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9화
프랑스 시각으로는 오전 11시.
한국에서는 새벽 4시다. 그 시간에 소망시의 한 가정집에서도 스트리밍 생방송을 보고 있었다.
“이제 일등을 발표하는겨?”
외국어를 모르지만, 눈치로 때려 맞추는 큰이모를 보며 임진희가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아니요, 3등부터 하나씩 차례차례 하고 있어요.”
꿀을 넣은 생강차를 한 잔씩 받아들고 좁은 거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 장씨 가문의 네 자매가 나란히 하품했다.
“하아아암.”
나이가 드니 잠이 없다면서도 계속해서 하품을 한다.
“저기는 해가 중천에 떴나 봐.”
새벽부터 깨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큰언니와 둘째 언니, 셋째 언니에게 얇은 담요를 하나씩 덮어주며 장은효가 물었다.
“둘째 언니, 형부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리 왔어?”
큰언니에게 물어봤자 얼렁뚱땅 넘기고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니 둘째 언니에게 물었다. 전날 밤늦게 집에서 직접 튀긴 닭을 싸 들고 쳐들어온 둘째 언니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우리 조카가 프랑스에서 올림픽에 나간다는데 당연히 응원해 줘야지.”
‘올림픽은 아니지만….’
은효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부는?”
“큰 형부랑 우리 신랑, 셋째 제부가 같이 세트로 찜질방 갔어. 남자들끼리 사우나도 하고, 아주 좋지.”
‘둘째 형부는 분명히 사우나 싫어한다고 했는데.’
둘째 언니에게 꽉 잡혀 사는 형부가 못 이기는 척 가줬나 보다. 은효가 민망해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집안에 남자 둘이 자리를 비우고 적적하다가 언니들이 오니까 좋긴 한데. 그래도 형부들 보기에도 내가 면목이 없고….”
“진희랑 은효랑 둘이서 얼마나 무서울까 해서 우리가 왔잖아.”
셋째 언니가 조잘대며 잘 삶겨진 달걀의 껍데기를 벗겼다. 큰이모가 직접 기른 닭이 낳은 달걀들은 유난히 크기가 작다. 저번에 홈쇼핑에서 구매했다던 찜기로 쪄낸 달걀을 한 판이나 가져왔다. 집에서 기름 솥에 튀겨온 닭은 다섯 마리나 있다. 튀긴 닭 냄새가 폴폴 풍기자 고양이가 입맛을 다시며 옆을 맴돌았다.
“훠이, 저리 가. 진호 너는 먹으면 안 돼.”
장은효가 엄격하게 말하자 고양이는 앞발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귀를 세웠다. 뾰족한 양쪽 귀가 삐죽 솟고, 동그랗게 확장된 동공이 은효를 응시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임진희가 꺄꺄거리며 좋아했다.
“어머! 얘 끼 부리는 것 좀 봐요. 닭고기 좀 달라고.”
“그래도 치킨은 안 돼. 나트륨이 고양이한테 안 좋대. 차라리 이 달걀이나 하나 줘.”
거친 손가락으로 달걀 껍데기를 비벼서 밀어내자 맥반석구이 달걀의 흑갈색 표면이 드러났다. 진효는 연갈색 흰자 부분을 갉아먹고, 노른자 부분만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야오옹.”
진호는 잽싸게 꼬리를 세우고 다가와, 노른자를 챱챱 핥았다. 가시 돋친 혀가 손바닥 위를 지나가자 은효가 웃었다.
“아이, 간지러워.”
“애교떠는 것 좀 봐, 아주 막내아들 다 됐네.”
“진짜 아들보다 더 잘하네. 막내는 막내답게 애교를 부리는 게 좋아.”
“그래. 인간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떠나는데, 고양이는 옆에 있잖니.”
“어머, 이모들도 참. 제가 옆에 있잖아요.”
진희가 미소를 지으며 깎은 사과를 내왔다. 손재주 좋은 그녀가 토끼 모양으로 다듬은 사과를 보며 큰이모가 기뻐했다.
“아이구, 우리 진희가 손재주가 아주 좋네. 이제 시집가기만 하면 되겠어.”
“제 나이에 아직 결혼은 너무 이르죠. 지금 엄마랑 같이 가게 하는 것도 너무 재밌고, 좀 궤도에 오르면 저도 제 가게 내고 싶어요. 진혁이랑 아빠랑 돌아오면 이야기해보기로 했어요.”
“야망이 있네, 야망이 있어.”
