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0화
“끄으흐으으윽.”
마리오가 떨리는 손을 떼고 어깨를 들썩였다. 아까 받은 상이 믿어지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현실처럼 느껴지는지, 혼자 감동에 겨워 있었다.
감격하는 건 좋지만 빵을 만들 때 모양이 흐트러지는 것은 곤란하다.
진혁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빵에 눈물 떨어지면 모양 망가진다? 가서 울든지 아니면 여기서 반죽하든지 하나만 해.”
“그래도 금메달이라니…. 학창시절에 나한테 넌 아시아에서 와서 빵 맛도 모른다고 했던 놈들 전부 이 방송 보고 있어라. 크크큭….”
감동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진혁이 그냥 웃어버렸다.
“풉.”
루이스가 참견했다.
“마리오! 진혁이한테 방해되잖아. 웃거나 울거나 둘 중 하나만 해. 빵에서 손 떼고.”
“아니야, 나도 빵 공예 할 거야. 이순신 장군님의 유지를 받들어 거북선을 만드는 데 이 한 몸 바치리!”
의기양양해져서 몸을 움직이는 마리오를 보며 진혁이 웃었다.
“…의욕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우승 후보조차 아니었던 한국팀이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는 동안, 원래 우승 후보였지만 존재감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팀들 역시 있었다.
일본팀은 회심의 음양 앙트르메에서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고, 초콜릿 공예에서는 탈락을 면했다. 하물며 자신 있던 뺑 오 쇼콜라에서도 3위 권에 들지 못했다.
「이번에 뺑 오 쇼콜라는 진짜 자신 있었는데. 다른 재료에서 차별화를 둔 것도 아니고, 일부러 껍질하고 속살 차이가 많이 나게 해서 업그레이드했잖아.」
빵 공예와 얼음 조각을 하는 도중에도 저절로 힘이 빠질 일이다. 어깨가 축축 처져 있는 나카무라를 보며 후유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겉껍질이 너무 파스슥 떨어져 나가서 그런 것 같아. 먹다가 묻으면 별로잖아.」
「페이스트리는 원래 바삭한 거라고! 그 바삭바삭한 점을 강화한 건데.」
나카무라는 우울해하며 부정적인 발언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역시 청수사(淸水寺)보다 금각사(金閣寺)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체코 팀에서 금괴 케이크를 내놓았을 때 다들 좋아했잖아.」
「금괴 케이크는 점수도 그리 높지 않았어. 보기에만 좋지 맛은 별로였을 거야. 너도 금박 아이스크림 먹어 봤잖아?」
교토의 금각사 앞 식도락 거리에서 파는 금박 아이스크림은, 소프트아이스크림 안에 팥을 넣고 겉에는 금박을 씌운 지방 명물이다. 그다지 맛은 없다.
「내가 금박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걸 어떻게 알았어? 이로하. 너희 학교도 수학여행은 교토로 갔어? 그때 마주쳤나.」
나카무라 타다요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묻자, 이로하 후유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나카무라.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야.」
「…아하하, 그랬지.」
교토의 금각사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건립된 불교 사원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문화유산이었으나, 한때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새로 지어졌다. 다시 지을 때 금 20kg을 넉넉히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은 상하부의 벽면과 누각이 금빛으로 빛난다.
「금색이 반짝반짝한 게 멋있잖아.」
「이미 청수사로 하기로 해서 빨간색 반죽도 다 굽고 있잖아! 왜 이러는 거야!」
금각사에 금박이 있는 만큼, 청수사에도 독특한 특색이 있다.
첫 번째는 지붕이 기와지붕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송나무 껍질(檜皮葺)을 이어올린 것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질감이 일품이다. 소보루빵 위에 소보루를 올리듯이, 따로 만든 부스러기 빵 반죽을 따로 구워낸 후 지붕 위에 흩뿌린 다음 균일하게 짓누르고 긁어내 모양을 표현할 예정이었다.
두 번째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맞추어 만든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각 빵을 구워내 틀처럼 끼워 만드는 데에 적합하다고 모두가 동의했다.
