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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277화 (277/656)

제 277화

심사위원들 앞에 여러 가지 빵이 놓인 후, 벌써 5분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

뺑 오 쇼콜라 제출을 마치고, 빵 공예 작업 중이던 마리오가 중얼거렸다.

“시몬 리옹 심사위원은 아직도 아무 빵에도 손을 안 대고 있네.”

루이스가 대답해주었다.

“저 사람은 원래 심사할 때는 따끈따끈한 빵은 먹지 않잖아. 따스한 빵은 맛이 별로인 빵도 맛있게 해주는 버프가 있으니까, 정정당당한 심사를 하려면 식은 후에 먹어야 한다고.”

“루이스 형, 마리오의 질문 같은 데에는 대답하지 말고 그냥 얼음 조각에 집중해.”

진혁은 박력분에 시럽을 섞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호밀 가루의 질이다. 인연 있는 호밀 농장에서 공수해 온 국산 호밀가루는 그가 생각하기에 호밀 반죽으로는 아주 완벽한 물건이었다.

‘이 가루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거북선의 구조 전체를 지탱해 줄 거야.’

찰기 없는 덩어리였던 반죽이 점차 점성이 생겨 묵직해져 간다. 이 호밀 반죽은 빵 공예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반죽으로 강도가 튼튼하여 뼈대와 구조를 만들 때 많이 쓰인다.

호밀 반죽을 완성한 참에 진혁이 고개를 들자 아직 마리오가 다른 공예 반죽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흐흥.”

마리오는 진혁이 사용하는 재료에 소금과 박력분, 전분을 추가로 섞어 반죽을 치댔다. 양 팔꿈치가 굽혀졌다가 다시 펴지면서 양팔에 드러난 근육이 선명해지고, 조리대 위에서 말캉거리던 반죽 덩어리가 점점 더 뭉쳐져 간다.

그가 만드는 것은 진혁의 것과 명확히 구별되는 역할을 맡을, 정교하고 세심한 장식을 묘사할 수 있는 특별한 반죽이다.

생각보다 반죽이 빨리 완성되지 않자 마리오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진혁아. 나 이 반죽 두 번에 나눠 만들까?”

“아니, 한 번에 해.”

언뜻 들으면 명령조같이 들리는 진혁의 말에 마리오가 불평하는 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런 명령하는 어투가 불쾌해서 몇 번이나 오해가 생겼다. 하지만 몇 개월간 함께 합숙한 끝에 이 정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며칠이라도 어른스러운 내가 참는다, 참아.’

마리오는 진혁이 알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혁이 말한 저 ‘한 번에 해’라는 뜻을 마리오가 이해한 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알았어. 나는 한 번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으니까, 괜히 나눠서 하지 말고 지금 이대로 계속하면 된다는 거지?”

곧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금방.”

마리오가 킥킥 웃었다.

“너, 진짜 말투 좀 고쳐라. 나랑 형 아니면 네 말투는 시비조라고 오해할 거야.”

“…?”

진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하는 것을 오해할 정도로 관계가 깊지 않은 사람과는 애초에 말을 섞지 않으면 되는데.’

루이스가 문득 말을 꺼냈다.

“야, 시몬 리옹 쉐프가 드디어 뭐 먹는다. 빵 다 식었나 봐.”

◈          ◈          ◈

참가자들끼리 한국어로 나누는 목소리는 심사위원석까지 들리지 않는다.

몇몇 심사위원들은 다른 심사위원들이 빵을 먹는 모습이나, 향기를 맡는 모습 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 자신의 혀를 신뢰하지 못하는 건가?’

하지만 자신의 맛을 식별하는 능력에 자신이 있는 시몬 리옹은 타인이 타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무엇을 제일 맛있다고 하는지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맛을 확인하는 것이다.

『빵이 식었군.』

시몬 리옹은 오른쪽 끝의 트레이에 손을 가져갔다. 무대조명을 반사해 은색으로 빛나는 트레이에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희끗희끗한 눈썹에 주름진 얼굴, 그리고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 미소까지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친다.

‘…내가 왜 웃고 있지.’

제자의 것이 아닌 빵에 대한 기대감, 그 무의식이 미소를 통해서 나타났다.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너는 이번에는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떤 뺑 오 쇼콜라를 만들었나.’

