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89화 (289/656)

제 289화

시공을 넘어 혼백이 강호로 간 후 제왕의 권세를 누리고 회귀하는 것까지 예측한 걸까?

그렇다면 점쟁이가 아주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복잡한 생각에 잠기며 미간을 좁힌 임진혁에게 루이스가 말을 걸었다.

“야, 걱정하지 마. 2위면 진짜 잘 한 거야.”

‘형체만 조금 다르게 했어도 1위를 했을 수도 있지만.’

그놈의 형태, 모양, 생김새!

그것만 아니었어도 충분히 우승할만한 가치가 있는 맛이었다.

“어제 내놓은 앙트르메는 디자인에서도 우수해서 제대로 1위를 했잖아. 네 실력은 여기서 확실히 통해. 정말로 대단하다고.”

루이스는 어제 진혁이 제출한 앙트르메를 떠올리며 위로했다.

나인 레이어 초콜릿 케이크는 맛뿐만 아니라 생김새에서도 우수한 평가를 받았고 문제없이 1위를 차지했다.

마리오가 입을 삐죽거리며 거들었다.

“그래. 네가 미적 감각은 좀 이상해도 맛있는 건 잘 만들잖아. 그 크림 브륄레까지 재현할 정도니까 말이야.”

2위를 한 것에 대해 진혁이 실망했다고 착각한 두 사람이 나름 위로를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뜻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눈치챈 진혁이 피식 웃었다.

“내일도 있잖아? 괜찮아.”

슈가 크래프트는 섬세한 감각을 통해 열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분야다. 염화기공을 익힌 진혁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빵이나 케이크 따위보다 이쪽이 제일 하기 편하다.

“맞아. 넌 슈가 크래프트가 제일 자신 있다고 했지.”

선명한 색감을 내는 것도, 녹은 사탕물을 거품 없이 딱 맞게 굳히는 것도 손쉽게 해내는 녀석이다. 루이스는 신뢰 어린 눈빛으로 진혁을 보았다.

“넌 내일도 잘할 거야.”

‘뭐지? 이 유일봉이 같은 눈빛은?’

분명히 처음에 대회를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어느샌가 충성스러운 부하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본다.

처음에 치즈 케이크를 사러 왔던 유일봉은 처음에는 ‘빵을 잘 만드는 형님!’ 하면서 존경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형! 형! 대단해요! 형!’ 하고 병아리처럼 쫓아다닌다.

임진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그래.”

불꽃 같은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아, 지금 발표한다.”

마리오가 심사위원석을 손가락질했다.

『얼음 조각에 대한 심사가 있겠습니다!』

빵 공예 조각들은 전시품 섹션으로 옮겨진 지 오래다. 무대 위에 찬란하게 늘어선 얼음 조각품들은 시린 냉기를 뿜어냈다. 무대 조명을 반사해서 언뜻 보면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리는 이 조각들은 조각가들이 얼마나 열심히 세공했는지는 상관없이 시간이 지나면 곧 녹아버릴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짧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이 조각들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기에 더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 각국에서 뛰어난 작품을 제출해 주셨습니다. 올해는 특히 더 완성도가 높아요.』

『시선을 끄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저는 저쪽에 있는 우아한 여인상이 마음에 드는군요.』

『미국 팀이 만든 저 ‘자유로운 여신상’이 발랄해 보이기는 하는데, 우아하다고 하기엔 어려운데요?』

『아. 제가 말씀드린 ‘우아한 여인상’은 저겁니다.』

부채로 얼굴 하관을 가린 일본 여인은 전통 의상을 입고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아름답다. 오히려 턱이 보이지 않아서 부채에 숨겨진 얼굴이 어떤 생김새일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 최고의 미인을 상상하게끔 했다.

“일본에서 제출한 저 얼음 여자 말이야.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은 아니거든? 역시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동양 미인상이 따로 있는 것 같아.”

“응? 뭐라고?”

“쌍꺼풀 없는 눈이 쭉 찢어지고 코는 살짝 낮은 얼굴 말야. 한국의 전형적인 미인상하고는 조금 다르다고.”

마리오가 이러니저러니 품평하자, 루이스가 딴지를 걸었다.

“너야말로 서양에서 오래 자라서 미적 기준이 한국하고는 다르잖아.”

“한국 유튜브는 많이 봤어!”

“네 기준에서 본 미인이랑 보통 한국인들 기준에서 본 미인이랑 달라.”

『3위는…!』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느라 결과 발표를 놓쳐버렸다.

“지금 얼음 조각 3위 누구라고 했지?”

“최소한 우리는 아니야.”

“그건 나도 알아.”

루이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리오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루이 형은 얼음 조각 경력은 짧은 편이잖아. 입상을 노리고 있었어?”

“그렇지 않으면 대회에 왜 나왔겠어? 이번엔 주제도 좋았다고. 서양 사람들이 좀 동양적인 미에 대한 환상이 있단 말이야. 네가 말한 미인의 개념하고도 일맥상통하는 얘긴데… 여하튼 저 사람들이 이 우아하고 단순한 탑의 아름다움을 모르네. 쓰읍.”

좋은 테마를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완성도 면에서는 자신이 있었던 루이스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이 잘한 만큼 나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말이지.”

“형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

한국 팀이 서로 위로를 주고받는 동안, 미국 팀의 토마스 웨인 브라운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루이스가 중얼거렸다.

“3위는 미국이구나.”

『미국 팀의 ‘자유로운 여신상’은 이번에도 좋은 반응을 얻었죠?』

앞서 미국 팀은 초콜릿 쇼피스에서 다룬 ‘자유로운 여신상’은 법전을 레시피북으로, 관 대신 조리모 등 다양한 장식을 하는 등 변형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완성한 얼음 조각은 기본에 충실했다.

