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3화
하얀 종이에 선명하게 찍힌 숫자 7을 보여주며 엘리자베스가 웃었다.
『여러분이 계신 바로 여기, 프랑스 팀이네요!』
『알리샤, 부탁합니다.』
안토니오 바트 역시 미소지었다.
알리샤가 프랑스 팀의 작품이 올려진 카트 옆에 서서 카메라맨에게 손짓했다.
세로로 길쭉이 솟아 3m에 달하는 높이의 에펠 탑 옆에 작달막한 알리샤가 서자, 에펠 탑은 더 높아 보였다.
그녀는 에펠탑의 끄트머리 부분을 확인하고 비켜섰다.
『미국 팀이 선택한 주제와 완전히 정반대네요.』
아까 미국 팀의 큰바위얼굴이 자연과 인간을 모델로 하여 납작하고 거대하며 입체적인 것에 비해, 이 소재는 방향부터 달랐다.
인간이 건축한 금속제 건물로, 전송탑으로 쓰이기도 한다.
『프랑스 팀은 에펠 탑이라. 초콜릿 쇼피스로 만든 건 봤는데, 빵 공예로 저걸 저렇게 만드네.』
알버트 그림슨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거 조금 못생긴 버전으로 에펠 탑 앞의 베이커리에서 판매하고 있잖아? 손바닥만 한 크기로.』
『에이, 그런 거랑 비교하면 섭섭하죠. 엄청나게 디테일하게 팠는데? 건축가 출신이 팀에 있다더니 대단하네.』
프랑스에서 선택한 빵 공예 테마의 주인공은 단순했다.
파리의 명물인, 프랑스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에펠탑.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프랑스의 에펠탑.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이 건축물은 높이가 300여 미터에 달한다. 세워질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나 미국에 다른 건물이 세워지며 그 명예를 빼앗겼다.
거친 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바람구멍이 뽕뽕 뚫려있는 철근 구조물인 탓에, 이걸 빵으로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간다.
반죽은 구워지면서 둥글게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저 ‘여백의 공간’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프랑스 팀은 단단한 프레첼같은 과자 빵으로 조립 가능한 벽돌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비교적 각지게 만들어진 것들만 골라내어 1층부터 조립했다. 설탕 시럽을 풀처럼 사용해 조립한 조각들을 차곡차곡 붙였다. 주느비에브가 실제 에펠탑 도면을 입수해, 빵과자로 만들어내면서 생략하고 변형하며 상부의 하중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로 다시 디자인했다.
즉, 아래쪽은 무겁고 진중한 반죽의 과자 빵을 썼지만, 위쪽은 겉모습만 같고 안쪽은 공기가 많이 들어가 얼기설기 얽힌 빵을 썼다.
말하기는 쉽지만 하기는 어렵다. 다양한 반죽의 배합을 시험해 본 다음에, 같은 느낌으로 겉모양을 마무리할 수 있게 더블 페이스트리를 씌우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시험을 거쳤다.
그래서 주느비에브는 자신이 있었다.
『균형을 참 잘 잡았어요.』
『누구라도 알아볼 수밖에 없군요.』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향기 역시 풍부하다.
솔솔 풍기는 갓 구운 빵 특유의 향기는 심사위원들을 흐뭇하게 했다.
아까 나왔던 미국팀의 빵은 향기가 거의 풍기지 않는 단단한 종류의 반죽으로 만들어졌던 데에 비해서, 프랑스 팀은 상단부에 향기가 풍부한 버터 빵을 넣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이다.
『그렇지. 각지고 단단한 금속제 물체는 슈가크래프트나 초콜릿으로 만드는 게 훨씬 편하잖아. 빵보다는.』
주영모는 홀린 듯이 에펠 탑을 바라보았다. 어느 팀이 만들었건 간에 상관없이, 이 빵과자로 만들어진 에펠 탑은 충분히 시선을 끄는 물건이었다.
『빵은 좀 더 곡선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
『이렇게 만들어놓은 걸 보니, 아름답다고밖에 할 수 없군요.』
라이언 윈체스터가 짧게 평했다.
『시몬 리옹, 제자들을 잘 키웠군.』
『각자 알아서 자라는 거지.』
그는 자랑스러운 듯 흠흠, 콧수염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심사위원들이 각자 눈앞의 평가지에 점수를 매기고, 다음 팀이 발표할 때가 되었다.
『이번에는- 2번! 2번입니다.』
“허억, 허억, 허억.”
대한민국 팀 부스의 번호를 들은 강마리오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우리 차례야, 우리 차례라고.”
흥분해 있는 마리오에 비해서 진혁은 너무나 차분한 상태였다.
“매도 빨리 맞는 게 좋다고, 빨리 심사하니까 좋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어? 이런 대회에도 처음 나오잖아! 내가 너보다 대회를 오십 개는 더 나갔을 텐데.”
진혁이 불쌍하다는 듯이 마리오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네 담력이 나보다 오십 배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저기 우리 아버지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언성 높이지 말고.”
“으어.”
진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자꾸 그렇게 이상한 소리도 내고. 이렇게 체력이 안 좋은데 오늘 저녁에 촬영하기로 한 모델링 초콜릿 직접 만들기 유튜브 방송 같은 걸 할 수 있겠어? 그냥 집에서 쉬어야지.”
“아니, 아니! 할 수 있어!”
“자, 그러면 천천히 심호흡하고.”
“후우, 후우.”
진혁이 마리오를 진정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루이스가 중얼거렸다.
“네가 친형 같다.”
