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97화 (297/656)

제 297화

‘하지만 더 잘했으면 좋았을 테지.’

시몬 리옹을 좋아하지 않지만, 간만에 그가 한 평가에 동의했다.

슈가 다이아몬드는 아주 좋았다. 수십 개의 이소말트를 기포 하나 없이 말끔하게 보석 모양 틀에 부어낸 솜씨는 최고다.

아예 슈가 쥬얼리 전문으로 나가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재주였다.

하지만 메인인 케이크의 맛이 아주 조금 아쉬웠다.

‘레몬을 썼으면 레몬 맛을 내야지.’

주영모는 펜을 들어, 점수표에 체크를 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한쪽 방향을 보았다. 무지갯빛 그라데이션을 자랑하는 높은 케이크다. 주영모는 당장이라도 그 케이크를 잡아먹을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빨리 먹어보고 싶은데.’

그는 고개를 돌려 케이크 쪽에서 좀 더 왼쪽,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그 케이크를 만든 이들이 있는 한국 부스다. 한국 팀원들이 서로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케이크 조각을 앞에 놓고 격렬하게 토론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강 씨 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있고 옆에 임진혁이 서 있다.

‘이번 한국 팀은 정말로 훌륭해. 이미 제출한 케이크를 두고서 저렇게 열심히 의견을 교환할 정도로 열성적이고.’

새로운 세대가 실력을 보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두근거리면서도 조금은 씁쓸하다. 주영모는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한때는 나도 저렇게 주목받는 신예로 불렸는데 말이지.’

『주영모 쉐프님, 점수표를 제출해주세요.』

『아, 여기 있습니다.』

안토니오 바트가 제비를 뽑았다. 그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째로 심사를 받을 팀은 어디일까요?』

그가 얇은 제비를 펄럭이자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받아들었다.

『미국, 미국입니다!』

리처드 베이커가 미국 부스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심사도 빨리 받는 게 낫지.』

브라이언 신과 토마스 브라운이 옆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같이 서 있었다.

알리샤가 카트째 케이크를 끌어왔다.

『오오오!』

‘자유롭고 달콤한 여신상’.

수줍은 자세로 서 있는 여신상은 잠깐 일을 쉬고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명을 받은 검은 버터크림은 광택 없는 표면을 담담하게 드러냈다. 완전히 새까만 케이크는 무대 조명을 모두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블랙 버터크림 아이싱을 올리고 검은 퐁당을 씌운 블랙 케이크다.

겉만 검을 뿐만이 아니라 속까지 검다.

미국 팀은 이 푸딩처럼 촉촉한 케이크 안에 심지를 넣어 가까스로 여신상의 모양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부드럽고 탱글탱글한 블랙 케이크로 완벽하게 조각 같은 모양을 만들기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이전에 만든 초콜릿 조각에 비교하면 확실히 조형적 완성도는 떨어진다.

하지만 이 완벽한 검은색 케이크에는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리처드 베이커가 웃으면서 짧게 소개했다.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를 사용해서 만든 슈가 크래프트 블랙 케이크입니다. 블랙 케이크 재료로는 블랙베리와 포도, 자두, 버찌, 무화과 등 과일 말린 것을 사용했습니다.』

짧고 간단한 설명에 심사위원들이 납득했다.

『과연.』

『겉과 속이 전부 검군요.』

알리샤가 케이크를 빙글 돌려 심사위원들 앞에 보여주었다.

『저는 조형을 칭찬하고 싶군요. 어설픈 것 같은 시도가 더 매력적이에요. 피카소 같은 명인이 붓질한 스케치 같아 보인달까?』

스테피가 말을 꺼내자 다른 이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어설픈 걸 의도한 게 아니라, 그냥 실력이 부족한 거 아닌가 싶은데.』

시몬 리옹은 조형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 대해서 언급했다.

『검은색이 식욕을 돋우는 색깔은 아닌데 말이지. 이번에는 유난히 검은색이 많군.』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웃으면서 말했다.

