단 하나를 떠올렸다.

“솔티드 캐러멜 초콜릿 무스….”

솔티드 캐러멜 초콜릿 무스(Salted Caramel-Chocolate Mousse)는 강렬한 초콜릿 맛이 느껴진 후 희미하게 캐러멜의 달콤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무스 케이크다.

설탕이 녹아 아름다운 연갈색으로 변하며 호박빛을 띠는 캐러멜이 될 때까지 곱게 끓이고, 유지방이 풍부한 크림과 초콜릿 조각을 넣어 굳힌다.

주영모의 시그니쳐 레시피다.

‘내 명예를 드높여 주려고, 내 시그니쳐 메뉴를 고른 게 분명해.’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제자로 들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선보일 수 있게 제대로 가르쳐주려고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원석이라도 가공을 거치지 않으면 보석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 원석은 제멋대로 뛰어갔다가 날아오르더니 제멋대로 몸을 들이댔다. 어디서 깎였는지 멋지게 브릴리언트 컷을 한 채다.

주영모라는 세공사의 시그니쳐 브릴리언트 컷이다.

‘시몬 리옹 놈은 대회를 할 때마다 제자를 두세 명씩 꼬박꼬박 내보내는데 나는 제자도 한 명 없이….’

가슴이 절로 벅차올라, 그는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비록 자신의 주방에서 앉혀 놓고 가르친 적은 없지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로 제빵을 배웠다. 시기가 조금 다를 뿐이다.

‘이것도 인연이니까 이 대회가 끝나면 꼭, 다시 제안을 해봐야겠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주저 없이 가르쳐 주고 싶어, 마음을 다시 다졌다.

“츄릅.”

그는 두 번째 케이크를 핥듯이 삼켰다.

조금 더 달콤하게 변한 초콜릿은, 조금 전에 맛본 초콜릿과 아예 궤가 달랐다.

생산지 자체가 다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초콜릿 맛 후에 희미한 꽃 향이 남았다.

생크림의 양이 담뿍 줄어들었는데도 체리 우드의 잔향과 꽃 향이 서로 아주 잘 어울렸다.

순식간에 접시를 비워버린 주영모는 코카인에 중독된 중독자처럼 손을 뻗었다.

“더, 더 먹고 싶다.”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처음 먹은 케이크도, 두 번째 먹은 케이크도 비슷하지만 다르다.

캐러맬과 초콜릿은 둘 다 풍미가 강렬하고 몰아치는 맛이기에, 자꾸 먹으면 질린다.

하지만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여 자꾸 손이 갔다.

그렇게 케이크에 몰두한 것은 주영모만이 아니었다.

『벌써 세 번째 케이크라고? 내가 두 개나 다 먹었단 말이지. 이제 5개밖에 남지 않은 거야….』

홀린 듯한 표정으로 스테피가 새로운 접시를 끌어당겼다.

세 번째 케이크는 한없이 하늘색에 가까운 파란색이었다.

『색감이 참 좋아.』

라이언 윈체스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케이크가 어떤 색인지 꼼꼼히 따져보았다.

누군가 가을 하늘에 푸른 물감을 쏟아부어 하늘을 좀 더 진하게 만들어버린다면 이런 색깔일 것이다.

블루 큐라소처럼 선명한 파란색이 점점 더 옅어져 가는 과정은 연금술사의 시험관에서 한 조각 가져온 것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조색을 아주 잘 했어. 파란색 색소로 이렇게까지 색깔을 내기는 어려울 텐데 말이지.』

『쨍한 원색을 내는 건 쉽지만 말이에요. 수채화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섬세한 톤 조절이 아주 아름답군요. 그림자 인형이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완벽한 색깔이에요.』

『새까만 그림자 인형은 입체적이라서 그 뒤에 그림자가 져. 그 그림자의 길이 역시 케이크의 단마다 다른 걸 보면 무대 위의 조명까지 고려해서 인형을 입체적으로 디자인한 게 분명해.』

맛있는 것을 먹으니 기분이 좋다. 저절로 칭찬이 흘러나온다. 극찬하는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몬 리옹이 한 마디 던졌다.

『캐러멜과 초콜릿 케이크는 잘 만든다고 얘기해줄 수 있겠네.』

그것은 까다로운 그가 좀처럼 하지 않는, 칭찬에 가까운 말이었다.

혼자 벌써 다섯 번째 케이크까지 흡입하면서, 황홀경에 빠져 있던 주영모는 그 말을 듣고서 현실로 돌아왔다. 케이크를 맛보느라 바빠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그는 시몬 리옹에게 쏘아붙였다.

