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5화
“은혜 같은 소리! 은혜를 갚더라도 학교는 가야지!”
도을은 어머니에게 등짝을 찰싹 맞고서 비명을 질렀다.
“아얏! 엄마, 잠깐만. 카메라 돌아가고 있어요!”
결국, 어머니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는 모습까지 전부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말았다.
도을에게 굴욕적이었던 그 방송은 결국 유일봉이 직접 모친에게 연락해 중단될 수 있었다.
“도을이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유일봉인데요. 그, 감나무 집 아들요.”
“어머, 일봉이 청년. 무슨 일이야?”
“제가 도을이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전화하라고 전달해 주실 수 있나요?”
“그래, 그래. 전달할게.”
전화를 끊고 난 어머니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유 씨 아저씨네 아들한테 연락 좀 해 봐.”
“알았어요, 엄마.”
어머니가 방을 나가자마자 도을은 시청자들에게 엄마와 똑같은 얼굴로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주세요. 레드썬!!”
하지만 시청자들은 킬킬대면서 즐거워했다. 그중 한 명이 PC용 메신저로 1:1 메시지를 걸어왔다.
@유일부엉 : 도을아. 바쁘냐?
@옥빵상제 : 형 지금 내가 방송하는 거 다 보고 있다가 전화한 거예요????
@유일부엉 : ㅇㅇ
@옥빵상제 : 아 그럼 좀 빨리해주지!!!!
@유일부엉 : 학교는 나가야지ㅋ
@옥빵삭제 : ㅠㅠㅠㅠㅠㅠ
@유일부엉 : 그건 됐고, 너 안 바쁘면 오늘 서울로 올라와.
@옥빵상제 : 나 외출금지요ㅗㅗ
@유일부엉 : 내가 너희 어머니한테 말하고 허락받을 거야.
@유일부엉 : 진혁이 형 돕는 일이야.
@옥빵상제 : 당장 올라감!!!
어머니에게 허락받은 도을이 촬영용 도구를 챙겨서 ‘해와 달’ 베이커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즈음이었다.
‘내가 혼자 서울 올라간다고 하면 당장 등짝 스매싱부터 날아올 텐데, 왜 일봉이 형이 괜찮다고 하면 이렇게 쉽게 허락받을 수 있는 거지….’
도을이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절감하며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도 몇 번이나 짐을 확인했다. 촬영용 도구라고 해봤자, 싸구려 마이크 두 개와 스마트폰, 그리고 스마트폰의 방향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삼각 거치대뿐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딸그랑.
도을이 가게 안에 들어왔을 때, 의외로 가게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진바라기 미팅이에요?”
반 이상이 도을이 방송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지휘자처럼 한쪽 구석의 테이블에서 서서 지시하고 있던 김가영이 입술을 호선으로 그으며 웃었다.
“비슷한데 좀 달라. 분점 같은 거야.”
백진영이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을이 금방 또 보네.”
반면 유일봉은 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간단히 던졌다.
“자. 김도을! 지금부터 맛있는 모델링 초콜릿 만들고 시식하기 방송을 할 거야. 네가 호스트.”
“엑?! 형! 그건 지금 당장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캐릭터 잡고 대본도 조금은 짜야 해야 하는데?! 내가 올라오는 동안 얘기해줄 수 있었-아니 미리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
“지금 네 방송에 사람들 꽤 몰렸어. 학교 안 간 스트리머의 운명.GIF 돌아다니고 있거든.”
“물 들 때 노 저어야지.”
가영이 빙글빙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오랜 시간 김도을과 채팅한 끝에 친해진 사이라 반말을 쓴다. 도을이가 질색하며 말했다.
“진심 그런 인기 필요 없는데! 가영이 누나는 도자기 공방에 안 있고 왜 여기 와 있어요?”
“이번 분기 그릇 납품하러 왔지롱. 싸부님이 여기서 그대로 퇴근해도 된다고 하셨어!”