『초콜릿은 검지만 맛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저 여신상이 검은색일 필요는 없잖아? 초콜릿 쇼피스도 아니고 말이지.』

『보통 회색이나 짙은 회색은 많이 하는데, 이렇게까지 까맣게 만든 건 처음 봐요.』

칠흑보다 검은 케이크는 오색찬란하고 알록달록한 다른 케이크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여신상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확실히 단순함에서 오는 우아함이 있어.』

『저는 너무 예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맛은 어떨까?』

알리샤는 케이크의 맨 아랫단을 잘랐다.

새까맣기만 했던 케이크는 안쪽도 검었다.

레이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냥 블랙 케이크다. 얇은 퐁당 한 겹, 그리고 그 아래에 두껍게 발린 버터크림 아이싱이 바깥쪽에 보이지만 그뿐이다.

『브라우니 케이크처럼 레이어가 없네.』

알버트 그림슨이 간단하게 소감을 말했다.

『브라우니 케이크는 이렇게 치밀한 조직이 아닐 텐데? 샹티이 크림을 생크림이라고 할 사람일세.』

시몬 리옹이 핀잔을 주었다.

『흥.』

알리샤는 그런 대화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빵칼을 내리쳐 한 조각씩 잘라 접시에 올린다. 무대를 보조하는 다른 직원들이 심사위원들 앞에 접시를 갖다 주었다.

유난 취는 방금 받은 새까만 케이크의 냄새를 맡았다.

『이런 식으로 새까만 케이크는 보통 초콜릿 향을 내는데 말이지. 진한 포도주 향기가 나서 독특해.』

『블랙 케이크를 처음 먹어보는 사람도 아니고. 왜 그래?』

『흔히 접할만한 케이크는 아니긴 하지.』

『저희 집에서는 일 년에 세 번은 먹었어요.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결혼식!』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웃으며 말했다.

『결혼식이 일 년에 한 번씩 있었단 말이야?』

『친척이 많으니까요.』

『미국식 결혼식은 무조건 화이트 레이어 케이크를 쓰는 줄 알았는데.』

『저희 집은 대대로 블랙 케이크를 만든답니다. 증조모님 때부터 전통이에요. 리처드 베이커 씨 집안도 그런 것 같군요. 가족들이 소중하게 지켜온 레시피라니, 얼마나 맛있을지 아주 기대되네요.』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아스라한 주향(酒香)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저희 집 블랙 케이크는 몰트위스키를 바르는데, 베이커 가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엘리자베스는 케이크를 포크로 푹 찔렀다. 보들보들한 블랙 케이크는 저항 없이 포크 모양대로 찍혀나갔다. 굳어진 덩어리나 잘못 들어간 씨앗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씨앗을 일일이 손질하는 번거로움을 무릅쓰면서까지 무화과를 쓰고 싶었던 이유가 뭘까?’

이제 입안에 넣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가장자리와 가운데 중 어디를 먹을지 잠시 고민했다.

가장자리에는 퐁당과 버터크림이 있어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맛을 느낄 수 있다.

반면에 가운데는 순수한 블랙 케이크 자체의 맛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달콤한 크림을 함께 먹을 것인지, 아니면 케이크 자체의 맛을 먼저 볼 것인지.’

두 가지 고민 속에서 고민하던 그녀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먼저 단순한 맛부터 평가하자.’

가장 가운데에 있는 부분을 겨냥해, 포크를 스푼처럼 사용해 케이크를 푹 떠냈다.

푸딩처럼 부드러운 빵 조각이 입안에서 녹는다.

부드럽고 순한 첫맛이 한순간 스쳐 지나가고, 바로 진한 과일 향과 함께 오밀조밀한 케이크 시트가 혀를 적셨다. 적포도주 향이 슬며시 감도는 가운데 느껴지는 뒷맛은 단순하지 않았다. 농후한 건포도와 블랙베리를 중심으로 한 온갖 과일 맛이 달곰쌉쌀하게 조화를 이루며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진다.

크리스마스날, 다 같이 모여 선물 상자를 풀기 전에 두근거리던 그때의 기대감이 떠오르는 맛이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모양보다는 맛이 좋군요. 옛 추억이 떠오르는 맛이에요.』

『건과(乾果)를 여러 종류 쓰면 과할 수 있는데 조화를 아주 잘 이뤘어.』

까다로운 라이언 윈체스터도 칭찬했다.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아. 디저트라면 꿈을 가져다주어야 하는데 시커멓기만 하고.』

시몬 리옹이 짧게 평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평이 좋았다.

