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3화
『진혁 쉐프가 손이 빠르니까 말야. 춤추면서 만들다가 나중에 춤을 안 추면 더 빨라질까 싶었는데 효과가 없더라고. 이상한 버릇만 붙었지 뭐야.』
『춤을 춘다고 빨라질 리 없잖습니까.』
『아니, 내가 춤을 추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웃느라 속도가 느려져. 방해 전략 같은 거지.』
농담하면서도 쉴 새 없이 흔들림 없이 움직이는 손을 보며 브라이언이 킥킥 웃었다.
『우린 같은 팀원이라고요. 방해하면 곤란한데.』
『그래서 안 추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연습할 때는 그러지 않았으면서.』
『그러게, 나도 긴장했나 봐.』
『….』
한편 토마스 브라운은 묵묵히 얼음 조각에 전념했다. 얼음 속에서 드러난 아름다운 양다리의 곡선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끌을 사용해 덩어리를 파내고 또 파냈다. 그는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팀메이트 둘이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반면 한국 팀의 루이스는 그보다는 여유가 있었다. 야외 얼음 축제를 주로 돌아다니면서 조각을 연습했던 덕분이다. 조그마한 어린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면서 말을 걸거나 방해하려고 하는 것들을 수없이 겪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대만 부스의 얼음조각가, 왕웨이가 팀원들에게 짜증 내는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하며 말했다.
“얼음 조각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해서 중간에 방해받으면 실수하기 쉽다더니 정말인가 봐. 다들 근처에서 조용히 해주네.”
“형은 말하면서 오른손 움직이면 떨리지 않아?”
마리오는 호흡을 고르며 반죽을 고루 퍼냈다. 한 차례 평평하게 펴낸 다음에 밀대로 꾸욱꾸욱 눌러내 모양을 잡는다. 옆 팀보다 느린 속도다. 진혁은 천천히 지켜보며 달걀을 들어 올렸다.
“이건 신선하지 않군.”
“뭐야, 귓가에 대고 흔들어보지도 않았잖아. 어떻게 알았어?”
마리오가 놀라며 물었다.
일단 달걀을 깨본 다음에 노른자가 납작하고 색깔이 옅다면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는 것을 구분하는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마리오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냥 안전하게 깨 보지 그래?”
하지만 능숙한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달걀을 깨기 전에도 달걀이 신선한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귓가에 달걀을 대고 흔들어 보고 출렁이는 소리가 나는지 파악하면 된다.
닭이 낳은 지 오래된 달걀은 점차 수분을 잃는다. 흰자는 점차 묽어지며 노른자는 탄력을 잃고, 흰자와 노른자 사이를 묶고 있는 알 끈은 점점 더 약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달걀 안에 공기 방울이 점점 더 늘어난다. 이 원리를 통해 출렁이는 소리가 더 많이 나는 달걀이 덜 신선하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깰 거였어.”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식간에 달걀 서너 개를 더 골라냈다. 한 차례 흔들어 보는데 귓가에 달걀을 갖다 대지도 않았다. 그가 깨 놓은 달걀은 주홍빛에 가까운 생생한 빛깔을 자랑하며, 탱탱하게 스테인리스 보울로 흘러내렸다.
‘사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지만.’
어느 달걀이 더 신선하고 상태가 좋은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마리오는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계 제일의 페이스트리 쉐프가 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건가….”
진혁이 장난스레 물었다.
“지금 내가 세계 제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마리오가 잘못 말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건 아니고.”
“흐으음.”
진혁이 빙글빙글 웃으며 입을 다물자, 마리오가 벌컥 화를 냈다.
“어쨌든! 최소한 너는 이겨야 세계 제일이 되는 길을 향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마리오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임진혁이 1.5인분을 하고, 형이 1인분, 그리고 내가 0.5인분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에서는 세 명이 출전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 혼자만 여기서 제 몫을 다 못해내고 있다고 느꼈다.
