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2화
임진혁은 우아하고 유려하게 손목을 한 번 가볍게 흔들었다. 그가 단지 붓질을 한 번 했을 뿐인데 거북선의 절반이 자연스럽고 우아한 광택으로 반들반들해졌다. 이제 얼음 조각의 최종 마무리를 위해 겉면을 긁어내고 있던 루이스가 감탄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넌 그림을 그려도 잘 그릴 것 같다.”
“케이크나 쿠키 디자인용 스케치라면 자주 하고 있긴 한데.”
“그거 말고, 아예 정통 회화 말이지.”
루이스의 말에 마리오가 끼어들었다.
“그런 걸 해서 뭐해? 먹을 수도 없는걸.”
실용적인 것이 좋긴 하다. 드물게 공감하며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붓질을 거듭하자 거북선은 무대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광택이 조금 덜한 편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한데.”
“아니. 지금 충분히 멋있어! 이순신 장군님도 무덤 속에서 기뻐하실걸.”
“음….”
진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무인의 감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애병을 빵으로 만들어서 설탕물을 발라 전시하는 셈이다.
‘누구라도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지만.’
당장 진혁의 애검(愛劍)이었던 천마삭월검(天魔朔月劍)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숙수 중의 한 명이 그를 존경한다면서 꿀을 바른 월병(月餠)으로 천마삭월검을 만들어 바친다면 어떨까? 팥소를 넣은 붉은 떡을 깎아서 혈도객의 혈도(血刀)를 만든다면 어떨까?
누구라도 감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무기를 모욕했다며 쳐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마리오가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진혁아, 저기 너희 아버지 계시다. 보여?”
“아까부터 보고 있었어.”
플랜카드를 양손에 든 아버지가 열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마리오가 상을 탔을 때는 펄쩍펄쩍 뛰기도 하셨다.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 계속 빵 만들고 있었잖아.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아버지를 느끼기 위해 고개를 돌려 바라볼 필요는 없다. 기감을 퍼트려 아버지 역시 관찰하고 있었던 진혁이 피식 웃었다.
“우리 아버지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정도로 연약하신 분이어서 말이야. 항상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고.”
“어이어이. 보통 그 반대라고. 그나저나 진혁이 너 오늘 조리복 안에 입고 있는 그 빨간색 옷은 뭐야? 카라 사이로 보여.”
마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무대는 조명 때문에 덥잖아. 그런데 안에 셔츠를 덧입다니. 혹시 감기 기운이라도 있어?”
루이스가 염려했다. 진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챙겨주신 옷이라 입고 왔어. 그보다 저기 봐, 알리샤 쉐프님이 오고 계셔.”
“자, 자. 사설은 여기까지. 이거 제출하게 카트 위에 올려 줘. 조심스럽게.”
“오케이!”
루이스는 자신이 만든 탑을 만족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빵 공예 먼저 심사하지? 사실은 얼음 조각 먼저 심사해도 좋은데. 자신 있다고.”
“네에, 네에. 우리 거북선 빵도 자신 있습니다.”
-도그르르르륵.
카트를 밀고 온 알리샤가 거북선 빵을 보면서 짧게 감탄사를 토했다.
『아름답군요.』
『그렇죠?』
마리오가 씨익 웃었다. 알리샤는 미소를 짓고서 다시 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 ◈ ◈
알버트 그림슨이 말했다.
『주영모 쉐프는 좋겠어.』
『왜?』
『한국 팀, 태도가 아주 좋아. 알리샤가 빵을 가져오면서 미소를 보이는 건 처음 봐.』
단순한 보조 진행자처럼 보이지만, 알리샤 역시 심사위원 중의 한 명이다. 참가자들은 모르지만, 당연히 다른 심사위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알리샤는 경연 참가자들이 직접 만든 빵을 제출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펴보고 기록한다. 그녀가 매기는 점수는 최종우승자를 선발할 때 참고가 된다.
만점이 100점이라고 가정하면 1점 정도의 역할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두 팀의 실력이 비등비등하게 된다면 최종적인 승부를 가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
『뭐, 저게 내가 가르친 건 아니지. 그냥 쟤들이 열심히 하니까 알리샤 역시 좋게 보는 거잖아.』
『알리샤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말이지.』
알버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라이언 윈체스터가 끼어들었다.
『저번 대회하고 비교해서 이번에는 동아시아 쪽에서 약진하고 있어. 한국에 대만, 일본까지 말이지.』
주영모가 떨떠름해 했다.
『글쎄, 대만이 동아시아에 포함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 팀의 실력이 좋아졌지. 한국 국내 대회 수준이 높아지기도 했어. 젊은 세대들이 약진하고 있으니, 1년 후에 있을 국제 빵 월드컵 대회에서도 좋은 성과가 기대되겠어.』
그렇다.
임진혁도, 마리오 강도 놀랄 정도로 젊다. 앞으로 계속 대회에 출전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영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우리 대회, 방향이 완전히 망가졌잖아.』
그가 투덜거리며 말하는 데 시몬 리옹 역시 거들었다.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는 제과제빵 전체를 통틀어 국제적으로 최고의 대회야. 그러니 제일 정확한 심사 기준을 통해 우수한 페이스트리 쉐프를 선발해야만 해.』
시몬 리옹이 동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주영모가 있는 대로 이마를 찌푸렸다.
시몬이 다시 말했다.
『초콜릿 쇼피스 심사를 할 때, 아예 맛을 보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야. 그것 때문에 괜히 시끄러워진 거지.』
‘뭐래, 자기도 좋다고 먹어놓고서.’
주영모가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독일계 페이스트리 쉐프인 오베르슈타인이 말했다.
