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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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케이크를 절반으로 자르자 촉촉한 생크림과 농후한 캐러멜, 그리고 희미한 초콜릿의 향기가 훅 끼쳐왔다. 시몬 리옹의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고작 이런 맛으로 남녀의 사랑을 묘사한다니 안이해.’
캐러멜이나 초콜릿, 생크림은 너무나 기본적이고 흔한 재료다. 티무트 페퍼처럼 희귀한 재료로 독특한 맛을 내더라도 부족할 수 있는데 어째서 이런 기본적인 재료를 고른 걸까. 배합 자체도 무난하기 그지없다.
‘앙트르메까지는 꽤나 솜씨를 보여주는 듯 싶었는데 여기 까진가.’
시몬 리옹은 포크를 들어 거칠게 케이크를 갈랐다. 초콜릿 케이크 시트가 두부처럼 무너지며 탱글탱글한 크림이 뭉실하니 비어져 나온다.
『…어라?』
그리고 강렬한 캐러멜 향이 굴뚝의 연기처럼 솟아올랐다. 그가 생각했던 종류의 탄 설탕 같은 향이 아니었다. 가을밤, 어머니와 함께 태우던 사과나무 장작 내음이 은은하게 흐르는 캐러멜 향이다.
전신의 솜털이 바짝 솟았다.
단순히 ‘캐러멜’이라고 들었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향이다.
‘가스 불이 아니라 장작불을 사용해서 캐러멜라이즈를 했어.’
보기만 했을 때는 그저 조금 색깔이 예쁠 뿐인 보랏빛 케이크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 걸음 다가와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성을 들인 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
시몬 리옹은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저도 모르게 목구멍 너머로 꿀떡꿀떡, 긴장과 함께 침을 삼키게 된다. 저절로 왼손을 주먹 모양으로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포크를 꽉 쥐었다.
나이프가 필요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갈라지면서도 케이크 시트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케이크는 빵보다 초콜릿의 비중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케이크 시트보다는 캐러멜 무스에 가까워.’
다크 초콜릿 시트는 아주 얇게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캐러멜이 있는 층이 아주 촘촘하다.
시몬 리옹은 포크를 내려놓고 스푼을 들었다. 은빛 스푼에 짙은 흑갈색 케이크 조각을 함빡 떠서 경건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성당에서 신부에게 성체를 받는 것처럼 신실한 동작이었다.
제일 먼저 입술에 닿은 것은 너무 달지 않은 퐁당이였다. 색깔을 표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부피감을 가진 퐁당은 놀라우리만치 얇았다. 거기에 놀라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바로 캐러멜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향기만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존재감을 가진 캐러멜 그 자체였다. 쫀득하지만 기포를 가득 품어 이에 달라붙지 않는다.
‘아니야, 이건 캐러멜 슬라이스가 아니야. 캐러멜 무스도 아니고. 제대로 만든 캐러멜 케이크야.’
모짜렐라 치즈처럼 늘어지지 않는다. 그는 깔끔하고 산뜻한 캐러멜 시트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을지 떠올려 보았다.
연유와 버터, 비정제당 사탕수수를 섞어 만들었다는 캐러멜. 거기에 어떤 종류의 밀가루를 섞어 이런 맛을 냈을지 대략은 알겠다. 하지만 그 비율은 추측할 수가 없다.
‘수도 없이 실험을 되풀이했겠군.’
최적의 비율을 만들기 위해서 밤을 새워 연습했으리라.
대회의 마지막 순간에 내놓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캐러멜 시트는 만들기 자체가 어려운 종류의 케이크는 아니다. 캐러멜 슬라이스 역시 만드는 방법 자체는 쉽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열을 적절하게 조절하기가 어려우며 재료의 배합 비율을 맞추는 것이 까다롭다. 그 와중에 이 맛에 향까지 포함하기 위해서, 수많은 나무를 태우며 가장 잘 어울리는 향기를 찾았을 것까지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학생이라면 정말로 가르칠 맛이 나겠어.’
그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한 번, 혀를 굴렸다.
귀공녀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캐러멜 맛이다.
그리고 폭풍처럼 달콤한 초콜릿이 순식간에 그 맛을 뒤엎었다.
『?!』
여름밤 드높이 떠 있는 창백한 달.
차가운 달처럼 멀고, 늦여름 잊힌 첫사랑처럼 쓰다. 피처럼 진한 다크 초콜릿은 이 사이에서 부드럽게 녹아 사라진다. 달지 않고 차갑다. 씁쓸하지만 보들보들하다. 상반된 두 가지의 감정이 쉴 새 없이 파도처럼 휘몰아쳐, 사랑스러우며 동시에 증오스럽다.
사과나무 장작의 향기나, 사랑스럽게 달콤한 캐러멜 따위는 이미 전부 잊어버렸다.
남은 것은 쓰고 차가운 초콜릿뿐이다.
『흐읍.』
숨을 들이마시자 마지막으로 남았던 생크림이 혀를 감싸 안았다. 지방이 풍부한 만큼 고소한 크림은 캐러멜과 초콜릿의 잔향에 휘감겼다. 봄날 햇빛을 받은 얼음처럼 순식간에 녹아 없어진 크림이 아쉬워,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혀로 핥았다.
