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72화 (272/656)

제 272화

원하는 모든 것을 전부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만일 가족과 부하 중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가족을 선택했을 거야.’

눈앞에 곱게 접혀 있는 붉은 티셔츠가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하들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잔소리가 많고 비아냥거리는 광안마.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어 무슨 말을 하면 말 그대로 따르려고 하는 혈도객.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지만 의리가 있는 광폭대주 혈와수.

진혁은 그들을 아꼈으며 신뢰했다.

‘성격적인 단점이 있어도 다들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할 정도로는 능력이 넘치는 녀석들이지.’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없어도 알아서 잘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나 어머니, 진희에게는 자신이 꼭 필요하지만, 그 녀석들은 무공의 고수이니만큼 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것을 의식하고 일부러 지금의 이 상황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줬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야.’

말 한마디 하면 들어 처먹지 못하는 것들이라 간간이 두들겨 패줘야 했다. 허나 너무나 당연하게 곁에 있었던 존재들이기에, 그들이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진혁에게 있어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진정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이 곁에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상상하지 못했던 것과 똑같아. 계속 돌아오고 싶어 했지만, 이 세상에 그놈들이 없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여기에 그 자식들이 없는 게 당연한데 말이지.’

가족과 달리 그 부하들은 진혁이 직접 가려 뽑은 인물들이었다. 혈연으로 맺은 형제보다 더 진한 의리라고들 했다.

하지만 부하들과 자신 사이에는 벽이 있었다. 현대에서 온 진혁이다. 오랜 세월 동안 피가 흐르는 중원에서 활동하며 자신을 바꾸어왔다고 해도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은 그 독특한 면 역시 당연스레 받아들였다. ‘무공의 고수라 역시 다르다’며 납득했다.

‘내가 현대에서 왔다는 것을 광안마에게 이야기했던가, 하지 않았던가.’

현대에 돌아온 지 이제 일 년이 지났을 뿐인데 너무나 많은 일이 있다. 중원에서 있었던 일들이 성인이 된 후 그의 가치관을 형성한 만큼, 한국에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거기서 배웠고 경험했던 것들을 버리고 21세기의 대한민국의 가치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역시 임진혁이지만, 과거에서 무공을 수련했던 나 자신 역시 임진혁이다.’

진혁은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수만 명의 부하를 부리던 시절에, 부하들이 정보를 조사해 와도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 한 명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현대로 귀환하는 것을 위해 강해진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일들이 그를 방해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어머니의 소망, 아버지의 소망, 그리고 진희가 원하는 것…큰이모의 건강, 그리고 가게의 번영….’

진혁은 자신이 가족을 위한다는 생각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다시 돌이켜 보았다. 세속에서의 성공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던 것은 아니었다.

‘가족이 중요하지만, 가족만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오히려 중심을 잃어버리지.’

정파의 세가에서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며 자란 아이는 고된 무공수련을 버티지 못하고 일찌감치 포기한다. 아이의 어리광을 지나치게 받아주고 적당한 상벌을 주지 못하는 부모는 결국 아이를 망친다. 진혁은 지금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고,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어떤가.

“당장 마리오나 루이스만 해도,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기 위해서 이 대회에 참가했다고 했지….”

일류 무인이 현경에 달한 자와 검을 맞대면, 그 경험이 깨달음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좁은 주방에 갇혀 멀리 바라보지 못하는 자의 솜씨는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진혁의 시선은 눈앞에 있는 붉은색 티셔츠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끓어오를 것처럼 넘치는 양기가 대하처럼 도도하게 흘러 이미 개방된 임독 양맥을 타고 오른다. 명문을 통과한 기는 양팔의 바깥쪽을 통과해 손바닥 외측 노궁혈을 지나, 세맥을 지나 사지를 순환한다.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만큼, 아버지 역시 나를 아끼고 신뢰하고 계신다.’

어머니가 붉은 티셔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진혁이 좋아한다고 믿는 옷을 몰래 구해와 숨겨올 만큼 아끼신다.

진혁의 머리 위에 몽실몽실 피어난 연꽃 송이가 네 개, 다섯 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여섯 개, 일곱 개, 여덟 개나 되는 연꽃이 빙글빙글 돌았다. 전신에 활기가 넘치고 눈이 트인다.

“천안투마공을 운용하지 않아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나….”

눈을 감고 있어도 앞이 보인다. 그는 차분히 눈을 감고 다시 대주천을 시작했다.

‘마선(魔禪)이 되기 전에 다른 경지가 하나 더 있었어.’

운기조식을 마친 후 결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 임진혁은, 피식 웃으며 붉은 티셔츠를 집어 올렸다.

“이전에는 치즈 케이크 덕분이었는데, 이번에는 티셔츠 덕분인가.”

그는 한참 동안 티셔츠를 바라보다가 공을 세운 부하에게 상을 약속하듯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네 이름은 지금부터 광안마라고 하자.”

◈          ◈          ◈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의 두 번째 날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하루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회를 맡은 안토니오 바트입니다.』

『엘리자베스 포크너입니다.』

두 사람의 사회자가 무대 양쪽에서 각각 걸어 나오며 정중하게 인사하였다. 익숙한 클래식 음악이 편안하게 흐른다.

『오늘은 어제 휴지시킨 반죽이 등장할 차례죠?』

『안타깝게도 예선에서 탈락하신 분들의 반죽은 집으로 갔겠지만요.』

『오, 안토니. 당신은 너무 심술궂어요.』

엘리자베스가 놀리듯 킥킥거렸다. 안토니오 바트는 입꼬리를 올린 채 마저 해설을 계속했다.

