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2화
방으로 돌아온 진혁은 침대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차분히 복기했다.
‘감히 절도를 저지른 팔목을 자르지도 않았어. 죽이지도 않았고. 충분히 은혜를 입혔다고 생각했는데.’
팔다리를 못 쓰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회복이 가능할 정도로 여지를 두었다.
물론 그 이후에 오토바이에서 굴러떨어지면서 생긴 약간의 부상이 있겠지만, 그건 진혁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베개 위로 기어오르는 바퀴벌레를 집어 던지면서 바퀴벌레가 관절에 후유증이 남을지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觀照)했다.
오늘 하루, 무대 위에서 벌어졌던 일부터 시작해서 하루를 돌이켜보았다.
그는 자기들이 직접 세운 규칙도 정확히 세우지 못하고 체면을 땅에 떨어뜨린 자들에게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순신 장군의 일은 조금 아쉽다.
하지만 세상에 제과제빵 경연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니, 이 대회가 아닌 다른 무대에서 또다시 실력을 보여주면 될 일이다.
루이스가 언급한 글로벌 페이스트리 월드컵도 있고, 다른 팀의 얼음조각가가 언급한 대회도 있다.
<대자연의 축복>은 미국에서 열리는 초콜릿 경연 대회로,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초콜릿으로 만든다. 토마스 웨인 브라운이 입에 침을 튀기며 광고하던 대회다. 그는 이번에 진혁이 만든 나비를 열렬히 칭찬하며, 그 대회에 내놓지 않은 것이 아깝다고 이야기했다. 웨이퍼 페이퍼를 겹쳐 만든 나비들은 조역이 아니라 주역이어야 한다며, 나비의 생태에 대해서 주절주절 읊었더랬다.
“….”
그는 물통의 뚜껑을 열어, 유리잔에 물을 부었다. 창가에 서자 잔 속에 그대로 달이 담겼다.
그가 즐기던 흑목으로 만든 잔이 아니기에, 잔 속에 담긴 은빛 달이 하얗게 빛을 뿜어내는 일은 없었다. 그저 투명한 유리 위, 수면 위에 비친 은은한 달빛이 물속에서 굴절하여 유리잔 바닥을 빠져나올 뿐이다.
잡을 수 없는 과거의 인연처럼 일렁거리는 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진혁은 그대로 잔을 들어, 달째로 물을 삼켜버렸다.
보통은 벌레가 베개 위로 기어오른다고 해서 벌레에게 분노하지는 않는다.
벌레와 인간이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절도 미수 사건이 있었을 때 진혁은 특별히 화가 나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성가시다고 생각해 적당한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적절하다고 여긴 정도의 처벌은, 사고로 여기게끔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는 지나치게 고강도의 벌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예상보다 더 마음이 여렸다. 팀 동료들은 진혁이 죄책감 때문에 다치지 않았을지 걱정했다.
실제 벌어진 일과 그들이 염려하는 일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도 크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그는 빈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달빛은 물이 담겨있지 않은 빈 유리잔에도 차별 없이 내려앉아, 투명한 잔을 반짝이게 했다.
그러나 진혁은 다시 그 잔을 돌아보지 않았다.
◈ ◈ ◈
“당연하지, 지금 바로 보내줄게. 이메일로 보낼까?”
“응, 부탁해. 고마워.”
새벽부터 국제전화로 받은 서류를 숙소 데스크에 부탁해 출력했다. 진혁은 서류봉투를 한쪽에 끼고 대회장까지 가는 차에 탔다.
미리 타고 기다리고 있었던 루이스가 손을 흔들었다.
“잘 잤어?”
“응, 형은?”
“나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 밑이 푸석푸석한 것이 잠을 설친 것 같다. 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안마 좀 해줄게.”
“와!”