프랑스식 정통 뺑 오 쇼콜라를 만든다면 재료도, 모양도 모두 한정되어 있다.

어떤 초콜릿을 사용해도 되고, 어떤 모양을 만들어도 상관없는 초콜릿 쇼피스와는 시험의 구조 자체가 다르다. 스스로 새로운 모델링 초콜릿을 창조해낼 정도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 관심을 가진 자라면 이런 류의 정통 제빵에 약하기 마련이다.

시몬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진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래, 나는 그자가 어떻게 실패하는지 보고 싶어 미소짓고 있는 거야.’

그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 빵을 만지는 감촉을 예민하고 섬세한 손끝으로 느끼기 위해서다.

깨끗하게 씻은 손을 뻗어, 오른쪽 끝에 있는 빵을 집어 들었다.

먹기 좋게 식은 뺑 오 쇼콜라는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 코를 간지럽혔다. 여러 번 접혀 겹쳐진 반죽은 완벽하게 구워져, 사랑스러울 만치 향기롭다. 손끝에 전해져오는 파삭파삭함 역시 적당하다.

시몬은 전형적으로 보이는 빵의 향내에서 무언가 가려진 다른 냄새를 맡았다.

『이건 무슨 냄새지?』

그는 코를 조금 더 빵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향기인지 알 수 없었다. 시몬은 코를 벌렁거리며 빵을 한 바퀴 돌리며 꼬리 쪽과 가운데, 밑바닥까지 훑었다.

여전히 무슨 냄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맡아본 기억이 있는 익숙한 향인데.』

잘 모르겠다면 알아보면 된다. 그는 빵의 양쪽을 검지와 엄지로 찢어냈다. 갈색에 가깝게 익혀진 껍질이 파스슥 부서지며 하얀 속살이 모짜렐라 치즈처럼 주욱 늘어나며 선명하게 드러났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것이 아주 제대로 만들었어. 그놈들 말고도 쓸만한 녀석들이 있군.’

빵의 하얀 속살이 아무리 탄력이 있고 쫄깃하다고는 해도 치즈보다는 덜하다. 기포 사이로 주우우우욱 찢어지는 하얀 속살과 바삭바삭한 겉껍질을 함께 맛본 시몬 리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의문을 해결한 것이다.

‘호두 오일을 섞어서 살짝 호두 향을 냈군.’

아몬드나 피스타치오, 땅콩이나 호두 같은 견과류는 크루아상과 아주 잘 어울린다. 밀가루를 대체하는 아몬드 가루와 아몬드에서 추출한 정수를 사용해 만들고 잘게 썬 아몬드를 올린 크루아상은 파리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빵이다.

아마도 이 빵을 만든 이는 그 점에서 착안해, 아주 살짝 특별한 향을 남기려고 했을 것이다.

흔히들 쓰는 달걀 물이 아닌 호두 오일로 코팅하여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익게끔 하고, 가벼운 호두 향을 입힌다.

‘생각보다 별 것 아니야. 이 정도는 조제프에게 아직 미치지 못한다.’

초콜릿은 벨기에산 깔리바우트다트로, 단맛 뒤에 쌉싸름한 맛이 길게 남아 여운이 긴 다크초콜릿이었다. 카카오 함량 59%의 맛이 분명했다. 호두 오일과 어울리는 맛을 고르기 위해 다크초콜릿으로 했을 것이다.

그 자신도 만들 수 있고, 조제프도 만들 수 있는 레벨의 괜찮은 빵이다.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잠자고 있던 초조와 불안을 내려놓고서 시몬 리옹은 다른 빵을 들었다.

파스슥

이번 빵은 겉껍질이 지나치게 잘 부서졌다. 아마도 오븐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구운 것이리라.

‘이 정도 솜씨로 쿠프 드 몽드에 나올 생각을 했단 말인가?’

코웃음을 치면서 그는 손이 아닌 포크로 빵을 찢어발겼다. 아니나 다를까, 안쪽에 있는 속살 역시 수분기가 조금 부족했다. 쫄깃하다기보다는 말라 있다는 쪽에 가깝다. 시몬 리옹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초콜릿을 먹을 가치조차 없다.

『너는 아웃.』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는 세 번째 뺑 오 쇼콜라를 집었다.

그 빵은 지극히 전형적인 프랑스식 뺑 오 쇼콜라였다.