『아니, 그게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애초에 초콜릿 쇼피스 대회 때 쇼피스를 제출하며 맛도 봐달라 부탁했던 팀의 것부터 맛보지 말았어야 했다고.』
안토니오 바트가 끼어들었다.
『우리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나? 지금은 새로 제출한 빵 공예를 심사할 시간이야. 출연자들이 언제까지나 자네들을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탁상공론하는 동안 얼음 조각이 다 녹아버리겠네.』
그가 서늘한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말을 마쳤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랜덤한 순서로 심사를 하겠어요.』
그녀가 제비뽑기 상자를 보여주며 방긋 웃었다.
『안토니오, 제비를 뽑아주시겠어요?』
안토니오 바트가 씨익 웃으며 상자 속에 손을 넣었다. 그가 과장된 태도로 제비를 뽑아서 거기에 쓰여 있는 글자를 읽었다.
『처음에는 USA! 미국부터 심사하겠습니다.』
『오른쪽 끝부터 심사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결과네요.』
엘리자베스가 씩 웃었다.
『알리샤, 부탁해요.』
알리샤가 무대 위로 다시 올라가, 미리 옮겨두어 놓았던 미국 팀의 카트 앞에 섰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옆에 있는 작품을 소개하듯 가리켰다.
『제일 처음으로 심사받을 작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카메라맨이 다가와 가까운 곳에서 다양한 각도로 빵을 찍었다. 무대 위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에 작품 사진이 올라갔다. 큰바위얼굴이 선명하게 조각된 거대한 빵이다.
『푸풉…!』
『크흐흑.』
『웃겨요!』
관객석에서 와하하, 하는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빵 경연장이 아니라 코미디 무대라도 된 것 같았다.
심사위원들 역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항상 표정 변화가 별로 없던 라이언 윈체스터는 물론이고, 중국 팀이 탈락한 이후로 표정이 나빴던 이도 마찬가지였다.
시몬 리옹도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띄고 있었다.
『리처드 베이커 쉐프, 작품을 소개해주세요.』
『작품명은 러시모어 브레드 마운틴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네 사람의 얼굴이 바위에 조각된 거죠!』
『하지만 실제 대통령 얼굴과는 닮지 않았는데요. 아브라함 링컨 코에 있는 저 왕 점은 뭐지요?』
커다랗게 새겨진 빵 얼굴의 콧방울에 커다랗고 까만 점이 박혀있다. 입가를 살짝 올리고 있는 것도 있어, 실제 러시모어산의 얼굴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조금 더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분위기가 되었다.
『자유로운 여신상도 그렇고, 미국 팀은 언제나 즐거워서 좋군요.』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만의 캐릭터가 확실히 있어요.』
시몬이 투덜거렸다.
『역시 양키들이란, 진지한 대회에 가벼운 걸 가지고 나오는군.』
『무슈 시몬! 말이 심하군요.』
엘리자베스가 나무랐다.
『가벼운 애들이 가벼운 걸 만드는 게 뭐가 좋다는지 모르겠군. 저들은 빵 공예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시몬 리옹이 말썽 피우는 학생들을 다스리듯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평소 봐오던 형상을 패러디해서 우리 앞에 보여주는 것 자체에 예술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신들의 영웅을 스스로 희화화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아. 성조기를 팬티로 만들어 파는 나라답다고나 할까. 그 자체를 즐기는 거지.』
알버트 그림슨이 말했다. 꼬장꼬장한 영국인인 그는 항상 전통을 중시하는 타입이었는데, 의외로 미국인들의 편을 들었다.
주영모는 혼자 생각했다.
‘미스터 그림슨도 어지간히 시몬이 싫은가 본데?’
물론 그가 싫다는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으니 칭찬하고 있는 것일 터다.
스테피 역시 거들었다.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한 걸 공예라고 할 수는 없어요. 좋은 ‘공예’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지금 이 빵공예 제품을 통해서 ‘웃음’과 ‘유쾌함’을 얻을 수 있다구요. 지금 보고 계신 여러분도 웃고 있지 않나요?』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습기는 해.』
『아브라함 링컨은 콧방울에 왕 점이 있고,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찰리 채플린 같은 가짜 콧수염을 달고 있잖아. 할로윈날 하는 가장 같기도 한데. 루즈벨트 얼굴이 엄청나게 진지해서 더 웃겨.』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웃었다.
『조지 워싱턴은 특별히 얼굴에 뭘 달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냥 활짝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이네요.』
안토니오 바트는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얼굴의 디테일도 그렇고, 주름살 한 줄 한 줄과 귓바퀴까지 특징을 잘 살렸어. 확실히 세공 기술이 좋아.』
『실제 돌 색깔을 내기보다는 실제 사람 얼굴처럼 색깔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군. 그래서 저 왕범이나 수염이 더 우습고 재미있는 거야.』
『여기, 구레나룻이나 수염처럼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도 얼버무리지 않고 확실하게 묘사해두었네요. 입술 주름도요.』
『얼마든지 진지하게 갈 수 있는 실력이 있지만 재미있게 가는 거지.』
전반적으로 호평이 이어지며 심사가 끝났다. 어제와는 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여기까지 미국 팀의 러시모어 브레드 마운틴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국가를 살펴볼게요.』
『이번에는 엘리자베스가 제비를 뽑아보세요.』
『그럴게요.』
붉게 칠해진 손톱 아래 손가락이 제비뽑기 상자 안에 들어갔다. 네일과 같은 색깔로 칠해진 붉은 입술이 살며시 치켜 올라가며 미소를 짓는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이번에는 어떤 국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