진혁이 하는 안마는 유난히 시원하고 기운이 난다. 신이 난 루이스가 등을 들이밀었다. 진혁이 가볍게 등을 몇 군데 두드려 주면서 피곤을 풀어주는 혈을 건드려 주자, 그는 만족스러운 앓는 소리를 냈다.
“우리 진혁이는 안마도 잘한다니까.”
“…하하. 마리오는?”
“핸드폰을 두고 왔다고 다시 올라갔어. 바로 내려올 거야. 왜? 특별히 할 말이라도 있어?”
“어제 이야기했던 것.”
“아침에 경찰에게서 연락받았어. 너희 아버지 신경 쓰지 않으시게, 나하고 마리오가 가서 증언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니, 그게 아니고.”
진혁이 말하려 하는데 루이스가 그 말을 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범인도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하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일 말고. 마리오가 우리 가게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계약 조건을 정리해서 서류로 가져왔어.”
“벌써?”
진혁이 씨익 웃었다.
“한국에 유능한 매니저님이 계시니까.”
루이스가 곤란해하며 물었다.
“그럼 그 서류, 한글로 쓰여 있겠네?”
“응.”
“음….”
루이스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진혁에게 속삭였다.
“마리오가 프랑스에서 고등교육을 받다가 한국 대학에 갔던 건 알지?”
“응? 응.”
“걔 한국말은 잘 하고 한글도 잘 읽는데, 사실 어려운 서류는 못 읽어. 대학에서도 이론 성적은 계속 바닥이었어.”
“….”
“계약서류를 영어나 프랑스어로 작성하기는 어렵지?”
진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자식, 뽑지 말까?’
루이스가 뻘쭘하게 말했다.
“그래도 말은 잘 하니까, 설명해 주면 잘 이해할 거야.”
뒤늦게 계단을 뛰어 내려와 차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마리오가 크게 외쳤다.
“좋은 아침!”
그 역시 잠을 설쳤는지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마리오가 들어오면서 조용해진 차 안의 분위기를 느끼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야? 두 사람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별 얘기 아니야.”
진혁은 슬그머니 계약서를 집어넣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차를 타고 그리 멀리 가지 않아 곧 경연장에 도착했다. 고작 사흘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벌써 이곳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들이 너무 일찍 왔는지 대기실에는 한국 팀밖에 없었다.
마리오가 조리복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이제 이 대회만 끝나면 마지막이네.”
“그렇지.”
루이스가 손을 씻는 동안, 마리오가 활기차게 물었다.
“진혁아, 새 직원 모집 말이야. 생각은 해봤어?”
“나 혼자 결정할 수가 없으니까 매니저 형한테 상의하려고.”
실제로는 진혁의 비중이 더 높지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사실 지금 와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말이야. 대학 대회 하고 난 다음에 내가 네 빵을 먹으려고 한참 찾아다녔잖아.”
“그랬어?”
“강남의 H & J 카페 앤 베이커리에 있을 때 말이야. 내가 내 명함도 남겼는데 너, 그때 끝까지 연락 안 줬지?”
당시에 받자마자 버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진혁은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본데.”
진혁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래? 네가 받고 무시한 게 아니라 아예 전달이 안 되었단 말이야?”
“마리오 너 피곤해 보인다. 내가 안마 좀 해 줄까?”
“어? 응!”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마리오는 즐겁게 등을 갖다 댔다.
“네가 안마해주면 진짜 시원하더라.”
진혁은 대회 마지막 날, 팀원들이 최고의 몸 상태로 준비되어 있기를 원했다.
체력관리도 실력의 일부라 생각해 연습 중에는 좀처럼 해주지 않던 추궁과혈까지 강 씨 형제 두 사람 모두에게 해주었다.
“뭔가 힘이 나는데?”
“잠을 완전히 설쳐서 기운이 없었는데 몸이 가뿐해졌어. 레드불을 마신 것 같아.”
“정말로 마신 건 아니지?”
“루이 형! 아니야!”
