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1화
이곳 무대 위에 서 있는 이들 모두에게 각자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하고 싶다는 목표, 승리해서 돌아가겠다는 목표, 우승하고 말겠다는 목표.
그리고 ‘소외되고 싶지 않다.’는 목표를 가진 자가 있었다.
브라이언 신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뺑 오 쇼콜라 부문에서 한국 팀의 우승 소식을 들은 지도 한참 지났지만, 아직도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것만 같다.
『한국이 1위라….』
‘내가 미국에 입양되지 않고, 저기에 있었다면 나도 저들 중의 한 명이었을까?’
그는 항상 아웃사이더였다. 가족을 찾고 결혼을 하고,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조금 나은 듯했으나 잠시뿐이었다. 달라질 것은 없다.
친부모와 친형제는 얼굴이 닮았을 뿐 지극히 낯선 사람이다. 아내가 되어 같이 살기 시작한 연인은 연애만 하던 때와 달리 티격태격하며 부딪히는 부분이 있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그는 리처드 베이커를 힐긋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에 덩치 큰 남자는 이제 큰 바위 얼굴의 입술을 도톰하게 깎고 있다.
‘차라리 그냥 코카서스 인종으로 미국에 태어났으면 편했을 텐데 말이지.’
한국이든 미국이든 명확한 뿌리와 소속감을 가진 이들이 부럽다. 브라이언은 아브라함 링컨의 콧구멍을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섬세하게 파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거 묘하게 중독성 있네.’
살살 긁어내면서 콧방울 모양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니 집중해야 한다.
오른쪽 콧구멍을 전부 파내고, 왼쪽 콧구멍을 갓 시작했는데 베이커가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브라이언! 이제 이번 대회 끝나면 자네도 신혼생활로 돌아가겠네.』
『뭐어.』
『한창 행복해야 할 신혼 시기에 이렇게 장기간 자리를 비우다니, 대회가 나빴네. 나처럼 빵이랑 결혼한 사람은 그런 문제는 없지! 하하하.』
리처드 베이커는 분명히 좋은 사람이었지만 가끔 이렇게 선을 넘어올 때가 있다.
신혼에 반드시 행복해야 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결혼 생활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
당신의 솔로 생활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순간적으로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빵이랑 결혼했다고 하면, 빵을 먹기는 좀 그렇지 않나.』
그러다가 실수로 콧방울을 조금 깎아내 버렸다.
『What the….』
저절로 욕설을 내뱉을 뻔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한 실수를 면밀히 살폈다. 콧방울 바깥쪽이 아주 제대로 깎여버렸다.
『이거 디자인을 좀 고쳐야 할 것 같은데.』
한창 작업을 하다 보면 잊어버리기 마련이지만, 그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도 나중에 다큐멘터리 제작 시 사용할 영상을 위해 끊임없이 촬영 중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언제나 신경 써야 해.’
그들만의 사회에 소속되기 위해서 겉모습을 꾸며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콧구멍이 깊이 파인 것이다.
『웬일이야? 브라이언 네가 실수를 다 하고.』
『하하.』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야!’
브라이언은 섬세하게 손을 움직여 마저 콧방울을 다듬기 시작했다. 한쪽이 아주 조금 파인 정도니까 아직은 수습할 수 있다. 그러다가 실수로 손이 미끄러졌다.
『으아악!』
이번에는 오른쪽 콧방울 전체가 날아가 버렸다.
콧구멍 안쪽이라면 빵 반죽을 다시 넣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겠지만, 이건 이제 수습할 수가 없다.
『이런 젠장!!』
감정이 격해져 얼굴을 일그러뜨린 브라이언이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 안았다.
‘이제 완전히 다 망쳤어. 다 틀렸어.’