설탕 송곳이나 못 따위를 사용하지 않고, 접착용 설탕 시럽만 발라서 끼워 맞추어 붙일 계획이다.
「이제 다 구워졌고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새삼스럽게 왜 불평이냐고.」
후유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와 나카무라 타다요시는 고등학교만 같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같은 마을에 살았고 유치원과 소학교, 중등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도쿄제과학교까지 모두 함께 다녔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다른 회사에서 일했지만 이번 대회에 출전할 때 다시 만났다.
‘일편단심 빵돌이에 소심하기 짝이 없는 건 알고 있었는데. 같은 학교를 졸업한 걸 모르는지는 몰랐네.’
중학교 때까지는 내내 다른 반이었지만 고등학교 때에는 3년간 같은 반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지켜보았다. 이름을 모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얼굴까지 모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새삼스럽지만 힘 빠진다. 후유가 붉은 빵을 나무젓가락처럼 각진 기둥이 되게 다듬으며 들리지 않게 포옥, 한숨을 쉬었다.
바로 옆에서 얼음 조각을 하고 있던 겐지 히카루가 신나서 멋대로 떠들어댄다.
「타다요시, 잘 할 수 있어!」
얼음 조각용 끌을 한 손에 쥐고서 응원하듯 휘두르는 겐지의 말에 나카무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잘 할게!」
「그거 그렇게 휘두르다가 떨어뜨리면 위험하다고! 당장 손 내려!」
후유가 투덜거리자 겐지가 대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후유 공주님은 잔소리가 많다니까.」
「잔소리가 아니라 안전 수칙이라고!」
2.5m 정도의 높이, 나무사다리 위에서 작업하는 겐지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어-이! 잘 하자고!」
겐지가 허공에 하이파이브하자, 나카무라 역시 겐지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나 빼고 둘이서만 소년만화 찍지 마.’
청수사의 기둥이 될 빨간 빵을 여덟 개 다듬고 나서는 지붕 밑판을 만든다. 지붕 밑판 역시 붉은색이다. 나카무라는 지붕에 올릴 노송나무 껍질 역할을 할 갈색 빵부스러기들을 손질하는 중이다.
그는 소심한 데다가 유머 감각도 없고, 눈치도 없고 사람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일본식 빵에 미쳐있어, 빵 굽는 건 제대로 한다. 남의 나라를 따라 하는 빵은 어려워하지만, 살짝 어레인지하여 개발해내는 것엔 자신 있어 한다.
이로하 후유는 어렸을 적부터 쭈욱, 그런 나카무라 타다요시를 좋아해 왔다.
‘유키코 선배님이 가르쳐 주셨지.’
자신도 이름을 붙이지 못하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선배가 알려주었다. 도쿄제과학교 시절 룸메이트였던 유키코 선배는 엄청난 사람이었다. 누구나 첫눈에 놀랄 정도로 매력적인 미인인 데다가 능력까지 있다. 제과 실기에서는 상위 1, 2위를 다투었고, 이론 시험에서도 중상위였다.
여러 제과회사에서 스카웃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는데, 졸업 후 갑작스럽게 일본을 떠났다가 최근에 연락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로하 후유가 유키코 선배에게 고민 상담을 하게 된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유키코 선배가 인기투표에서 1위를 한 날이었다. 방에 돌아온 선배에게 축하한다고 하자, 그녀는 투표 결과를 듣고서 코웃음을 쳤다.
「당장 실기평가가 내일모레인데 잘도 투표 놀이 따위를 할 시간이 있네? 그럴 시간에 반죽이라도 한 번 더 하지그래?」
막연히 ‘선배는 예뻐서 1등 해서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후유에게 있어 충격적인 일이었다. 유키코 선배가 투덜거렸다.