세 사람이 전부 옷을 갈아입고 나자 다른 팀원들이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다.
벌써 며칠이나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중압감 속에서 경기를 치러온 다른 국가의 팀원들 역시 피곤해 보였다. 지친 안색으로 옷을 갈아입던 리우마오유가 중얼거렸다.
「대형은 마지막 날인데 힘들지도 않아? 기운이 넘치네.」
「하하! 드디어 어제 메이링하고 연락이 됐다고. 다 리우마오유 네 덕분이야.」
장치앙린이 신나서 말했다.
「가족이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조금 뜨악해하는 것 같았는데, 잘 이야기하니까 이해해 줬어.」
「메이링의 가문도 보통 가문이 아니니까.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매달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걸.」
「그래도 진심은 통하는 법이지!」
「그 진심을 어떻게 전달했는데요, 대형?」
웨이까지 끼어들자 장치앙린이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원래 외가 쪽의 아주 먼 혈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어머니하고 메이링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의자매를 맺은 사이였다고 했어. 어머니의 유품인 옥 반지를 보여주니까 믿더라.」
「호오….」
다가오는 대회와는 상관없는 수다로 열을 올리는 대만 팀의 이야기를 건너 들으며, 진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잃어버린 가족을 다시 찾았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즐겁다.
남의 일이지만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공감할 수 있다.
‘이렇게 다시 현대인이 되어 가고 있는 거야.’
백 일이 넘게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생판 모르는 타인의 이야기에도 공감할 수 있다.
진혁은 자기 자신의 ‘평범해지기’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어이, 진혁 쉐프! 어제 좋은 결과 축하한다고.』
『리처드.』
『그렇게 금방 가버려서 인사도 못 했지 뭐야.』
『지금 하니까 됐지.』
『하하하! 원래 인사는 만날 때 한 번, 헤어질 때 한 번 하는 거라네.』
브라이언과 토마스 역시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진혁은 흘끔, 프랑스 팀을 눈여겨보았다.
“저기는 왜?”
“오늘 뭘 만들지 궁금해서.”
“철학적인 주제가 있는 걸 가져올걸.”
마리오가 단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이길 거야. 원래 사랑의 힘은 모든 걸 이길 수 있거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철 지난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마리오를 쳐다보며, 진혁이 무대 위로 올랐다.
이 간이주방을 사용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유쾌하다.
“잘 하자고.”
루이스가 손등을 내밀자, 마리오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얼마 전에 배운 동작이다.
진혁은 자연스럽게 그 위에 손을 얹었다.
“팀 코리아 파이팅!”
그들은 씩씩하게 구호를 외치며 경연에 참여할 준비를 마쳤다.
◈ ◈ ◈
조제프 쇠비어는 오늘 사용할 재료들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지 하나씩 하나씩 확인했다. 오늘 사용할 설탕 가루에 혹여 불순물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닫혀 있는 유리병들은 모두 제대로 밀봉되어 있는지, 확인할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사소한 것까지 모두 꼼꼼히 확인하는 모습을 보며 주느비에브가 물었다.
『나도 도와줄까?』
『이것만 보면 돼.』
주느비에브가 확인을 마친다고 해도, 조제프 쇠비어는 달걀이 얼마나 신선한지 한 번 더 확인할 것이다. 조제프도 알고 주느비에브도 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달걀 신선도 체크? 내가 할까?』
『아니.』
당연히 거절하고 나서, 조제프는 종이에 오늘 만들 케이크를 그리기 시작했다.
설탕 공예는 그에게 있어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아니다. 그렇기에 수없이 많은 연습을 했다.
선명한 무지개색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려나가는 케이크.
연필로 몇 개의 선을 긋자, 수십 번 이상 만들었던 7층 케이크의 형태가 종이 위에 드러났다. 주느비에브가 물었다.
『또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뭔가 바꾸려고? 여태까지 느닷없이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잖아.』
조제프가 단언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