“직장인 좋겠다. 나도 빨리 직장인 해야지.”
유일봉이 가영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도을의 머리에 콩 하고 알밤을 먹였다.
“학생 때가 제일 즐거운 거야.”
“쳇.”
대본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대략의 대화 컨셉을 잡고, 김도을이 방송을 시작한 것은 30분 후였다.
“오늘은 여기 부엉 형님을 모시고! 진혁이 형님이 공개하신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대로 만드는 걸 따라 해 볼게요!”
방송하는 도중에는 잡음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도을이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작업하고 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근처 카페로 헤어졌다. 정지숙은 노트북을 켜놓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온라인으로 메시지를 보내며 지시를 시작했다.
“어머, 저는 이제 슬슬 가봐야겠네요.”
그녀가 시계를 보며 이야기하자 백진영이 인사했다.
“진혁이 일 때문에 발 벗고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로그 포스팅도 그렇고, 이렇게 해주신 것도 그렇고요.”
“여론이 중요하죠. 우리나라의 여론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는 더 그래요.”
정지숙이 프랜차이즈 카페 창밖을 멀리 내다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국은 물도 다르고 밀가루도 달라서 정통 프랑스 빵 맛을 내는 게 같은 레시피로는 불가능해요. 내가 파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몇 년간 그런 빵을 찾아다녀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런데 임진혁 쉐프는 그걸 해냈어요. 물을 조절하고 쌍 달걀을 써서 현지의 맛을 완벽하게 살려냈다구요. 진혁 쉐프가 내는 맛은 진짜예요. 모니터 너머로만 봐서 그 맛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헛소리하는 걸 들으면 너무 화가 나요.”
스마트폰으로 웹서핑하며 스크롤을 휙휙 넘기고 있던 김가영이 동의했다.
“그 사람들 다 면상에 초콜릿 케이크를 처발라줘야 해요.”
“안돼요! 맛의 낭비입니다. 진혁이 케이크는 눈으로 먹어도 맛있는데 그걸 어떻게 그렇게 버려요. 다 내가 먹고 싶네요.”
“정지숙 여사님께서는 저희집 케이크를 하루에 두 개씩 드시고 계시잖아요?”
“먹어도 먹어도 더 먹고 싶어요.”
“건강도 신경 쓰셔야죠.”
정지숙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케이크를 먹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피부가 좋아지고 머릿결이 고와지며 소화가 잘 된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주치의만이 알고 있다.
“케이크 먹는 만큼 개인 PT 세션도 늘렸어요. 화목 하던걸 이제 월수금 하고 있답니다. 먹고 싶은 걸 다 먹으면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려고요.”
그녀가 빙긋 웃었다. 자신의 건강에 민감하여 최소한 반년마다 한 번씩은 건강검진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는 운동한 보람이 있는지, 빵을 먹으면 먹는 만큼 더 몸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열심히 운동하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 지극히 단순한 즐거움. 그런 행복을 가져다준 진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나쁘다.
“어, 여기 좀 봐요. 진혁이가 만든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를 만들고 리뷰하는 방송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김가영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유튜브에서 방송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며 정지숙이 중얼거렸다.
“안토니오 펠리페 칼루치오. 이탈리아계 미국인 페이스트리 쉐프죠.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나왔다가 초반에 탈락하고서 진혁 쉐프한테 레시피를 얻고, 잘됐다면서 희희낙락하면서 돌아간 인물이에요.”
한동안 SNS에서는 ‘영광의 패배’ ‘졌지만 이겼다’ 따위로 불리며 놀림감이 되었다. 백진영이 입을 열었다.
“아, 얘가 걔구나. 진혁이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동물 주려고 만든 빵을 사람 준 몹쓸 놈이라고.”
“풉. 내가 진희한테 들은 건 그런 게 아니었어. 진희가 자랑하더라고. 진혁 쉐프가 그쪽 라인에 밀키트 개발해주면서 돈 꽤나 벌었다고 했어. 보너스로 진희한테 구두하고 가방 사줬다더라.”