토론할 것도 아니고 각자 채점표를 제출할 뿐이므로 평가는 금방 끝났다.

『이번에는 일본 팀이군요.』

화려한 꽃송이가 빙글빙글, 케이크를 나선처럼 감으며 피어오른다. 아래쪽에는 봉오리에 가까운 꽃이지만 위쪽은 활짝 핀 꽃이라, 저절로 시선을 끄는 효과가 있다.

『소개를 부탁드려요.』

『봄의 꽃을 테마로 한 슈가 크래프트 케이크로, 초콜릿 머드 케이크입니다.』

나카무라 타다요시가 긴장한 듯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일본 팀은 음양 앙트르메에서 단순한 초콜릿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화이트 초콜릿과 코코넛 바바리안 크림 케이크, 그리고 다크 초콜릿과 티무트 페퍼 바바리안 크림 케이크라는 두 종류의 케이크를 냈었죠. 그런데 슈가 크래프트 케이크에서 또 초콜릿 케이크를 했군요?』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반문했다. 칭찬처럼 들리는 말은 아니었다.

이 대회가 시작하기 전에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일본 팀이다.

하지만 막상 대회가 시작되고 나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나카무라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아르헨티나산 싱글 오리진 다크 초콜릿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앙트르메에서 보셨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깊은 초콜릿 맛을 재현했습니다. 맛보시면 아실 겁니다.』

이로하 후유가 끼어들어 대답했다.

엘리자베스가 웃었다.

『그래요. 맛보면 알 수 있겠죠?』

『예, 잘 부탁드립니다!』

후유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알리샤가 케이크를 잘랐다.

겉보기에는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색이지만, 칼로 자른 안쪽은 조금 전의 블랙 케이크에 비견할 만큼 짙은 흑갈색이었다. 하지만 블랙 케이크와 다르게 세 겹의 레이어가 선명하게 보였다. 두툼하게 발려진 하얀색 크림이 확 드러났다.

알리샤는 조금 더 칼을 움직였다. 설탕 꽃잎을 일일이 손으로 다듬어 붙인 꽃봉오리와 꽃송이가 갈라지며 속살을 드러냈다. 흐트러진 꽃잎이 한 장 한 장 팔랑거리며 접시 바깥으로 떨어졌다.

봄의 벚꽃이 흩날리듯 우아한 광경이었다.

『…어머나.』

『꽃잎이 칼에 잘리는 게 아니라 한 장씩 분리되네요. 아주 잘 만들었나 봐요.』

케이크를 한 도막씩 접시에 올려놓으며 알리샤가 웃었다.

찬물로 입안을 헹군 주영모는 눈앞의 머드 초콜릿 케이크를 노려보았다.

‘너무 단 건 별론데.’

음양 앙트르메는 그나마 다른 재료를 섞어 단맛을 중화시켰는데, 이 케이크는 그냥 대놓고 단 것 그 자체로 보였다.

‘티무트 페퍼나 바바리안 크림처럼 다양한 재료를 쓰려고 하다가 다크 초콜릿 본연의 맛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나 본데.’

그는 포크로 케이크를 쿡쿡 찔러 퐁당이 어느 정도 두께인지 살폈다.

예상외의 결과에 주영모가 눈을 가늘게 떴다.

『퐁당을 아주 얇게 입혔네?』

옆에서 같은 케이크를 맛보던 알버트 그림슨이 대답했다.

『확실히 나카무라 쉐프가 손재주는 있어. 이거 의외로 나쁘지는 않아. 먹을만한데?』

퐁당의 맛 자체가 달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단것에 환장하지 않는 이상 슈가 크래프트 초콜릿 케이크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단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알버트 그림슨이 나쁘지 않다고 평가했다.

『호오, 그래?』

‘의외로 괜찮으려나?’

조금 전에 맛본 블랙 케이크는 적포도주 향이 강했다. 복잡하고 뭉클한, 건조한 과일 맛도 풍부하고 좋았다.

주영모는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 삼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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