리처드와 토마스가 놀라서 브라이언을 주목했다. 고개 숙인 브라이언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다 틀려먹었어.』
리처드가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이거 말이야?』
사다리 위에서 얼음 조각을 하고 있었던 토마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진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면 어때?』
토마스가 속닥속닥 설명하자 리처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재밌겠는데. 여기 깎여나간 부분에 채워 넣을 수도 있고, 다른 세 사람 얼굴에도 다른 방식으로 포인트를 주자.』
『어?』
『그래. 자유로운 여신상 역시 원래 자유의 여신상답지 않은 모습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 어레인지는 괜찮다고.』
『…그런가.』
리처드 베이커가 검 페이스트를 반죽하기 시작하며 웃었다.
『조금쯤 실수해도 괜찮아. 팀이니까.』
『고마워.』
풀죽은 미국과는 달리, 대만 팀은 아주 의기양양해 있었다.
『류웨이. 지금 하고 있는 얼음 조각이 아주 느낌이 좋은걸? 승천하는 비룡의 비늘까지 아주 세심해.』
『용의 콧수염까지 깎을 생각을 하다니 대단해. 정말로 섬세한 손길이야.』
장치앙린과 리우마오유에게 칭찬을 들은 류웨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떤 일이든지 준비를 잘하면 성공하고,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망하는 법이야. 두 사람이 도와주어서 3D 입체 모델을 연습해 보고 위치를 잡아본 것이 큰 도움이 되었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이 하늘을 향해 얼굴을 쳐든 용은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어모았다. 이마에 네 개의 뿔이 나 있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두꺼우며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한 데다가 콧수염 역시 있다. 그는 턱 아래의 역린(逆鱗)까지 섬세하게 조각했다. 다른 비늘들과 달리 거꾸로 난 이 비늘은 용에게 있어 아주 예민한 부위로, 함부로 건드리면 큰 화를 사게 된다고 한다.
『장 대형의 빵 공예도 느낌이 좋다니까.』
류웨이가 사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지? 선이 아주 마음에 들어. 오늘 뺑 오 쇼콜라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까, 메이링에게 가서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대만에서 구워낸 빵은 거대한 구조물처럼 보였다. 각지게 구워낸 네모 빵들을 벽돌처럼 쌓을 예정인데, 겉에 꽃과 나비의 모양이 보였다. 미리 플라스틱 모양 가리개를 올려놓고 구워서, 벽돌 하나하나에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아직 벽돌은 절반 정도밖에 쌓지 못했지만 다 쌓여져 그림이 합쳐지면 또 다른 정취가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입체적인 빵을 만들고 있는 동안, 그는 홀로 벽을 구상하고 그 벽에 그려지는 2D적인 미술을 하고 있었다.
벽돌이 차곡차곡 쌓여가는데 리우마오유가 물었다.
『장 대형. 다들 조각하는데 혼자 당당하게 회화를 선택한 이유는 뭐야?』
장치앙린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는 게 재밌잖아.』
『그것뿐?』
『아니. 내가 만들 수 있는 제일 맛있는 빵을 보여주고 싶어져서.』
이 직육면체 모양의 벽돌 빵은 저온 숙성시킨 특별한 바게트로, 장치앙린만의 오리지널 레시피다. 백여 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혼자 이것저것 배합을 시험해 보다가 만들어낸 빵으로, 시그니처 디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버터나 누텔라 등 다른 소스를 바르지 않아도 빵 자체만으로 맛있을 뿐만 아니라 건강하기까지 하다.
『장 대형, 어젯밤 갑자기 빵 공예를 할 때 이 바게트로 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잖아. 이유가 뭐야?』
『자극받아서?』
『응?』
『초콜릿 공예가 맛있으면, 빵 공예도 맛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다들 장식하는 데만 정신 팔려 있는 동안 난 맛있는 빵을 내놓을 거야.』
장치앙린이 씨익 웃었다.
『7번 팀이나 2번 팀만 맛보기용 견본을 내놓으라는 법은 없잖아? 이미 선례가 있으니 우리가 샘플을 내놓아도 문제는 없어.』
『여기 있는 이 벽돌들은 샘플이구나.』
『그렇지, 심사위원들의 위장을 달콤하게 달래줄 수 있는 사랑스러운 빵들이지.』
◈ ◈ ◈
“탑 만든 사람 다 죽어라.”
