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98화 (298/656)

제 298화

“…이건 엄청난데?”

저절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초콜릿이다. 아주 진한 초콜릿만을 골라 압축한 것이 분명하다. 케이크 시트 반죽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초콜릿 그 이상을, 어떻게든 욱여넣었다.

그래서 이렇게 폭발하는 듯 강한 산미의 초콜릿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르헨티나산 싱글 오리진이라더니.’

주영모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싱글 오리진 카카오 원두를 몇 개 떠올려 보았다. 그는 초콜릿 전공이 아니지만,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만큼 접한 것은 적지 않았다.

같은 원두라도 어떤 습도와 온도에서 어떤 방법을 사용해 발효시켰는지, 건조 기간을 얼마나 거쳤는지에 따라서 맛이 급격하게 달라진다.

그래서 반복해서 같은 원두를 접하지 않은 이상 아무리 미각이 예민하다고 해도 맛만 보고 원두를 구별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원두는 어딘가 익숙했다.

그윽한 꽃내음이 확 하고 풍겨온 다음에는 떫은맛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떫은맛은 신 과일의 껍질이 아주 잠깐 입술에 닿은 것처럼 가볍게 금방 지나 가버린다. 그리고 나서는 조금 전에 무슨 맛이 있었냐는 듯 상큼하고 농후한 초콜릿 향이 뭉클하니 올라온다.

혀 위에서 개구리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처럼 경쾌하게 달다.

“레드 플라워?”

그는 자신이 이름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아르헨티나산 카카오 원두를 입에 담았다.

『레드 플라워?』

공교롭게도 시몬 리옹 역시 같은 이름을 입술에 올렸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필 저 녀석이랑.’

주영모가 어깨를 으쓱하는데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서류를 뒤적이며 미소지었다.

『맛만 보고 레드 플라워를 구별할 수 있다니 대단하네요. 꽤 희귀한 초콜릿이라 저도 한두 번밖에 먹어본 적이 없는데.』

『쇼콜라티에 로랑 녀석이 환장하는 초콜릿이니까.』

시몬 리옹이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주영모가 수긍했다.

『아, 거기서 봤군.』

재능있는 쇼콜라티에이자 초콜릿 쇼피스 작품들을 전시하는 갤러리 경영자인 로랑은 주영모와 오랜 친분이 있다. 유럽 각 지역의 풍미 있는 초콜릿 디저트나 초콜릿 앙트르메 레시피를 정리해서 한국에 소개할 때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

‘로랑이 시몬 리옹과도 친분이 있었군.’

이 바닥이 좁긴 좁다.

주영모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확실히 카카오 열매의 맛을 그대로 살려내며 더욱 깊게 연출한, 좋은 초콜릿 케이크였다.

하지만 조금 더 아름답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플라워 케이크의 주제는 뭐라고 하던가?』

단순하고 깔끔한 퐁당 케이크에-아무리 아름답다고는 해도 꽃송이를 무럭무럭 매달아 놓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꽃봉오리가 점차 벌어지면서 활짝 피어오르며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장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변화와 성장’이라…. 그렇기엔 너무 평범한 플라워 케이크 아니야? 꽃 케이크는 이미 십 년 전부터 웨딩이나 연회, 생일잔치에서 유행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이전부터 크림이나 퐁당, 이소말트나 웨이퍼 페이퍼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플라워 디저트를 만들어 왔다.

가장 기본인 활짝 핀 장미꽃부터 시작해서 카네이션과 작약, 국화와 애플 블로섬에 아네모네와 리시안서스, 소국과 프리지아, 동백과 스카비오사, 라일락 등 소재로 삼는 꽃은 많고도 많다.