본래 자신과 임진혁 사이의 차이는 종잇장 한 장 정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 함께 참가하면서 느낀 수준 차이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항상 천재 소리를 들어오던 마리오는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의 천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혁은 마리오와는 또 다른 방식의 천재로, 한 번 맛본 음식을 똑같이 재현해냈다.
‘대체…레시피가 공개되어 있지 않은 크림 브륄레를 어떻게 똑같이 만든 거지.’
이미 레시피가 공개되어 있는 빵이라고 해도, 열 명의 페이스트리 쉐프가 만들면 열 가지의 다른 맛이 난다. 습도와 온도를 포함한, 빵을 만드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각 쉐프들마다 반죽할 때 주는 힘도 다르고 방식도 달라서다.
‘같은 맛의 빵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 빵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달라.’
진혁은 어떤 방법을 써서, 결과적으로 같은 맛을 만들어낸 사실은 확연하다. 환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하던 절대미각이 분명하다.
‘절대미각이 있는 미식 평론가는 자기가 어떻게 요리된 무엇을 먹었는지 전부 구분할 수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임진혁은 먹은 것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이 다시 만들 수도 있다.
‘이게 알려지면 임진혁이 들어오는 걸 거절하는 빵집도 생기겠어.’
오븐에 페이스트리 반죽을 넣기 전에 반죽 위에 달걀 물을 바르며 마리오는 생각했다.
‘내 빵은 먹지 말라고 해야지.’
달걀 물을 바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죽을 오븐에 넣기 전 반죽 표면에 달걀 물을 바르면 반들반들하게 윤기 나는 광택이 생긴다. 노른자와 흰자를 섞어 진한 달걀로 만든 물을 바른다면 짙은 갈색에 가까운 광택이 나고, 물이나 우유를 섞으면 좀 더 연한 광택이 난다. 마리오는 이번에 굽는 빵에서 먹음직스러운 연노랑 빛깔을 나기를 원했다.
“오늘은 물을 조금 더 섞는 게 좋겠어.”
“어느 정도 색깔을 바라는데?”
“조금 더 연하지만, 너무 하얗지는 않게. 노르스름하면서 투명한 색깔로 나왔으면 좋겠어. 혹시 조절할 수 있어?”
“크림을 좀 더 섞으면 돼. 지금 만들어 주지.”
진혁이 미리 만들어둔 달걀 물에 아무렇지도 않게 크림을 섞었다. 계량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 양은 정확하다.
“달걀 물 바르는 것도 내가 할게.”
임진혁이 작은 붓을 꺼내 들고서 말하자 마리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손이 모자라던 참이다.
“알았어.”
능력이 뛰어난 만큼 곁에 있을 때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이 되어준다.
“다 하면 오븐에 넣어 줘! 예열되어 있어.”
마리오는 반죽을 말고, 진혁은 트레이를 받아 바로 달걀 물을 바르고 오븐에 넣었다. 불평 한 번 오가지 않고 척척 호흡이 맞는다. 루이스는 만족스럽게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얼음을 깎았다.
사박. 사박.
루이스가 석가탑의 상륜부를 끌로 찍어 내렸다. 바닥에 펼쳐 놓은 짙은 파란색 비닐 위에 떨어져 나간 얼음 조각이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녹은 얼음은 얼룩이 되어 짙은 남색 웅덩이를 만들었다.
쉬지 않고 다듬자 상륜부 위쪽, 도톰하고 올록볼록한 구형이 점차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손질을 마쳤다고 생각이 되자, 루이스는 말끔하게 다듬어진 상륜부부터 두툼한 주춧돌까지 석가탑을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뭔가 허전해 보이지 않아?”
루이스가 중얼거렸다. 천여 년 전 불국사에서 다보탑과 함께 만들어진 쌍둥이 탑이지만, 진혁이 만든 초콜릿 탑과는 느낌부터 달랐다.
“아무리 봐도 진혁이가 만든 다보탑하고 나란히 세우면 좀 죽을 것 같은데.”