그들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알리샤는 거북선 앞에 다가와, 카메라맨과 함께 그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두 개의 이빨을 선명하게 드러낸 용의 머리를 자랑스럽게 치켜든 거북이의 몸은 가시가 돋아난 등갑으로 촘촘히 감싸져 있다. 바다거북이라면 팔다리와 꼬리가 있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북선’이다. 전투용 함선이기 때문에 팔다리 대신 수없이 노가 솟아있으며 양쪽에는 포문이 위치한다. 전면부 머리 아래에는 세 개의 함포와 닻이 있다.
앞뒤 전후좌우로 총 6개의 포를 발사할 수 있으며, 등갑에는 무수한 가시가 돋아나 적들이 갑판 위로 뛰어오르지 못하도록 막는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은… 거북선이라고요? 어떤 것인지 소개가 필요하겠어요. 드래곤의 목을 가진 레비아탄이라고 해야 하나? 거대한 몬스터처럼 보이는데요.』
『거북선이라고, 임진왜란이라는 옛 한국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던 함선입니다. 갑판에 못을 박은 판자를 덮어 보호하여 수전에서 유리하도록 개조한 배로, 고려 시대부터 사용하던 판옥선이라는 배를 더 뛰어나게 개량한 겁니다.』
루이스 강의 해설에 주영모가 거들었다.
『한국의 동전 뒷면에도 있습니다.』
한국 팀에서 미리 제출한 다양한 참고 사진이 스크린에 띄워졌다. 에펠탑이나 큰바위얼굴처럼 유명한 주제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주제다.
마리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서 앞을 바라보았다.
『독특한 소재예요.』
『이런 건, 난생처음 봐.』
알버트 그림슨이 거들었다.
『아까 프랑스 팀의 에펠 탑이 섬세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저 용의 이빨하고 콧구멍, 비늘과 머리에 난 뿔을 봐. 이쪽은 조각품 수준이 아니고 아예 살아있는 것 같아. 당장이라도 브레스를 뿜을 것 같군.』
『확실히 동양의 드래곤과 서양의 드래곤이 다르긴 다르네. 이렇게 잘 만든 동양의 드래곤은 처음 봐.』
『예쁘다기보다는 위압감이 있네요. 이것도 파트를 따로따로 만들어서 조립한 게 분명해요.』
진혁은 흐뭇한 표정으로 심사위원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시와 갑판용 판자를 전부 따로 만들어서 조립했다.
총 팔백 개 이상의 조각들을 별개로 구워내서 조립한다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실제 거북선 모형을 사다가 그것을 분해하고 진혁이 반죽으로 만들어 구워내고, 다시 그것을 만들어 보는 연습을 계속했다.
임진혁에게도 쉽기만 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취미로 레고를 조립하거나 하면서 이것저것 만드는구나.’
그는 어렸을 적 과학상자로 이것저것 만드는 세대는 아니었다. 초등학교의 다른 아이들은 과학상자로 이것저것 만들면서 경시대회에 출전하거나 했지만, 진혁은 아버지의 빵집에 구경하러 가서 빵을 얻어먹었다.
‘이런 걸 미리 알았으면, 어렸을 때부터 빵으로 이것저것 만들면서 놀았을 텐데. 재미있었을 거야.’
심사위원들이 하는 말은 출연자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되어 있다. 일부러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나중에 방송분을 보면서 들어야 알 수 있다.
하지만 진혁은 뛰어난 청력을 통해서 심사위원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귀를 기울였다.
전반적으로 호평이었다.
‘디테일을 살리는 데 집중하길 잘했어.’
잘 구운 빵 냄새를 풍길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실제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겨우 하루 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전쟁을 앞에 두고 필사적으로 전투함선을 완성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역시 여기에 빵 냄새를 풍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위험한 전쟁용 함선이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를 풍겨서야 위엄이 서지 않지.’
진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즐거운 분위기가 계속해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음은 3번! 3번 국가는… 대만입니다!』
『빵으로 만든 벽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이군요.』
대만에서 제출한 작품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빵 공예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지면 평면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을 공예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단호하게 말했다. 중국계 심사위원, 유난 취가 옹호해주려 했다.
『그림은 확실히 예쁩니다.』
말레이시아 심사위원인 스테피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냥 가루를 뿌리기만 한 거잖아?』
『벽돌을 쌓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차라리 만리장성 같은 걸 했다면 모를까, 저건 그냥 벽인데요. 벽에 낙서 좀 해놓고 공예라고 하다니, 초콜릿 좀 뿌린 바게트를 내놓고 이게 바로 공예다! 하는 것처럼 어이없는 짓이에요.』
『벽돌이 하나하나 균일하고 깔끔하기는 합니다. 빵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는 확실히 곡선보다 직선이 더 어렵죠. 에펠 탑이 만들기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림보다 저, 빵 벽돌의 완성도에 주목해 주십시오.』
유난 취가 손가락질했다.
『하나하나가 전부 같은 크기로, 같은 색깔입니다. 그리고 저기에 뿌려진 하얀 가루나 그림의 형상은 나중에 만든 게 아닙니다. 반죽 단계에서 디자인한 거죠.』
『빵 자체에 미리 무늬를 찍어낸 거군.』
『디자인 솜씨는 나쁘지 않다고도 할 수는 있겠어요.』
심사위원들은 벽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점차 호평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치앙린이 꺼낸 말이 좋지 않았다.
『혹시 저희가 만든 빵과자 샘플을 드셔 주신다면, 이 빵 벽돌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맛있다는 점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맙소사, 장치앙린 쉐프! 유감스럽게도 대회의 공식 입장은, 앞으로 심사기준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의 요소는 평가하지 않겠다는 점입니다. 공지사항을 확인하지 않았나요?!』
어제 임진혁의 초콜릿이 불러일으킨 사건 때문에, 대회의 명예 자체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한 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한 사항이었다. 즉 더이상 공식적으로 맛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대회를 장난처럼 생각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