얼음으로 탑을 깎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석가탑이라고 불리고 있는 불국사 3층 석탑은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모양으로 ‘탑의 기준’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2층과 3층의 옥개석까지 전부 깎아내고 이제 상단의 금속 장식부를 다듬으면서 루이스가 투덜거렸다.
마리오가 핀잔을 주었다.
“이미 다 죽었어.”
“나도 만들다가 죽을 것 같다.”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 공원에서 작업할 때와는 또 다르다. 무대에 비추어지는 조명 때문에 무대 위의 온도가 생각보다 높았다. 루이스가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진혁아, 여기 이 고양이 너무 크지 않아?”
“음…. 우리 집 고양이랑 비슷한데.”
임진혁은 진호의 크기를 떠올렸다. 환골탈태 전에는 조그맣고 비리비리했지만 최근에는 외출 길에 스스로 쥐나 새를 사냥하는 등 잘 먹더니 부쩍부쩍 커졌다.
“우리 집 고양이는 거의 10kg은 될 법해서, 다른 고양이들보다 좀 더 큰 편이긴 한 것 같아.”
마리오가 뜨악해하며 물었다.
“엑? 하지만 진혁이 네가 만든 초콜릿 쇼피스에 있던 고양이는 그렇게 크지 않잖아? 네가 키우던 고양이를 만든 줄 알았는데.”
나비를 잡으려고 뛰어오르는 순간 앞발에서 발톱이 튀어나오는 디테일 같은 점이 세세해서, 당연히 직접 키우는 고양이를 모델로 한 줄 알았다며 마리오가 중얼거리자 진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럼 지금 용을 얼음 조각하고 있는 대만 팀은 집에서 용을 키우냐? 집에서 뭘 키우는지랑 실제 무대에서 만드는 건 아무 상관 없어.”
“그래도 키우던 고양이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 모습이 무대에 영원히 남잖아.”
“걔는 무대에 안 남아도 돼. 건강하게 오래 살기만 하면 되지.”
‘어머니가 걱정하시지 않게.’
“진혁이 너도 고양이를 진짜 아끼는구나. 나도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데, 자리를 오래 비우니까 온종일 혼자 있을 걸 생각하면 아예 데려오지를 못하겠더라.”
루이스가 사다리 너머에서 외쳤다.
“그래,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마. 넌 한국이랑 프랑스를 계속 왔다 갔다 하니까 반려동물을 기를만한 상황이 안 된다고.”
“형! 쓸데없는 데 참견하지 말고 석가탑에 집중해!”
루이스가 흐뭇하게 웃으며 한 손을 흔들었다.
“다 했어, 이제 내려가서 거대 고양이만 마무리할 거야.”
그가 사다리를 내려오는 동안, 임진혁과 강마리오는 거북선의 등 위에 가시 꽂힌 육각형 판 조립을 마쳤다. 성인이 양팔을 벌려도 감쌀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함선이다. 양쪽으로 비어져 나오는 노를 하나씩 하나씩 끼워 넣으며 마리오가 또 물었다.
“진혁아, 왜 키우던 애 말고 조그만 고양이로 한 거야?”
“모델링 초콜릿 반죽이 생각보다 여유가 없어서.”
“아. 양이 모자랐구나.”
마리오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빵 조립을 마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리오가 문득 물었다.
“왜 형은 거대 고양이로 한 거야?”
루이스가 만들고 있던 것은 진혁이 만든 초콜릿 고양이에 비해서 두 배는 더 덩치가 커다란 고양이 얼음 조각이었다.
마네키네코처럼 오른 앞발을 들어 올린 형태가 되도록 팔을 다듬고 있던 루이스가 대답했다.
“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 조금이라도 덜 깎으려고 그런다.”
임진혁은 따로 만들었던 거북의 머리 모양이 거북선에 합쳐지도록 가져와 위에 꽂았다. 윗판과 아랫판, 그리고 부목이 맞물리면서 딸각 소리가 났다.
“다 됐다!”
“테스트로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보기 좋은데?”
마리오와 루이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제 겉에 광택이 더 나게 해줄 시럽을 바르기만 하면 된다.
진혁이 붓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