「내가 원하는 단 한 사람에게만 인기 있으면 됐지, 이런 건 쓸데없어.」
「선배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너는?」
「저는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걔가 엄청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좋아하는 거라면 좀 더 편하고 즐거운 감정이어야 하잖아요. 이것저것 좋은 것도 해주고 싶고, 만나서 친해지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고, 그런 거 아닌가요?」
「어떻게 신경 쓰이는데?」
「…그냥 없으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고, 같은 자리에 있으면 항상 쳐다보고 싶고.」
「좋아하는 거네」
「이게요?!」
「그게 바로 좋아하는 감정이야. 내가 3000자 이내로 설명해 줄 수 있어.」
「3000자는 우리 제빵사 서술 시험 분량이잖아요?!」
「그래. 종일 3천 자 쓰기 연습하다 보니까, 호호호.」
선배가 장난치며 웃었다.
「후유가 비밀을 얘기해줬으니까 나도 하나만 이야기해 줄게.」
「예?」
「난 재민 씨가 좋아.」
「그 한국인 유학생 선배요?」
유키코 선배는 쟁쟁한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라도 고를 수 있었다. 유명한 제과사 사장의 아들이라든가, 학생회장 선배들도 유키코 선배에게 고백했었다. 하지만 정말 뜬금없는 사람을 골랐다.
그리고 동화 속 주인공처럼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함께 한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후유는 유키코 선배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되는지도 모르겠다.
프로페셔널한 페이스트리 쉐프의 세계.
졸업하고 다른 회사에 입사한 시점부터 이미 다시 인연이 닿을 날은 없다고 포기했다.
그렇지만 빵 공예 아트 개발을 위해 일하던 중, 우연히 사내 대표로 일본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1등 상을 받고 나서 쿠프 드 몽드의 일본 대표로 선정되었고, 거기서 나카무라 타다요시를 또 만났다.
‘그때 유키코 선배에게 질문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 아니면 사내 대회 따위에 나가지 않는 게 좋았을까. 쿠프 드 몽드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하는 편이 좋았을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더라도 항상, 그녀의 시선은 타다요시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도 첫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유치원 놀이터에서 혼자 넘어져서 울고 있던 타다요시에게 가서 ‘가서 손을 잡아줘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다가가던 참이다. 그는 갑자기 혼자 벌떡 일어나서 하늘을 향해 외쳤다.
「괜찮아!!」
그 모습이 너무 어이없어서, 그다음부터 걔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애는 너무 둔해서 후유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로하, 잘 됐어?」
새빨간 빵 기둥들이 얽혀 지탱할 지붕, 지붕의 무게를 감당할 대들보, 그리고 누각 양측을 지탱하는 기둥에 감쌀 새하얀 판자들까지 전부 다 만들었다.
후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단부터 조립하면 돼.」
‘잘 되고 있어. 그런데 우리 이제 서로 이름으로 부르면 어떨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후유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저 눈치 없는 겐지는 합숙이 시작한 초기에 이름으로 부르자고 제안했고, 나카무라가 수긍했다.
‘이미 늦었어. 나도 그때 말해야 했는데.’
이번 대회가 끝나면 회사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다른 후유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나카무라를 만날 일이 없다. 그녀는 이를 갈았다.
‘성이 아닌 이름으로 호칭하고 싶은데! 내 이름도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연습도 다 끝나버렸는데 실패했어.’
서로 나카무라 상(さん)과 이로하 상(さん)이라고 부르는 관계에서 ‘나카무라’와 ‘이로하’라고 부르는 관계가 되기는 했다.
가깝지 않은 직장 동료라면 성을 부르는 게 당연하고, 조금 친하더라도 성에 상(さん)이나 사마(さま)같은 경칭을 붙이지 않고 성을 부르는 정도라면 꽤 친한 편이다.
합숙에 가까운 반년간의 시간 동안, 이제까지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사실은 더 친해지고 싶었다.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이로하 후유는 다짐했다.
‘빵을 좀 더 잘 만들어서, 내일의 슈가 크래프트,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 확실하게 실력을 보여줘야 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더 오래 살아남은 다음에, 우리 엄청 잘됐으니까 내 이름을 불러달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