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71화 (271/656)

제 271화

진혁이 피식피식 웃었다.

“아버지. 엄마랑 진희가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하지만 넌 좋아하잖냐.”

‘가족들을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랬지요.’

지금은 진짜 가족들이 있으니까 굳이 겉으로 보이는 티셔츠 따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는 빨간 티셔츠를 버릴 때 마지막에 진희와 어머니가 질색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 뭐, 그런 셈이죠?”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나도 이 티셔츠를 꽤 좋아한단다. 면 재질도 좋고, 남자다운 빨간색이고. 아주 편하단 말이지. 실용적인 데다가 저렴하기까지 한데 왜 여자들은 그걸 몰라주는지 모르겠어.”

진혁이 킥킥 웃었다.

“설마 저한테 이걸 갖다 주려고 프랑스까지 오신 건 아니시지요?”

“쿠프 드 몽드는 제과제빵 월드컵이라고도 하잖냐.”

‘진짜로 이걸 갖다 주고 싶어서 오신 건가.’

“진혁아, 내가 데려다줄게.”

진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닙니다. 시차도 있어서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네 말대로 시차 적응이 문제인지 잠이 안 온다. 네 숙소도 구경할 겸 데려다줄게.”

하지만 아버지가 완강하게 고집을 부려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걷는 계단을 한 단씩 천천히 내려갔다. 두꺼운 나무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오니 휘황찬란하던 간판의 조명들도 전부 꺼져있어 아까보다 훨씬 어두웠다. 어슴푸레하게 비추는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멀리서 낯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깜빡 비추었다가 다시 저물었다.

고요한 파리 시내에 나란히 서 있는 이 순간이 마법처럼 느껴져 진혁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답답하게 산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요.”

어렸을 적에는 따끈따끈한 빵을 매일같이 구워내는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넘어 처음 신체검사를 받을 무렵에는 그게 싫었다. 평범한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나 빽도 없고 돈도 없어서 남들 가는 대로 육군에 끌려가야 하는 게 괴로웠다.

군대에 가는 게 걱정된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피곤하니까 다음에 말하자고 계속 미루었다. 아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다고 오해했고 혼자 상처받았다.

열 평도 안 되는 시골 가게 주방에 콕 박혀서 매일같이 빵만 만드는 아버지가 무능력하다고 느꼈다.

‘열 몇 시간씩 매일매일 일하고 집에 돌아와 지쳐 잠드셨지.’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르다. 아버지가 반죽을 왜 그렇게 하냐고 야단친 것은 자신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내가 상급자의 위치에 있어 보니까 알겠어.’

정말로 실망했다면 아예 야단조차 치지 않는다. 그 업무에서 배제한 다음 다른 일을 시킨다. 혈도객의 경우가 그랬다. 상업에 재능이 없다 보니 만두 상인으로 가장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서, 다음부터는 아예 가장하고 잠입하는 종류의 업무를 일절 주지 않았다. 굳이 기운 빠지게 화낼 필요가 없다.

좁은 가게에서 묵묵히 일하던 아버지다.

‘아버지에게는 가족보다 가게가 더 소중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지.’

회귀 전, 아버지가 자신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오븐부터 시작해 기자재를 팔아치우고 가게까지 넘기고 나서야 알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이유는 빵을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만이 아니라, 가족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버지, 학교 다니는 건 어떠세요?”

“정신없지만 좋아. 젊은 애들을 가르치는 거 하고, 내가 배우는 건 또 다른 거니까.”

박사 학위 과정을 하면서 제과제빵학과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논문을 쓰는 것이 어렵다며 가볍게 불평했다.

“제과제빵은 확실히 과학이야. 이번에는 온도에 따라서 맛의 차이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연구하고 있는데, 너도 알면 도움이 될 거다. 혹시 너도 알고 있니?”

진혁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온도가 올라갈수록 짠맛이 더 순하게 느껴진다는 것 말이에요?”

