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3화
드디어 마지막 날이다.
미국 팀은 저마다 분주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였다. 리처드 베이커는 활기차게 반죽을 준비했다. 솥뚜껑처럼 굵은 손가락이 오가며 걸쭉한 덩어리였던 반죽은 점차 형체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느낌이 좋다고.』
『아아.』
브라이언 신은 자를 들었다. 케이크 안에 집어넣어 무게를 지탱해줄 심을 자르기 위해서다.
모양을 만들 틀을 정리하면서 그가 토마스에게 물었다.
『씨앗은 전부 뺐지?』
『응.』
어제 얼음 조각이 끝난 만큼 오늘은 완전히 보조 역할이다. 말린 무화과를 일일이 손질해 씨앗을 뺀다는 번거로운 일을 마친 토마스 브라운이 즐겁게 말했다.
『무화과를 넣은 블랙 케이크는 처음 먹어봐.』
『그렇지. 말린 무화과는 푸드 프로세서에서 통째로 갈아도 씨앗이 씹히거든.』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누가 그런 짓을 해?』
어린 시절에 그런 짓을 한 번 해 보았던 리처드 베이커가 킥킥 웃었다.
『18살 때 내가 그랬지.』
아직 어리던 시절, 할머니가 전수해주신 블랙 케이크.
씨앗을 빼기 귀찮아서 말린 무화과에 건포도나 말린 자두, 거기에 아몬드까지 넣어서 전부 갈아버렸다. 당연히 씨앗도 흔적없이 갈려있을 줄 알고 그 페이스트를 케이크에 넣었다.
결국, 크리스마스 날 블랙 케이크를 맛본 일가친척들 모두 씨앗이 씹힌다며 뱉어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즐거운 추억이다.
『베이커 가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레시피라며?』
『대대로까지는 아니고. 대고모님의 어머니가 개발하신 레시피에 우리 아버지가 약간 변화를 줬어. 무화과를 추가한 거지.』
블랙 케이크(Black Cake).
말린 블랙베리와 건포도, 건조한 자두, 설탕에 절인 버찌.
거기에 말린 무화과를 넣고 갈아낸다.
리처드는 최신식 전자동 푸드 프로세서를 써서 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굳이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작은 절구와 절굿공이를 사용해서 갈았다.
그렇게 갈아놓은 말린 과일들을 럼과 포도주에 담그고 숙성시킨다.
그레이스 대고모는 반드시 1년 이상 숙성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아버지는 반년 정도가 적당한 기간이라고 우겼다.
베이커 가의 레시피가 만들어져온 과정과 역사에 대해 들으며 브라이언이 물었다.
『리처드는 어떻게 만드는데?』
『나는 20분 파.』
『하하.』
20분이라는 답변을 듣고 브라이언이 큭큭 웃었다.
리처드는 가스레인지 앞으로 다가갔다. 피어오르는 가스에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아까 갈아둔 과일들은 포도주에 푹 담근 후, 끓는 불에서 은근하게 20여 분간 졸인다.
그는 혹여 냄비 바닥이 조금이라도 타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찰하며 알코올 기운을 공기 중으로 날려 보냈다.
『베리류는 레드 럼하고도 잘 어울리고. 위스키를 같이 넣어도 괜찮아. 하지만 이번에는 최대한 대중적인 맛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으니까.』
『그래, 복잡하고 섬세하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맛. 그런 것도 좋지만 이번에는 즐거우면서도 단순하게 가기로 했잖아?』
리처드가 유쾌하게 웃었다.
20분은 금방 지나갔다.
갈아둔 건과들은 술에 완전히 젖어 들었다. 그는 검붉은 색깔의 페이스트를 수저로 떠서 들여다보았다. 케이크의 어느 정도 질감인지 확인했다. 마멀레이드처럼 찐득하고, 수프보다는 더 덩어리져 있어야 한다. 이 케이크는 바삭바삭하거나 단단하지 않고, 오히려 익힌 푸딩에 가깝다.
『어떤가?』
『지금 설탕을 태우면 딱 좋겠어.』
장식을 위한 재료를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던 브라이언이 말했다.