그래서 주로 사용하는 꽃, 꽃을 배열하는 방식, 사용한 재료와 색깔 조합을 보면 페이스트리 쉐프의 스타일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지금 나카무라가 내놓은 플라워 케이크는 퐁당을 사용해 장미꽃을 만들었다. 연분홍빛 장미 꽃봉오리가 활짝 핀 분홍빛과 붉은색 장미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흰색과 분홍색, 붉은색이라. 안전, 그 자체지. 재미가 없어.』

『길거리에 있는 어느 빵집을 가도 화이트에 핑크 꽃장식이 있는 케이크를 팔 거라고.』

유난 취와 스테피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레드 플라워 초콜릿을 사용하면서 붉은 꽃을 도안했지. 초콜릿 맛도 괜찮고, 나쁘지는 않아. 좀 더 도전적이고 다양한 색 배합을 시도해도 좋았겠지만 말이지.』

주영모는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진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반복되었단 이야기야.』

드물게 시몬 리옹이 편을 들었다. 반면에 알버트 그림슨은 두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색깔뿐 아니라 디자인도 진부해.』

『한때는 케이크 전체를 꽃 모양으로 뒤덮는 디자인이 유행했지. 그리고 커다란 꽃 몇 송이만 사용하는 방식 역시 따라왔어. 그리고 꽃장식이 나선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장미 덩굴처럼 케이크를 감고 올라가는 형식이 다시 나왔지. 지금 이 케이크는 가장 마지막 양식을 지루하게 모방했을 뿐이야. 그나마 꽃을 배치할 때 봉우리와 덜 핀 꽃, 그리고 .』

라이언 윈체스터가 혹평을 내놓는 동안 주영모는 문득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대회에 쇼콜라티에 로랑 놈도 왔던가? 항상 갤러리에 놓을 개성적이고 다양한 초콜릿 쇼피스 작품들을 찾아서 헤매는 녀석이니, 임진혁이를 소개시켜 주면 되겠군. 파리에 언제까지 머물려나?’

그가 알기로 로랑의 초콜릿 갤러리에는 한국인이 출품한 작품이 놓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번 기회에 하나 늘어나도 좋을 것이다. 주영모는 마음속으로 주판을 튕기며 헤벌쭉 웃었다.

‘좋아, 좋아.’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주영모에게 알리샤가 다가와 재촉했다

『주영모 쉐프, 채점표를 부탁드립니다.』

『잠시만요.』

황급히 미리 생각해두었던 점수를 휘갈겨 쓰자, 알리샤가 가져갔다.

이후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었던 다른 케이크들 몇 개의 심사가 끝났다.

『이번에 심사할 팀은 프랑스입니다!』

엘리자베스 포크너의 선언에 안토니오 바트가 덧붙였다.

『강력한 우승 후보죠!』

『프랑스 팀의 케이크가 기대되는군요.』

알리샤가 높은 7단 케이크가 담긴 케이크를 끌고서 앞으로 나섰다.

선명한 원색 케이크였다.

한때 유행했던 레인보우 케이크와도 비슷한, 선명한 보랏빛이 제일 1층에 자리했다.

그리고 남색, 파랑, 초록, 노랑에 주황, 마침내 제일 위층에 있는 적나라한 빨강색까지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깔이 오색찬란하게 빛난다.

조제프 쇠비어가 심혈을 기울여 한 데코레이션은 현란한 원색 배경에서 끝나지 않았다.

보라색 배경 속에서 검은 그림자 아기는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오븐에 손을 뻗는다.

남색 배경 속의 어린이는 오븐 앞에서 빵을 먹는다.

초록 배경 속 십 대 소년은 제빵사 모자를 쓰고 빵 트레이를 나른다. 색깔이 점점 더 밝아지면서 어른이 된 남자는 다양한 모양의 빵을 구워낸다.

붉은색 배경을 뒤로 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은 바게트 하나를 옆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오븐을 바라본다. 그 오븐 옆에는 노인의 소년 시절과 똑 닮아있는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다. 어린 소년은 오븐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데 그 모양이 보라색 케이크 위에 있었던 자신의 할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 저희 팀은 ‘노인과 오븐’이라는 이야기를 케이크에 담았습니다.』

이 동화처럼 짧은 이야기를 위해 조제프 쇠비어가 선택한 방식은 아주 특이했다.

그는 검은색 식용 필름을 잘라내 케이크 위에 붙이지 않았다. 검은색 식용 색소로 케이크를 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새까만 초콜릿 케이크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워내고, 원색 퐁당을 만들었다.