‘남자와 여자. 흑과 백. 백 대신 갈색을 잡았나….’
놀라울 정도의 맛과 그 맛이 담고 있는 함의(含意).
적나라하지 않고 우아한 은유는 그가 생각하는 철학적인 제과에 깊이 와닿았다.
흰 수염 아래 주름진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인다. 뺨이 부풀었다가 움푹 들어간다. 접시째 잡아먹어 버릴 것 같은 시선이 케이크를 응시하며, 양 눈의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오른손이 다시 움직여 스푼을 쥔다. 은색 스푼은 다시 한 번 갈색 케이크를 담아 빛을 잃었다.
◈ ◈ ◈
시몬 리옹을 보고 있던 임진혁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첫 번째 케이크 반응이 아주 좋아.”
“넌 여기서 심사위원들 얼굴이 다 보여?”
당연히 다 보인다. 원한다면 얼굴에 있는 모공 하나하나까지 다 세어줄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 잘 적응한 진혁은 다른 방식으로 대답했다.
“접시만 봐도 알 수 있지. 마지막 케이크라서 배부를 텐데도 남김없이 깨끗이 비우고 있잖아.”
심지어 아직 첫 번째 케이크에 불과하다. 두 번째 케이크에 짐승처럼 달려들고 있는 심사위원도 있고, 포크를 놓고 잠시 멈추어 있는 이도 있다. 루이스가 눈을 가늘게 떠서 멀리 바라보려고 하며 말했다.
“…잘 안 보이는데. 지금 포크 내려놓고 두 번째 케이크 안 먹고 있는 사람도 있어. 반응이 안 좋은 건가?”
아까까지 여유 있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조금은 초조해하는 모습이다. 안절부절못하는 형을 본 마리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어.”
“캐러멜이나 초콜릿이 취향이 아닌 심사위원일 수도 있잖아.”
“저건 그냥 두 번째 케이크를 맛보는 게 아까운 거야.”
“응?”
“먹으면 없어져 버리잖아. 아까워서 뜸 들이는 거라고.”
“…넌 어떻게 알아?”
“나도 좀 전에 케이크를 한참 동안 입에 물고 있었잖아. 삼켜서 식도로 넘어가면 다시 맛을 못 보니까….”
이러다가는 정말로 임진혁의 케이크를 먹겠다며 한국까지 가서 취업하고 정착해버릴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심한 동생 녀석의 어깨를 두들겼다.
“야, 이 케이크에 환장한 놈아!”
철썩하는 소리가 났다. 마리오가 고개를 발딱 들며 외쳤다.
“아얏! 왜 때려!”
“더러운 소리 하지 말고 집중해. 우리 팀 심사 중인데.”
“…내가 심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결과만 기다리는 건데.”
마리오는 조그만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도 형의 말을 따랐다.
진혁은 강 씨 형제보다, 심사위원들 측에 더 관심을 두었다.
“첫 번째 케이크를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군.”
예측하고 있었던 그대로다.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팔짱을 끼었다.
“이제 그림자 인형을 먹어 보라고.”
심사위원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마리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아! 그것도 맛있을 거야!”
◈ ◈ ◈
주영모는 그림자 인형 조각을 포크로 쿡 찔렀다.
‘솔직히 이건 맛없을 것 같은데.’
그는 오징어 먹물 스파게티나 짜장면처럼 검은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검은색은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게 만든다.
초콜릿의 흑갈색이나 잘 끓인 커피의 은은한 갈색과는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에 먹었던 연한 보랏빛 케이크는 지금 당장 무대 위로 뛰쳐 올라가 임진혁과 함께 왈츠를 추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그는 진혁이라는 자가 한국에 태어나서 대표가 되어 파리에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슴 깊이 감사했다.
이런 케이크를 만들어내는 페이스트리 쉐프가 존재한다.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크나큰 축복이며 쿠프 드 몽드의 심사위원들에게도 놀라운 행운이다.
그는 포크 끄트머리로 인형 조각을 눌러보았다. 분명히 퐁당으로 만들었을 인형 조각은 포크에 눌려 부드럽게 뭉개져 버렸다.
“퐁당으로 만든 게 아니야?”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퐁당은 보통 달기만 할 뿐, 맛이 없는 편이다.
‘아까 케이크에 씌운 퐁당은 색깔만 낼 수 있도록 일부러 얇게 만든 것 같았는데. 이건 왜 이렇게 두껍지? 포크도 푹 들어가고.’
색깔은 검은색인데 은근히 바닐라 향을 풍긴다. 언뜻 버터 향 역시 섞인 듯싶다. 주영모는 신중하게 포크를 움직였다. 새끼손가락 손톱의 절반만큼, 지극히 적은 양의 인형 조각을 묻혀 입으로 가져간다.
“…!!”
은은한 바닐라 빈 향이 콧구멍을 간지럽힌다. 놀란 주영모는 바로 포크를 혀로 핥았다.
새까만 그림자 인형 조각에서는 놀랍게도, 바닐라 버터크림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