『어디 다음 케이크까지 먹어보고서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지 두고 보지.』

시몬 리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 끝과 입술 언저리, 그리고 수염에 초콜릿 자국을 묻힌 채로 네 번째 접시에 손을 가져갔다.

라이언 윈체스터가 감탄을 토했다.

『세 번째 케이크는 캐러멜이 초콜릿을 휘감아버렸어. 남자가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버려서 자신을 잃어버린 거지. 재미있네.』

『네 번째 케이크는 초콜릿이 훨씬 더 진해, 그러면서도 맛있어.』

『이걸 만들려면 초콜릿과 캐러멜을 수천 번 조합해 봤을 게 분명해요.』

초콜릿과 캐러멜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지점.

그러면서도 서로의 맛을 잃지 않고 맛있는 포인트.

그것을 일곱 번이나 만들어냈다.

세 번째 케이크와 네 번째 케이크를 맛보면서는 대화라는 것을 약간 했다.

하지만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케이크에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사회자로서 심사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 엘리자베스 포크너와 안토니오 바트조차 말이 없었다.

심사위원 측에 있는 마이크 모두, 딸각거리는 포크 소리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우물거리는 소리만을 내보냈다.

실시간 라이브 방송이니만큼 흐름이 끊기는 것은 곤란하다.

‘뭔가 말 좀 해 봐요!!’

방송 PD는 보조 진행자, 알리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무인도에 조난된 여행자가 우연히 지나가는 배에게 자신을 봐달라고 외치는 것처럼 절박한 구조 신호였다.

대회 진행도 중요하지만, 방송에서 어느 정도 대회를 홍보하는 면도 필요하다.

또각또각

알리샤는 눈에 띄게 하이힐 소리를 내며 심사위원들 앞을 걸어 다녔다. 마이크에 소리가 잡히지 않게, 카메라를 등진 상태로 입술을 벙긋거리며 다른 사람들을 불렀다.

‘엘리자베스 쉐프님, 안토니오 쉐프님!’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각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엘리자베스 포크너는 양어깨에 힘을 빼고 양팔을 늘어뜨린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커진 동공은 흔들리지 않고 천장 너머 어딘가를 주시한다.

안토니오 바트는 반대로 접시에 코를 박고 있었는데, 접시 너머로 게이트를 열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버릴 것처럼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안토니오 쉐프에게 뇌의 병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간질 발작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 알리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안토니오 바트 쉐프님, 괜찮으세요?』

『…건드리지 마, 지금 이 맛을 음미해야 해.』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어 보면 정신이 나간 것 같지는 않다. 알리샤는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카메라가 이 두 분이 아니라 다른 방향을 비춰야 해.’

품위를 잃은 두 사회자가 아닌, 다른 심사위원들을 보여주어야겠다.

고개를 돌린 알리샤는 멈칫했다.

‘한국 팀이 케이크에 코카인이라도 넣었나?!’

이런저런 농담을 지껄이며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여야 할 알버트 그림슨이 동상처럼 굳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앉아있다. 양손은 포크와 나이프를 쥔 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항상 냉정하고 여유가 있던 라이언 윈체스터는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무어라 입술을 달싹거린다. 귀신에 씐 것처럼 무서운 광경이었다.

스테피 라자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벅지 위에서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유난 취는 입술 아래로 주르륵 흐르는 침을 닦지도 않고서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주영모는 바보같은 미소를 띤 채 양손을 놓고 의자에 기대어 있다.

심사위원 모두,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제과제빵 계의 우수한 페이스트리 쉐프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약 재활 시설에서 금단 증상을 겪고 있는 환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알리샤는 마지막 기대를 품고 시몬 리옹 쪽으로 걸어갔다.

‘교수님이라면 이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을 해주실 거야.’

맛에 까다롭고 미각이 예민한 그라면,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 시몬 리옹, ‘맛의 마술사’마저 알리샤의 믿음을 배신했다.

할짝할짝

개처럼 접시를 혀로 핥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겼다. 알리샤는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카메라맨이 다른 방향을 찍도록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무대 양쪽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에 이미 전부 비추어져 버렸다.

멍한 눈동자에 헝클어진 머리, 수염 끄트머리와 코끝에 초콜릿인지 캐러멜인지 알 수 없는 검은색 크림을 묻힌 모습이 전 세계에 그대로 방송되어버렸다.

절대로 제과제빵계의 원로이자 재능있는 제자를 키워내는 교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알리샤는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시, 심사위원분들께서 토론을 해서 최종 발표를 하시기 전까지 잠시 휴식 시간을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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