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4화
퐁당(Fondant)에 색깔을 입히는 방법은 두 종류가 있다. 시판하는 유색 퐁당을 사용하거나, 하얀 퐁당에 컬러 아이싱 젤을 사용해 색깔을 입힐 수 있다. 하지만 이 케이크에서는 하늘 빛깔이 점차 농도가 짙어졌다가 옅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후자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마리오가 염료를 꺼내오며 중얼거렸다.
“사실 제과 경연에서 누가 시판하는 유색 퐁당을 쓰겠어? 당연히 직접 만들어야지.”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야? 케이크를 만들고 난 다음에 그 위에 색칠을 하는 방법도 있잖아.”
“뭐, 그거야 그렇지.”
퐁당은 순백색의 도화지처럼 하얗기만 했다. 이제 여기에 염료를 섞어서 원하는 대로 색깔을 내면 된다.
“단색이 아니니까 더 까다롭단 말이지.”
“그래도 잘 하잖아.”
해 질 녘의 노을은 단순히 붉지 않다.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면서 점차 검게 저물어간다.
종일 중천에 떠 있다가 저물어가며 은은하게 퍼지는 빛깔을 살리기 위해서 마리오는 심혈을 기울였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백지상태인 퐁당을 주물럭거려 체온으로 따뜻하게 한 후,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고작 몇 방울의 젤 컬러 아이싱을 붓에 묻힌 후, 퐁당을 늘려 잡아당겼다. 늘어난 퐁당을 차곡차곡 접고 다시 늘린다. 늘리고 접고 늘리고 접으니 하얗던 퐁당이 점차 색깔이 변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진한 것을 더 연하게 하기는 어려우므로 처음에는 아주 소량의 염료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실 나는 다 만든 퐁당을 나중에 색칠하는 걸 주로 했는데,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섬세하게 색깔을 조절하기엔 이게 편하지.”
붉은색이나 파란색, 그리고 보라색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노란색 염료를 본 루이스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옐로우 넘버 파이브? 그건 좀 그렇지 않나?”
마리오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들었다.
“이게 제일 맞는 색깔인데. 이상해?”
진혁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그거. 알레르기 때문이지?”
“알레르기?”
아직 이해하지 못한 마리오에게 루이스가 알려주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포르투나 알레르기 사건 있잖아. 그게 이 옐로 파이브 때문에 생겼다고 밝혀졌어.”
“엑!”
마리오가 질색하며 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 병을 내려놓았다.
“결혼식 손님이 서른두 명이나 배탈 나서 실려 갔던 그 일 말이야? 결국 포르투나 베이커리에서 배상했던?”
“맞아. 웨딩 케이크에 사용한 염료 중 옐로 파이브가 알레르기 원인이라고 했어.”
그래서 배상 책임 문제는 포르투나 베이커리가 아니라 염료 회사로 넘어갔다고 한다. 마리오가 혀를 내둘렀다.
“결혼식 손님이 쉰 명도 안 되는데 그중 서른 명이 넘게 탈이 나서, 식중독일 거라고 했잖아?”
“그게 아니라 염료가 문제였다고 하더라고.”
“…우리도 쓰면 안 되겠네.”
마리오가 아쉬워하며 옐로 파이브 염료를 힐긋 바라보았다. 진혁과 루이스가 동시에 대안을 제시했다.
“리파도 옐로우를 써.”
“마호가니 옐로우를 사용하면?”
“으-음.”
마리오의 이마에 깊이 주름살이 패였다. 그가 고민하다가 말했다.
“색감이 조금 달랐지?”
“응.”
“맛은?”"
“마호가니 옐로우는 알코올이 들어있고 약간 신맛이 나지. 리파도는 맛이 없는데 색깔이 약간 푸르스름해.”
“둘 중 뭘 써도 딱히 상관은 없지 않을까?”
“진혁이가 만드는 케이크에서 조금이라도 맛이 변하면 안 되니까, 리파도로 할게."
“그럼 그걸로 부탁한다.”
“오케이.”
◈ ◈ ◈
다사다난한 대회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기자들은 한가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무대를 관찰했다.
『백 달러 리암. 오늘도 잘도 왔네?』
『우리에게 돌려줄 돈은 준비됐어?』
미국에서 온 기자인 리암 에이든은 턱을 괴고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너희들이야말로 나에게 줄 돈이 준비됐는지 모르겠는데.』
『줄 필요가 없으니 준비할 필요도 없지.』
『신성한 내기를 무시할 셈이야?』
『신성한 건 아니지. 그냥 소소한 불법 도박 아니냐고.』
제임슨이 옆에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하고 내기는 취소하지그래?』
『….』
『줄리아 때문에 화가 나서 터무니없는 내기에 승낙한 거잖아. 이혼 소송도 막바지라며.』
리암은 기분이 상해 쏘아붙였다.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나는 네 친구기도 하지만 줄리아 친구기도 하니까. 두 사람이 계속 어긋나는 걸 보고 있기가 어려워.』
제이슨이 걱정스럽게 하는 말에 리암은 고개를 돌렸다. 막막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이제 내일이면 이 출장도 마지막이긴 하지.’
출장 온 나흘간, 헤어진 아내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파리는 넓다.
하지만 사실은 우연히라도 마주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내와 처음 만났던 카페 ‘라 메이슨 로즈’, 데이트할 때 자주 만나서 함께 작업하던 스타벅스, 금요일 저녁마다 만나던 바 ‘세인트 로페즈’. 그 어디에도 아내는 없었다.
연애하던 시절에는 특별히 약속하지 않아도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히 마주쳤는데 말이다.
‘그때는 나를 만나고 싶어서 그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이쪽에 오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연락을 해볼까.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까.