얇게 잘라낸 원색 퐁당에서 인형과 오븐 모양을 잘라내고, 그 퐁당을 그대로 케이크에 입혔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조제프 쇠비어가 설명을 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 케이크가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노인과 오븐이라.』

시몬 리옹이 짧게 내뱉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제자들이 제출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레이어드 브라우니, 오레오, 초콜릿과 땅콩버터, 초콜릿 시나몬, 레드 벨벳, 라즈베리 크림과 더블 초콜릿, 그리고 초콜릿 에스프레소 케이크로 마무리했습니다.』

즉, 일곱 가지의 서로 다른 케이크 반죽을 만들고 성공적으로 구워냈다는 이야기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7가지 전부를 맛보아야겠군요?』

『물론입니다, 마담.』

알리샤는 케이크가 잘 보이게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서, 아주 가느다란 조각을 세밀하게 잘라냈다.

◈          ◈          ◈

대한민국, 서울.

이른 아침 시간.

망원에 있는 작은 베이커리 <해와 달>은 영업 중지 간판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게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거 우리 형네 케이크 짝퉁 아니야?”

공식적으로는 학교의 극기훈련 프로그램에 와 있는(유일봉이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도을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친구네 집에서 하루 잔(사실은 ‘해와 달’에서 밤을 새웠다) 이재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고운 말, 고운 말.”

“재희 누나, 지금 내 말투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이거, 이거 보라고.”

김도을은 조금 전에 캡쳐한 스크린샷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한국 팀 케이크도 무지개색 배경이란 말이야.”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다른데? 무지개라고 해도 한국 쪽은 파스텔톤이고, 층마다 그라데이션을 사용했잖아. 저쪽은 완전히 원색이고.”

두 사람이 노트북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데, 뒤에서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같은 무지개 컨셉에 그림자 인형극이라니,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겠군요.”

정지숙이 서늘하게 미소지었다. 이재희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림자 인형극이요?”

그녀는 정지숙이 어려웠다. 같은 진바라기 팬클럽이라고 해도, 평회원과 운영자는 급부터가 다르다. 더군다나 정지숙은 항상 고급 정장을 입고 다닐 뿐만 아니라 운전사와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녔다.

‘말로만 듣던 강남 복부인이 이런 분인가?’

이재희가 엉뚱한 오해를 하는 동안 정지숙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마저 설명을 했다.

“제 아들의 생일 파티를 할 때 임진혁 쉐프님도 참석하셨죠. 그때 그림자 인형극을 처음 보셨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다고 하셨어요. 아마 프랑스 팀도 같은 컨셉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모양인데….”

백진영이 손뼉을 딱 쳤다.

“그러네. 단색 배경에 그림자 인형을 올리면 케이크가 너무 수수해지니까 무지개색을 생각한 거구나.”

“예, 어느 팀이건 일부러 따라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심사위원들이 쓸데없는 오해를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백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극 케이크도 아주 예쁩니다. 이게 다 정지숙 여사님 덕분이군요. 밀실 살인 사건 현장 쿠키 하우스 시리즈 같은 것보다 훠얼~~씬 낫네!”

“호호호.”

“진영 오빠, 왜 그래. 밀실 살인 사건 현장 쿠키 하우스가 어디가 어때서! 맛있기만 하구만. 아예 그거 매니아층도 생겼다며.”

하루 휴가를 내고 놀러 와서 같이 보고 있던 김가영이 거들었다.

“그래, 그건 그런데….”

진혁이 대신 이곳에 와 있던 유일봉은 오픈 키친에서 밀대로 반죽을 밀고 있었다. 그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제빵에 집중하던 중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거대한 스크린을 보자, 마침 임진혁이 화면에 잡히고 있었다.

그는 전혀 긴장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며 평소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진혁이 형….”

“진혁아!”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제각각 진혁의 이름을 외쳤다.

그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다.

머리에 쓴 하얀 조리모는 구김 없이 깨끗하고, 머리카락 한 가닥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왼쪽 가슴 위에는 대한민국 국기가 조그맣게 수 놓여있고, 이니셜이 알파벳으로 새겨졌다.

심사위원들이 프랑스 팀의 케이크를 맛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임진혁은 마치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아니, 왜 남의 케이크가 칭찬받고 있는데 자기가 우승한 것처럼 웃고 있대?”

“그러게. 다른 사람 케이크를 보기만 해도 맛볼 수 있는 초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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