『그럼 기둥을 마저 부탁해.』
태운 설탕(Burnt Sugar)은 이 레시피에서 꼭 필요한 요소다.
리처드는 정제하지 않은, 알 굵은 갈색 설탕을 냄비 안에 부었다. 설탕 알갱이가 냄비 바닥에 부딪히며 사르락하는 소리가 났다.
연갈색 설탕들이 은색 표면을 덮는다. 그는 가스 불이 온도를 지나치게 높이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정했다.
흰색이 드문드문 섞였던 갈색 설탕이 녹아내리며 연한 카페라떼같은 색깔을 보였다. 아직까지는 순조롭다.
『리처드, 설탕은?』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에스프레소처럼 새까맣게 되어버리기 직전, 짙은 갈색이 될 때까지 카라멜라이즈한다.
말로는 ‘태운 설탕’이라고 하지만 이걸 정말로 새까맣게 태워버리면 먹을 수가 없게 되니 당연한 일이다.
마녀의 냄비처럼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진갈색 표면에서는 농축되어 더 달콤해진 설탕의 향기가 곰실곰실 흘러나와 코를 간지럽힌다.
끓어오르는 냄비를 내려다보며 불을 끄고, 그 위에 적포도주를 부었다.
설탕과 섞인 적포도주는 아스팔트처럼 검고 진득한 무엇이 되어,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내음을 풍겼다.
이제 버터와 설탕, 달걀을 아까 갈아둔 과일에 섞을 차례다.
『순조로워.』
술에 절어 검게 변한 설탕과 과일 믹스를 다른 재료들과 섞을 차례다. 하얀 밀가루가 들어오면 까만 색깔은 점차 옅어진다.
옆에서 아이싱을 준비하고 있던 브라이언이 말했다.
『집안 대대로 물려줘도 될 레시피인데. 가게에서 팔지 않고 대회에 나가도 돼?』
『그런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이걸 들고나오지도 않았지.』
리처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레시피는 공유하는 거야.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내가 놓친 점도 보고, 어떻게 발전시킬지 공유도 하고 그러지.』
『임 쉐프처럼?』
『맞아. 임진혁 쉐프가 건강식 레시피를 공유했듯이 말이야.』
그리고 이번에는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까지 공개했다. 마치 명리(名利)를 아득히 초월한 것처럼 희한한 행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보통 돈 아니면 이름이잖아? 그런데 임진혁 쉐프는 돈보다 이름인가, 했는데 또 이름에도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 욕심이 없는 사람 같지 않은데 묘하게 욕심이 없다고 할까.』
브라이언은 예전에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떠올렸다.
『가족 욕심이 있어.』
『그게 뭐야? 결혼해서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인가?』
『그게 아니고 지금 가족이 많이 소중하다고 하더라고.』
『그야 누구나 그렇지.』
『음…나만큼?』
브라이언은 가족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양부모가 소중하게 길러주었고, 모르던 친부모를 뒤늦게 찾았다.
그에게 있어 ‘가족’이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무겁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던 리처드 베이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랬군.』
『한국계들은 원래 가족이 중요한가 봐.』
옆에서 필요한 재료를 갖다 주는 등 보조를 하고 있던 토마스가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리처드가 납득했다.
『아, 그런가?』
한국 문화에 대해 온라인 강좌를 한 학기 수강하기는 했지만, 잘은 모르는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교 문화에서는 가족을 중시한다고 했으니까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리처드도 수긍했다.
『그런가 봐.』
블랙 케이크 위에 장식할 설탕 장식을 만들며 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이 색깔로 괜찮을까?』
『검은색 케이크 위에 아주 잘 어울릴 거야.』
『색깔을 조금만 더 연하게 하는 게 좋을까?』
『아니야, 이대로 충분히 괜찮아.』
대회의 마지막 날인데도 즐겁게 작업하고 있는 것은 미국 팀만이 아니었다. 한국 팀 역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경쾌하게 작업하고 있었다.
『루이 형이 있어 줘서 다행이야.』
『역시 그렇지?』
마지막 날에는 얼음 조각가가 할 일이 없어진다.