진희가 눈을 빛냈다. 유일봉이 가르쳐준 제과제빵 레시피들은 거의 모두 흡수했고, 가게 전반을 어떻게 돌보면 되는지도 배웠다. 빵을 사 가는 사람들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맛있다고 칭찬하는 것도 들었다.
“얼마 전에는 제가 만든 빵을 매대에 올려놓았는데 사가신 분이 맛있다고 얘기해주셨어요!
“그래? 잘생긴 남자여?”
“시청에서 일하는 언니인데, 아주 유능한 분이에요.”
“그분은 시집 안 가고?”
열아홉 살에 이 남자가 아니면 죽어버리겠다고 자살 소동을 벌여 일찌감치 연애결혼을 한 셋째 이모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아이참!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제가 만든 빵이 잘 팔리고 있다니까요.”
“우리 조카가 아주 능력 있네. 날 닮아서 그런가 봐.”
화장품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20여 년간 일해오며, 최고 영업사원으로 수당 1억을 달성하기도 했던 둘째 이모가 말했다.
“언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진희가 어딜 언니를 닮아. 진희 눈썹을 보면 숱이 많고 색깔이 칠흑같이 까만 게 딱 나를 닮았다니깐.”
진희에게 달걀을 까주며 셋째 이모가 웃었다. 큰이모가 투덜거렸다.
“아니지. 진희 콧대하고 콧방울을 보면 동글동글한 게 나랑 똑같아. 내가 저 나이 때 딱 저런 얼굴이었어.”
‘언니…진희는 나를 닮았어요.’
막내 장은효는 기센 언니들 사이에서 피식피식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안하게 앉았다. 엉덩이가 넷이나 끼어 앉아있으니 좁았지만, 셋째 언니와 소파 팔걸이 사이에 앉으니 푹신푹신하고 편했다.
“은효야! 거기 그렇게 누워 있지만 말고, 이 닭 다리 좀 먹어 봐.”
“그래, 지금 우리 조카가 외국 텔레비전에도 나오는데 엄마가 됐으면 사치도 좀 부리고 그래야지.”
장 씨 자매가 어렸을 적, 닭도 기름도 아주 귀한 음식이었다. 기름에 튀겨낸 닭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종종 알을 낳지 못하게 된 씨암탉을 삶아 백숙으로 끓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도 다리는 부모님의 것이었다.
큰언니가 장은효 앞의 앞접시에 튀겨낸 닭 다리를 두 개나 올려놓았다.
은효는 조금 감동했다.
‘언니가 나를 제일 아끼는구나.’
장은효가 고맙다고 막 입술을 여는데 큰언니가 닭의 가슴살을 뜯어내더니 자신의 접시 앞에 내려놓았다.
“난 역시 퍽퍽 살이 좋더라.”
“언니, 은효만 다리 두 개 주고! 나도!”
“닭이 몇 마린데, 이년아.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알아서 먹어.”
“귀한 둘째 동생한테 이년이 뭐야?”
둘째 언니랑 큰언니가 투덕거리는 사이에 은효가 셋째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큰언니가 지금 우리끼리 먹자고 닭을 다섯 마리나 잡아 온 거야? 형부들은 어쩌고.”
“아무렴 우리가 그냥 보냈겠어? 치킨이랑 맥주 쿠폰도 사서 보냈다고.”
둘째 언니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큰언니가 직접 찐 달걀은 우리가 다 가져왔어. 사우나에서도 삶은 달걀을 파는데, 언니 달걀을 가져가서 먹으려고 하면 안 되지.”
큰이모가 투덜거렸다.
“너희는 내가 내 달걀 가져가서 먹는 게 뭐가 어때서 맨날 뭐라고 하니? 내가 이렇게 한 푼 두 푼 절약해서 너희 셋을 전부 먹이고 입혀서 키웠다! 참 내!”
“아니야…. 언니…, 제발….”
둘째 이모가 말리는 동안 진희가 손가락질했다.
“어머, 저기, 저거!”
“우리 한국 팀이 이겼어?!”
“누가 골 넣었니?”
“축구가 아니니까요, 이모!”
비슷비슷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승팀은 한국, 한국입니다! 제일 정통적인 방법을 따른 뺑 오 쇼콜라를 만든 국가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조리모를 쓴 강 마리오가 앞으로 나서서 상패와 메달을 받았다. 현악기의 부드러운 음색이 배경음악으로 깔리고, 한국 부스가 클로즈업되었다.
“금 거북이를 닮았네, 저거.”
“저건 금 거북이 아니고 빵 거북이지.”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거북이의 머리 모양을 다듬고 있는 임진혁이 눈에 보였다.