김가영과 백진영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지숙은 가영이 보여준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조금 쉬어도 되겠어요.”
그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주 잘 됐어요.”
◈ ◈ ◈
파리의 대회장.
무대 한가운데에 와 있는 진행자,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여러분! 오븐 안은 확인하고 계신가요? 뺑 오 쇼콜라를 제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금속광택으로 빛나는 거대한 카트를 밀며, 알리샤가 부스 앞에 다가왔다. 1번을 달았던 중국팀이 예선에서 탈락했으므로 제일 먼저 제출하는 팀은 2번, 한국팀이었다.
『뺑 오 쇼콜라로 총 10점의 점수를 받게 됩니다.』
마리오가 오븐에서 꺼내어 식히고 있던 빵을 바라보았다. 봉긋하게 솟은 빵은 보기 좋게 노르스름하게 구워져, 진한 버터와 초콜릿 향기를 풍겼다. 그는 뜨거운 빵에 손가락이 닿을세라 조심스럽게 트레이째 빵을 내밀었다.
카트 위에 빵을 올려놓자 달각, 하는 소리가 났다.
『감사합니다.』
알리샤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옮겼다.
『대만 팀, 부탁드립니다.』
『여기 있습니다!』
대만 팀의 장치앙린이 한국 팀 옆에 트레이를 올려놓았다. 이쪽의 빵 역시 달걀 물을 충분히 발랐는데,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 약간 갈색 광택이 났다. 여기서는 살짝 불맛이 씌워진 버터 향이 농후하게 풍겼다. 두 가지의 빵이 한꺼번에 트레이 위에 올리자 진한 버터 향과 초콜릿 향이 뒤섞인 향기, 그리고 희미하게 그을린 듯싶은 버터 향이 뒤범벅되어 코를 간지럽혔다.
‘한국 팀 빵은 묘하게 냄새가 진하네?’
대회장을 오가며 모든 팀의 빵을 전부 수거하는 동안에도 버터 향과 초콜릿 향이 뒤섞인 냄새는 알리샤의 코끝을 계속해서 간지럽혔다. 그녀는 모든 부스 하나하나를 들러 빵이 담긴 트레이를 받는 동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역시 갓 구운 빵 향기는 좋아요.』
카트가 심사위원들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빵이 담긴 트레이를 들어 올려, 국가별로 분리해두었다. 알리샤가 손짓하자 무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년들이 튀어나왔다.
빳빳하고 흰 조리복을 입은 소년들은 층층이 쌓인 접시를 가져와, 각 심사위원에게 모든 빵이 하나씩 돌아가도록 나누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빵에 집중하지 못했다. 알리샤가 허리를 숙이고 물러날 때까지도 그들은 나지막하게 급박한 토론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회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어.』
『안토니오 P. 칼루치오를 비롯한 미국의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그 레시피를 만들어 보고 리뷰를 올리고 있습니다. 완전히 혁신적이라는 평가에요. 이걸 이긴 프랑스팀의 레시피는 도대체 어떤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젤로스 사에서는 이 레시피를 개량한 다른 레시피대로 만들어 팔 것이라고 선언까지 했지….』
시몬 리옹은 사실상 프랑스 쉐프의 대표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다. ‘마스터 오브 딜리셔스니스’라는 이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의 권위를 따라 입 다물고 있던, 다른 프랑스 쉐프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몬 리옹 쉐프, 프랑스 팀에서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를 공개할 생각은 없습니까?』
『레시피는 쉐프의 재산이야. 내 학생들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레시피를 어째서 다른 자가 멋대로 공개했다는 이유로 오픈해야 하지?』
알버트 그림슨이 비웃었다.
『차라리 어제 금메달을 잘못 수여했다고 공표를 하지그래?』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미간을 좁히며 끼어들었다.
『지금 대회 외부적인 이야기보다 심사에 집중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