‘이 맛은 알사스산 밀가루인가?’

프랑스산 밀가루를 사용해 구워내고 코코아매스가 적어 씁쓸한 맛이 덜하고 다디단 밀크 초콜릿 계열의 초콜릿을 사용했다. 우유 맛이 언뜻 느껴지는 것도 같은 단맛은 페르클린의 초콜릿이 분명하다.

시몬 리옹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빵이 입어본 적 없는 스타일로 차려입은 조강지처 같다면, 세 번째 빵은 익숙한 마누라 같군.』

둘 중 굳이 고르라면 첫 번째 빵보다 세 번째 빵이 더 시몬 리옹의 취향이었다. 그는 전통이 그대로 계승되기를 원했다.

반면에 네 번째 빵은 전혀 부인 같지 않았다. 겉보기부터 흑갈색으로 구워진 페이스트리를 보고서 그가 혀를 찼다.

『부부동반 모임에 정부를 데리고 오면 안 되지.』

아예 반죽부터 초콜릿을 섞어 넣어 초콜릿 반죽에 초콜릿을 넣어 구워버리면 이미 뺑 오 쇼콜라가 아니게 된다.

『초콜릿 케이크를 굽고 싶으면 그냥 양키들의 브라우니라도 구우면 되지, 왜 뺑 오 쇼콜라에게 이런 짓을 하나.』

이미 초콜릿 빵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시점에 바로 손을 뗐다. 시몬 리옹은 어리석은 젊은 쉐프의 결단에 한탄하며 다음 빵으로 손을 옮겼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모든 빵을 다 맛보았지만, 임진혁이란 놈이 만든 빵 같아 보이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소가 뒷발로 걷다가 쥐를 잡은 격으로, 우연히 그런 것을 개발해냈구만.’

우아하면서도 농후한 향기를 풍기는 꽃 초콜릿이란 그리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의 정수를 많이 넣으면 독하고 괴로울 뿐이며 적게 넣으면 초콜릿의 향에 묻힌다. 하지만 임진혁이라는 자는 지난번에 강렬한 유채꽃의 향기를 추출한 정수를 추가해, 독특한 풍미가 있는 초콜릿을 만들어냈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경험 적은 페이스트리 쉐프가 세계적인 쉐프들이 인정할만한 유채꽃 초콜릿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것들도 맛있게 만들기는 어려울 게야.’

임진혁 쉐프가 뺑 오 쇼콜라를 만든다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플라워오일을 사용한 초콜릿을 쓸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이번에 제출한 뺑 오 쇼콜라 중에서 강렬하면서도 상큼한, 플라워 계열의 향기를 내는 초콜릿을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국팀에서 이번에 빵을 만든 사람이 임진혁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정통으로 제빵을 공부한 강 마리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적절하게 심사를 끝냈군. 아주 만족스러워.’

시몬 리옹이 흐뭇한 미소를 띠며 한국 부스를 관찰했다. 아까 심사한 빵들 사이에서 제자의 빵처럼 보이는 것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          ◈          ◈

7번 부스, 프랑스 팀 역시 한국 팀과 마찬가지로 심사를 기다릴 여유가 없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프레첼처럼 보이는 긴 빵들을 조각조각 잘라 구워내 얽어서 에펠 탑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은 시간을 전부 투자해야 한다. 빵 공예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 다른 생각을 할 틈은 없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하지만 주느비에브는 조리대 옆에서 전혀 상관없는 재료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리프는 얼음 조각을 하느라 바쁜데 자기는 꺼낸 적이 없으니까.

『조제프, 왜 호두 오일을 꺼내놓았어? 우리는 쓸 일이 없잖아.』

『뺑 오 쇼콜라에 입혔어.』

『왜?! 스승님이 그런 거 싫어하시잖아.』

『뭐 어때.』

조제프가 단언했다.

『새벽에 올라온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 봤어? 정말 혁신적이더라. 대회장에 오느라 시간이 없어서 만들어보지는 못했는데, 대단하더라고.』

『거기에 영향받아서 호두 오일을 넣은 거야?』

『응, 사실은 초콜릿 자체를 업그레이드하고 싶었는데. 그럴만한 시간은 없더라고.』

『세상에. 대회장에서 모험하지 말라던 건 너잖아. 조제프 쇠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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