진희는 반가워 저도 모르게 외쳤다.
“진혁아! 잘해!”
들리지 않을 것을 알아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쿠프 드 몽드의 뺑 오 쇼콜라 부문에서 한국 팀이 우승한 것이다. 여태까지 3위 내에 입상한 적도 없는 한국 팀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한 걸음이다. 두근거리고 설레며 자랑스럽다.
큰이모가 기뻐하며 닭가슴살을 찢어냈다.
“우리 진혁이가 빵을 만들어서 일등상을 탔다고? 경사 났네!”
닭가슴살을 오물거리며 그녀가 물었다.
“근데 상을 받은 건 왜 진혁이가 아니고 저 애야?”
냉장고에서 갓 꺼내 시원한 맥주 캔을 뜯어서 따르며 진희가 설명해주었다. 유리잔에 노란 맥주가 쪼르르 따라지고 소복한 거품이 보기 좋게 얹혔다. 나이순대로 이모 네 사람에게 모두 맥주를 따르고, 술을 즐기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서는 사이다를 따랐다.
“쟤는 마리오라고 진혁이랑 같은 팀이에요.”
“와, 저 마리오라는 청년도 잘 하는구먼.”
“인기 있는 방송 스트리머였어요. 지금은 쉬고 있어서 좀 영향력이 떨어졌지만, 팬클럽도 있고요.”
진희는 자기 몫의 바나나우유까지 유리잔에 따랐다.
“느이는 나이가 몇 살인데 아적 맥주를 먹지를 못하구 우유를 마셔. 애기야, 애기.”
“원래 치킨은 바나나우유랑 먹는 게 제일 맛있어요.”
“입맛 참 독특혀.”
“아휴, 이모. 그런 소리 하지 말구요. 우리 건배해요, 건배!”
그리고 카메라가 관객석을 비추었다. 감격 어린 표정으로 양손으로 열심히 플랜카드를 흔들고 있는 임운정이 보였다. 뜨거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그 모습을 보며 가족들이 놀랐다.
“웁푸푸!”
“아이구, 제부님 운다.”
“여보….”
쌍둥이를 낳아주었을 때 이후로 남편이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저절로 가슴이 찡해와, 장은효가 자신의 눈가를 수건으로 가렸다.
“풉!”
임진희는 웃음을 터트릴 뻔한 것을 간신히 손바닥으로 가렸다.
‘저 플랜카드는 왜 저렇게 쓰여 있어?!”
분명히 자신이 온라인으로 주문해, 아버지가 직접 받아서 가져간 현수막이었다. 현수막에 어떤 내용이 프린트되어있는지는 따로 확인하지 않았는데 저런 오타가 있을 줄은 몰랐다.
둘째 이모가 물었다.
“우윳빛깔은 뭐고 세젤맛은 무슨 뜻이냐, 진희야?”
아버지의 얼굴보다 더 먼저 눈에 들어오는 한글을 읽으며 진희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세젤멋이라고 주문했는데 오타가 나도 저렇게….”
“그려? 세젤멋은 뭐고?”
“그냥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 이런 뜻이에요.”
‘아들한테 아버지가 너 맛있다, 하고 흔드는 셈이잖아. 미리 체크할걸.’
진희가 식은땀을 흘리는데 셋째 이모가 기분 좋게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을 만드는 임진혁이라는 뜻이잖아, 좋기만 하구만.”
“…역시 그렇죠?”
지금 이 방송은 전 세계로 송출되고 있을 것이다.
‘몰라. 나는 모른다. 아무 일도 아니야.’
진희는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 ◈ ◈
“하하! 내가 돌아왔다!”
마리오는 콧김을 뿜으며 돌아왔다.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어깨는 으쓱으쓱하는 게 아주 기분 좋아 보였다.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마리오가 자랑스럽게 상패를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마리오, 그동안 고생했어.”
진혁이 말하고 루이스 역시 거들었다.
“뺑 오 쇼콜라 만들기를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더니, 아주 잘했어.”
“진혁이가 추천한 대로 지방함유량이 높은 기 버터를 섞어서 만든 게 유효했나 봐. 향기가 좋았다고 하니까…, 나 혼자 만든 거라고는 할 수 없지. 달걀 물도 진혁이가 발라주고….”
그래도 기분이 좋다. 마리오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지금 나를 축하할 시간이 어디 있어! 다 같이 한 건데. 당장 갑판부터 만들자고.”
진혁이 씨익 웃었다.
“이제 좀 철이 들었구만. 여기 가시부터 꽂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