대리석 같은 색감에도 희한하게 따뜻해 보이던 다보탑과는 비율부터 다르다. 지금도 새파란 얼음에서 풀풀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오싹오싹하게 사람을 놀래킨다. 상대적으로 약간 작은 크기의 석가탑은 하부기단부터 층층이 쌓인 옥개석까지 거의 다 마무리되었다. 하늘을 향해 원형 구슬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처럼 솟은 탑 끄트머리 부분에 다시 정을 대며, 루이스가 한숨을 쉬었다.
마리오가 말했다.
“진혁이 탑에 나비하고 고양이가 있어서 그런 건가?“
“나비를 올릴 거였으면 처음부터 생각을 해야 했는데, 이미 윗덩어리는 전부 손질했단 말이야.”
“하하.”
진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얼음 조각’의 주제는 ‘초콜릿 쇼피스’와 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초콜릿 모델링이야 나중에 추가하려면 반죽으로 빚어내서 추가할 수 있지만, 얼음 조각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마리오가 말을 꺼냈다.
”나비를 따로 만들어서 바닥에 붙이면 어때?”
루이스가 그 제안을 듣고서 고개를 저었다.
”개미도 아니고 나비가 왜 바닥을 기어 다녀. 그게 더 이상하다.”
루이스는 발 사다리 위에 다시 올라갔다. 삼층 옥개석(지붕을 덮는 역할을 하는 돌판) 부위를 조금 더 다듬었다. 전후좌우, 상하수평이 맞도록 신경을 써서 정으로 조금씩 쪼아냈다. 전체적으로 각져있는 구조물인 만큼, 조금이라도 비뚤어진다면 눈에 확 티가 나게 된다. 탑 본체의 얼음 조각은 거의 마무리되어가지만 아직 손대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닥의 주춧돌 옆에 팔뚝보다 큰 정육면체가 양쪽에 두 개, 반들반들하니 남아있다. 그 덩어리를 눈여겨본 진혁이 물었다.
”여기에 뭘 만들려고 일부러 비워놓은 거야?”
잠시 손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루이스가 대답했다.
”응. 아이디어 좀 줘 봐.”
”다보탑에 나비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석가탑에도 나비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그럴 거면 우리가 석가탑을 두 개 만들었겠지.”
”그거야 그렇지.”
”내가 좋은 생각이 있는데….”
진혁이 속삭이자 루이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오! 그거 괜찮겠다.”
”뭔데? 나도 알려 줘.”
”그게 말이지.”
무엇인지 들은 마리오가 피식 웃었다.
”뭐야, 그런 거면 나라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관객석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마리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저기 너희 아버님 계시다.”
”알아. 처음에 오셨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진혁은 트레이를 오븐에 넣고 문을 닫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마리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진혁의 아버지가 관객석 의자에 꽂아둔 작은 플랜카드를 살폈다.
”아버님이 아주 조금, 음…. 내 팬들하고 감성이 비슷하시네.”
‘직접 만들어 오신 줄 알고 식겁했네.’
‘우윳빛깔 임진혁’도, ‘세젤맛 임진혁’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흔들만한 내용은 아니다.
”왜, 저게 무슨 뜻인데?”
마리오가 뜨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진혁은 인터넷을 사용해 제빵 관련된 정보를 얻거나 레시피를 보는 것 외에는 커뮤니티 활동 등을 거의 하지 않아 인터넷 유행어나 밈을 잘 몰랐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진혁을 보며 마리오가 눈을 크게 떴다.
”장난하는 게 아니고, 정말로 몰라?”
마리오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처음 한국에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을 때는 댓글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최신 유행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곤란함을 겪었던 적도 있다. 그렇기에 그는 진혁같이 자신과 동갑인 한국 출신의 남자가 이런 유행어를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넌 다른 걸 다 알면서 어떻게 그런 걸 모를 수가 있냐.”
“뭐 어때.”
진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리오는 진혁과 진혁의 아버지를 힐끔힐끔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녀석, 남들 다 아는 말을 자기만 모르는데 그게 이상한지도 모르잖아. 설마 그런 건가?’
어렸을 적부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혹독하게 제빵 수련을 하면서 자라온 탓에 세상 물정은 전혀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리오는 혼자 오해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빵을 만드는데 필요한 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