그렇기에 얼음 조각가는 자유롭게 제과제빵을 보조해도 된다. 하지만 보통 그들은 제과제빵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아, 부탁하는 물건을 갖다 주거나 설거지를 하는 등 잔심부름을 주로 했다.
하지만 루이스 강은 두 가지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마지막 날은 한국 팀이 다른 팀보다 더 유리했다.
제과제빵을 하는 손이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즉 다른 팀보다 더 시간 여유가 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지금 빨간색, 주황색은 다 했어. 이제 노란색을 섞을 거야.”
마리오가 선언하자 루이스가 대답했다.
“나는 파란색에서부터 보라색까지 맡지.”
“진혁아! 펄을 넣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그러면 지나치게 산만해져.”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그가 기획한 케이크는 총 일곱 단.
남보랏빛 케이크부터 시작해서, 무지개를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맨 윗단은 붉은색이 아니고, 연한 노란색으로 끝난다.
두 사람이 색조를 조합하는 동안 진혁이 다시 당부했다.
“아주 은은하게, 점차 색깔이 바뀌는 듯이.”
“잘할 수 있다고. 엄청 연습했잖아.”
“그래,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긴장하지 말고.”
“긴장 안 한다고.”
등이 완전히 식은땀으로 젖어서 뻣뻣하게 움직이는 주제에 긴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진혁은 실눈을 뜨고 마리오를 훑어보았다.
“정말로?”
“다, 당연하지.”
머뭇거리면서도 할 말은 하는 게, 아직 견딜만한가 보다.
진혁은 부지런히 반죽을 계속했다.
앙트르메에서 보여주었던 나인 레이어 케이크는 그저 케이크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에 보여줄 7단 케이크는 완전히 별개인 일곱 개의 케이크였다.
처음에 진혁이 이 케이크를 제안했을 때 강 씨 형제 두 사람은 반대했었다.
‘그런 걸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모자라.’
‘장식은 안 하냐?’
하지만 루이스의 도움까지 받아서 작업을 하면 장식까지 완전히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다.
진혁은 실제 시범을 보여주어서 두 사람을 무사히 설득했다.
설탕 장식이 올라갈 케이크의 모양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다. 밑에는 크고 위에 올라가면서 점점 더 줄어드는 평범한 원형 케이크다.
“굽고 나서 자르는 것보다 차라리 아예 그 모양으로 굽는 게 낫지 않아?”
“내가 원하는 모양대로 구우려면 아예 틀부터 주조해야 해.”
마리오가 납득했다.
“그건 안 되겠다.”
강 씨 형제는 옆에서 퐁당을 반죽했다. 무지개색 색색의 퐁당은 케이크의 각 층을 덮어, 알록달록하게 장식할 것이다.
진혁은 옆에서 동료들이 어떻게 하는지 힐긋힐긋 눈여겨보았다. 물론 자기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케이크 반죽은 전부 오븐에 들어갔고, 온도도 적당하다. 반죽이 부풀어 오르며 향긋한 빵 냄새가 풍겨왔다.
“좋아. 계획대로 잘 되고 있어.”
점토처럼 말랑말랑한 설탕 덩어리를 조몰락거렸다. 머리와 몸통, 팔과 다리.
조그마한 인형을 하나, 둘, 셋… 총 7쌍이나 만들었다.
전부 다른 크기다.
그리고 이제는 여기에 옷을 입히고 머리카락을 만들어 달고 눈코입을 그려주어야 한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작고 말랑말랑한 덩어리 위를 누볐다.
곧 동글동글하던 머리가 눈코입을 갖게 되었다. 머리카락과 치맛자락까지 섬세하게 조형된 인형은 새까만 색깔이었다.
옆에서 마리오가 참견했다.
“정말로 그거, 검은색으로 할 거야? 열네 개 모두가 새까맣잖아.”
크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가 새까맣다. 진혁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까만 게 좋지.”
“검은색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잘 어울리니까? 그리고 알잖아. 여기에는 명확한 의도가 있다는 걸.”
“알긴 알지. 그러니까 찬성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