『오늘 참가자 여러분들이 구워주실 이 빵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비운의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시집올 때 이 빵 레시피를 가져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크루아상과 동일한 레이어드 도우(Layered dough)를 사용하지만 초콜릿을 넣고, 반죽을 펴서 마는 방식으로 굽는 이 빵은, 프랑스에 있는 어느 불랑제리(Boulangerie)에서도 1유로 이하의 가격으로 한 개 이상을 살 수 있어요. 보통 아침이나 간식으로 많이 먹죠. 이쯤 말씀드리면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관객들을 보며 윙크했다. 불랑제리는 식사용 빵을 주로 판매하는 빵집이고, 파티쉐리는 케이크와 과자 등 이스트를 사용하지 않는 제과류를 판매하는 가게다. 중세부터 내려온 제과 길드와 제빵 길드의 오랜 알력싸움 때문에 현대에도 그 구분이 아스라이 남아있다.

『뺑 오 쇼콜라(Pain au chocolat)!』

관객석에 있던 페이스트리 업계의 관계자들과 기자들, 관광객들이 역시 마저 웃으며 대답했다.

『브라-보! 정답입니다!』

그녀가 손뼉을 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뺑 오 쇼콜라 또는 쇼콜라틴(Chocolatine)이라고 하는 이 빵은 프랑스에서 아주 흔한 빵입니다. 잘 구운 뺑 오 쇼콜라는 겉모습만 봐도 어떤 맛일지 이미 충분히 알 수 있어요.』

『맞아요. 덜 부풀어 올라 찌그러진 뺑 오 쇼콜라는 맛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어제 한 차례 실력을 증명해 여기에 남아계신 여러분들이 그만큼 능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여유롭게 예선을 통과한 대만 팀은 진행을 들으며 소곤거렸다.

「장 대형. 반죽 상태는 어때?」

마스크를 하고 장갑을 낀 양손이 분주하게 조리대 위를 노닌다. 장치앙린은 어제 버터를 넣은 반죽을 여러 차례 치대어 층층이 겹쳐 올려 준비해 두었다. 사실 절반 이상은 이미 끝났다고 보아도 된다.

「나쁘지 않아.」

그는 겹겹이 쌓아 올려져 동그란 반죽 위에 밀대를 굴려 평평하게 만들었다. 조리대 위에 납작하게 퍼진 반죽은 못난이처럼 울퉁불퉁하게 가장자리가 삐져나와 있다. 장치앙린은 빵칼을 들어 가장자리를 잘라내어 버리고, 깔끔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반죽을 준비했다.

옆에서 벨코라데 초콜릿 바를 조각내고 있던 리우마오유가 투덜거렸다.

「왜 뺑 오 쇼콜라를 오늘 하는지 모르겠어. 어차피 어제 하루는 초콜릿 앙트르메, 초콜릿 쇼피스를 했잖아. 이왕 초콜릿을 다루는 김에 같이 묶어서 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손질하기 쉽게 얼음 조각이 조금 더 녹기를 기다리고 있던 왕웨이가 불평했다.

「둘째 형… 불평하지 마. 어제 그 아수라장 속에서 뺑 오 쇼콜라를 같이 하는 건 난 반대야. 정신없어서 싫어. 그리고 얼음 장식할 때 말 걸면 집중이 분산되니까 조금 더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어.」

「앗, 말 시켜서 미안. 조각 잘 해.」

리우마오유가 사과하며 장치앙린에게 초콜릿 조각이 담긴 접시를 밀어주었다. 장치앙린은 똑같은 크기로 잘린 초콜릿들을 세심히 살펴보더니, 네 개를 골라내 반죽 위에 올렸다.

「룰루루.」

직사각형의 위쪽 끝에 초콜릿 조각을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반죽을 말아 올리며,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초콜릿을 속에 담고 말아 올리기를 전부 끝낸 후에는 달걀 물을 바를 차례다.

「리우마오유, 달걀 물은? 오븐 예열은?」

「예열은 30분 후에. 달걀 물은 여기에 있어.」

여러 차례 연습한 보람이 있어 호흡이 척척 맞는다. 장치앙린은 의동생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잘하네.」

「이 정도는 당연하지.」

리우마오유가 씨익 웃었다.

「아침부터 느낌이 좋아.」

왕웨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두 사람이 조용히 해 주지 않으면 우리 얼음 조각은 재수 없는 일을 당할지도 몰라.」

평상시에는 느긋한 왕웨이지만, 조각을 할 때는 주변이 조용하지 않으면 손을 떨거나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잦다. 장치앙린과 리우마오유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조심할게, 웨이.」

미국 팀은 그보다는 분위기가 좋았다. 브라이언은 리처드 베이커가 반죽을 주무르는 것을 보면서 밑준비를 해주었다. 브라이언이 깔끔하고 빠른 솜씨에 감탄했다.

『리처드 베이커 쉐프, 원래 윈도우 베이커리에 뺑 오 쇼콜라도 메뉴에 있었나?』

『그렇지.』

길게 잘라낸 뺑 오 쇼콜라 반죽을 자르고 초콜릿을 말면서, 리처드는 럭비 선수처럼 거대한 덩치로 흥겹게 어깨춤을 추었다.

‘희한하게도 신기한 춤을 추면서도 커팅이 어그러지지 않네.’

『연습할 때는 그런 춤은 안 췄잖아요.』

『진혁 쉐프네 카페에서 일할 때 뺑 오 쇼콜라를 엄청나게 만들면서 춤추는 연습을 했거든. 그게 도움이 되네.』

『…아니, 왜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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