실제 자유의 여신상과 완전히 동일한 캐릭터를 조형했지만, 자세만 다르다. 유명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양팔을 벌리고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타X타닉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웃겨요. 다시 봐도 재밌다니까요.』

『같은 ‘자유로운 여신상’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초콜릿 쇼피스와 완전히 다른 패러디예요.』

『그래도 보는 사람이 유쾌하고 즐거워지는 감상은 똑같죠.』

방청객들이 손뼉을 치고, 바로 발표가 이어졌다.

『2위는 한국! 섬세하고 유려한 선을 자랑하는 불교식 탑이었죠. 초콜릿 쇼피스와 함께 짝을 지어 그 탑이 돋보이게끔 하는 고양이를 곁들였어요.』

『생동감 있는 동물과 돌로 된 탑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대리석 같은 재질이었던 초콜릿 쇼피스하고 비교되죠? 투명한 얼음으로 만드는 제재를 석조 탑으로 한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루이 형, 멍때리고 있으면 안 되지! 앞으로 나가!”

“어, 어. 그렇지!”

루이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갔다. 만면에 해맑은 미소를 띤 채였다.

『다음 1위는….』

◈          ◈          ◈

다사다난했던 대회가 끝났다. 대기실 앞에 아버지가 기다리는 것을 느낀 임진혁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니까 먼저 가 볼게.”

“그러지 말고 같이 바(Bar)라도 가자. 오늘 2위 한 기념으로 내가 쏠게.”

루이스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마리오가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불러오며 덧붙였다.

“어차피 얼굴도 다 아는 사이잖아. 아버지께도 같이 가자고 하지.”

“아버지께 여쭈어볼게.”

“오케이.”

진혁이 서둘러 문밖으로 나가려는데, 낯선 여자가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임진혁 쉐프님, 혹시 잠깐 시간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진혁은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바로 나가버렸다.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자에게 루이스가 물었다.

『일본 팀의 이로하 씨였죠?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별 건 아닙니다.』

그녀는 어색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루이스는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진혁아, 같이 가자.”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가 열린 세계박람회 건물 앞에는 경연이 끝난 페이스트리 쉐프들을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복작복작 모여있었다. 루이스와 마리오, 진혁은 진혁의 아버지를 앞세워 평범한 관객들 속에 숨어서 빠져나갔다.

그들은 숙소 근처의 시끌벅적한 펍(Pub)에 들어갔다. 초록빛 간판을 내건 붉은 벽돌집에는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어슴푸레한 조명 속에서 각자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이 보였다. 대다수가 외국인이었고,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손님도 보였다.

진혁이 코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게 전체에 은은한 기름 향이 옅게 풍겼다.

“여긴 튀김 요리가 유명한가 봐.”

그가 묻자 루이스가 웃었다. 그는 메뉴판을 보여주며 추천 메뉴를 짚었다.

“여기는 영국식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가 맛있어.”

“영국 요리는 맛없기로 유명하잖아. 누가 영국 요리를 먹어?”

“여기는 얇은 튀김옷을 아주 파삭파삭하게 튀겨내서 아주 맛있거든. 내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메뉴야!”

임운정이 즐거워하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걸 한번 먹어볼까?”

“아니, 일본 가서 중국 요리 먹는 것도 아니고 왜 프랑스에 와서 영국식 밥을 먹냐고요.”

마리오가 투덜거리자, 진혁이 아버지 편을 들었다.

“네 형이 맛있다고 하고, 우리 아버지께서도 먹고 싶다고 하시잖아.”

거품이 뽀얀 흑맥주까지 한 잔씩 시킨 후, 임운정이 운을 뗐다.

“정말로 고생이 많았다. 아주 훌륭해.”

그가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우리, 한국 팀의 미래를 위해서 건배를 한 번 할까?”

“위하여!”

두꺼운 잔들이 챙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난 후, 마리오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오늘 얼음 조각에서 프랑스 팀이 1위를 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종합 순위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텐데, 아까워.”

“그래도 루이스가 2위를 하지 않았느냐? 아주 잘 했다.”

임운정이 흐뭇해하며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루이스는 오히려 임진혁을 똑바로 응시하고서 아쉬워했다.

“거북선이야말로 정말로 잘 만들었는데, 그만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지. 네가 만든 이순신 장군님도 아주 좋았어. 사람들한테 공감을 얻지 못했을 뿐이지.”

“세상사가 다 그렇지. 노력한다 해도 다 잘되지 않는 게 세상이야. 그래도 이 일 또한 지나갈 거다. 진혁이 넌 아직 어리고 앞으로 할 일이 많아.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진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아주 좋은 걸 배워서 괜찮습니다.”

“원래 프랑스 팀은 독일이나 영국하고 라이벌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우리랑 계속 맞서고 있어.”

“무슨 숙명의 라이벌도 아니고, 어디 보자.”

루이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생각해 봐. 우리는 앙트르메 1위, 빵 공예 2위에 얼음 조각 2위라고. 내일 슈가 크래프트에서 어떤 결과를 얻어도, 종합순위 3위 내에는 들 수 있을 거야. 엄청난 성과라고!”

“뭐야, 루이 형. 왜 내 뺑 오 쇼콜라는 빼먹어?”

“맞다. 그것도 결과가 좋았지. 잘했어, 마리!”

“엎드려 절받기는 필요 없어.”

강 씨 형제들이 티격태격하는 가운데에 임진혁이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마리오 너는 그레이비 소스를 곁들인 양고기 스테이크지?”

“아니야! 나도 피시 앤 칩스 먹을 거라고.”

“그래, 그래.”

분위기를 전환해 마리오가 떼를 쓸 수 없게 하는 임진혁을 보며 루이스가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말했다.

“진혁이 너 진짜 사람 다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