꽃이라도 있다면 한 잎씩 떼어가며 꽃점을 칠지도 모르겠다.
대회가 끝나고 오늘 밤이 지나면, 정리한 기사를 본사로 보낸다.
그리고 미국으로 귀국해야 한다.
리암은 고개를 들어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100달러를 건 한국 팀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얀 조리모를 쓰고 조리복을 입고서 주방을 분주하게 오간다.
무대 위라는 특수한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눈앞의 반죽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멋지다. 자기 일을 제대로 해내는 남자들은 멋지다.
맛있는 케이크를 굽는다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한국이라는 먼 곳에서 열두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와 지금 저곳에 있다.
이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몇 개월 이상 걸렸을 것이고, 그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몇 년 이상 시간을 투자했을 것이다.
그것은 출장 와있는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븐에서 빵이 구워지는 향긋한 냄새가 이곳까지 풍겼다. 그 향기는 저절로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머핀을 굽는 아내를 연상케 했다.
이제는 다시 자신의 집 주방에선 맡을 수 없을 향기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파져 왔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서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보고 싶은데.’
마사가 갑자기 사정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프랑스에 오고 싶었다. 아내를 보러 온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일 때문에 왔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괴롭고 긴 이혼 소송 도중에 변호사들만 만나고 정작 아내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를 만나 한 번이라도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부르르, 진동이 울렸다.
『!』
그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내어 보았다. 새로 온 메시지가 있었다. 리암은 스마트폰의 메시지 함에 떠오른 ‘New’라는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만일 줄리아가 사과한다면 너그럽게 받아들여 줘야지.’
프랑스에 출장을 가 있는 그에게 며칠간 메시지는 거의 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일지도 모른다.
『…줄리아.』
이미 백 달러를 건 내기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리암은 자신만의 세상에 빠졌다. 입 밖으로 헤어진 아내의 이름을 달싹이자, 옆에서 제이슨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리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리암. 급한 일이야. 보는 대로 전화해 줘. ? 마사 -]
내용을 읽자마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메시지는 줄리아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다. 원래 리암 대신 이곳에 왔어야 할 마사가 보낸 것이었다.
리암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스마트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이런 식으로 멋대로 연락하다니 무례하다.
‘취재 중’이라는 간단한 답신을 보내고 그대로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아내에 대한 것은 마음속의 서랍 속에 넣어두고, 취재에 집중하자.
리암은 고개를 들어 무대를 응시했다. 프랑스 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한국 팀하고 프랑스 팀, 만드는 테마가 비슷한데…?』
그때 심사위원들 역시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프랑스 팀과 한국 팀 모두 무지개를 만들고 있는 건가?』
스테피가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유난 취가 대답했다.
『한국 팀이 만들 것은 ‘러브 스토리’라는 테마고, 프랑스 팀은 ‘인간의 인생’인데. 둘 다 무지개라는 이야기는 전혀 없어.』
그는 각 팀에서 어떤 주제로 만들지 미리 제출한 기획서를 보고 있었다. 주영모가 중얼거렸다.
『총천연색으로 연인들의 사랑을 표현할 셈인가?』
『한 사람의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기 위해 무지개색 배경을 쓸 수도 있겠지요.』
『두 팀이 비슷비슷한 색깔을 사용한다면 심사하기는 아주 쉽겠는데.』
알버트 그림슨은 흥미 있게 미국 팀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저쪽은 완전히 다른 노선을 취했군.』
『블랙 케이크라니 그립군요. 저희 집에서도 크리스마스 때마다 블랙 케이크를 굽고는 했는데.』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말했다.
『크리스마스 블랙 케이크는 아이싱을 하지 않으니까. 웨딩 케이크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보통 무거운 케이크를 할 텐데, 여러 단 케이크에 블랙 케이크를 하다니 특이하군.』
여러 단의 케이크를 만들 때는 파운드 케이크 계열의 무거운 케이크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다. 시몬 리옹이 대답했다.
『심을 잘 짠다면 어떤 종류의 케이크라도 8단, 아니 9단까지라도 쌓을 수 있지.』
『그거야 그렇지만.』
안토니오 바트가 앞으로 나서서 선언했다.
『지금부터 휴식 시간입니다! 한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한다면 무대에 있는 누구나 점심시간을 갖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무대 위에 올라서 있는 이들 중 쉬겠다고 선언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뒤처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난 나흘간의 경연 내내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으시면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안토니오가 마이크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리우마오유가 투덜거렸다.
「어차피 아무도 안 쉬러 갈 텐데 왜 매번 저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어. 집중하는 데 방해된다고.」
「리우마오유. 저 정도를 신경 써서 작업을 못 할 정도로 섬세한 성격이 아니잖아? 많이 긴장돼?」
장치앙린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는 녹인 이소말트가 젖은 모래 같은 질감이 될 때까지 천천히 녹였다.
화씨 333도가 되어 적당한 상태가 된 이소말트를 실리콘 브러시에 묻혀 보석 틀에 바른다.
혹여 공기 거품이 생기지 않게 천천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브릴리언트 컷 모양의 틀에 절반을 붓고, 나머지 절반은 뾰족한 기둥형 틀에 붓고서 빠르게 두 개를 붙인다.
그가 지금 만들려는 것은 슈가 다이아몬드였다.
수정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먹을 수 있는 보석들.
장치앙린은 보석이 굳기 전에 바를 반짝반짝한 식용 반짝이 가루 역시 준비해두었다. 그가 리우마오유에게 말했다.
「여기 이쪽은 330도로 부탁해.」
식용 색소를 넣기 위해서는 그 온도가 적당하다. 리우마오유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장 대형, 어떤 색으로 섞을까?」
「녹색과 분홍색, 그리고 푸른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