뜨거운 된장찌개에 간을 맞추었다가 요리가 식고 나면 더 짜게 느껴진다. 따뜻하지 않은 수프가 맛없게 느껴지는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그래, 잘 아는구나. 그럼 단맛은?”

“차가우면 덜 달게 느껴지니까, 아이스크림에는 다른 빵이나 과자보다 설탕이 더 많이 들어가죠.”

“맞아. 지금 설탕을 제일 적게 넣어도 맛있게 느껴지는 온도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아버지가 활기차게 말했다.

“개인마다 미각이 전부 다르게 반응하지. 온도가 낮을 때 단맛이 덜 느껴지니까 그 반대가 되면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져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 경험적으로 보면 오히려 너무 뜨거워지면 단맛이 덜 느껴지지.”

“갓 구워내 따끈따끈한 초콜릿 칩 쿠키는 식은 초콜릿 칩 쿠키보다 덜 달죠.”

“그래! 바로 그거야. 미뢰의 감각이 뜨겁다는 감각을 더 우선해서 그런 것 같아. 현재 따뜻한 요리는 60~70도에서, 차가운 요리는 5~12도에서 제일 맛있게 느껴진다고 해. 하지만 요리마다 제일 맛있게 느껴지는 온도는 다 다르지. 그래서 지금 내 박사 논문 주제는 어떤 온도에서 단맛이 제일 잘 느껴지는지야.”

“…설탕을 덜 쓰기 위해서군요?”

“맞아. 달지 않은 빵은 맛이 없으니까, 제과제빵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설탕을 쓰게 되지. 대부분의 레시피에도 한 스푼 이상의 설탕을 넣고 있고. 하지만 설탕을 최대한 덜 넣고서도 맛있는, 건강한 빵을 만들고 싶구나.”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고, 야망이 있었다. 예전에는 그것들을 전부 버렸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뿐이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내가 혼자 한 생각은 아니야. 네가 말한 것들을 보면서 생각해 냈지.”

“제가요?”

“네가 은효를 생각해서 건강에 좋은 빵을 만든다고 했지. 우리나라에서 기른 우리꼬맹이밀 밀가루라든가, 그린워터 농장에서 직접 기른 채소 같은 걸 사용하고 있잖아.”

“예.”

“그 샌드위치를 자주 먹은 사람들이 건강이 좋아진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어. 햇살 노인정 사람들만이 아니란다.”

“전부 아버지가 같이 계셨던 덕분에 만든 샌드위치인데요.”

“아니야. 그건 전적으로 네가 혼자 만들어낸 빵이다. 내가 오히려 네 발목을 잡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 아버지, 그런 생각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다. 똑같은 제과제빵사라고 해도 각자 재능은 달라. 누군가는 초콜릿을 잘 다루고, 누군가는 빵을 잘 굽지. 너는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개발해내고 창조하는 데에 능력이 있어.”

아버지는 진혁의 양어깨를 잡고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진혁이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매일같이 새로운 빵들을 하나씩 개발해내는 것과 매일 맛을 유지하면서 대량의 빵을 구워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것도 저것도 쉬운 일이기 때문에 특별히 무엇을 잘한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같은 빵을 하루하루 반복해 구워내는 일은 내가 평생 해온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할 일이야. 네가 보기에는 지루해 보이고 재미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일이 좋다.”

“….”

“너는 지금 둘 다 잘 해내고 있어. 가게도 잘 굴러가고 있고, 새로운 빵이나 초콜릿을 개발하는 일도 잘 하고 있지. 하지만 네가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뭐냐?”

“그건….”

“2대째 빵집을 했으면 좋겠다는 건 내 욕심이다. 네가 내 자리를 반드시 물려받아서 빵집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진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 왜 제가 매일 빵집에서 빵을 만드는 걸 지루해한다고 생각하세요?”

“이 자식아. 그걸 말해야 알아? 난 네 애비다. 보면 알아.”

“….”

진혁이 멀뚱멀뚱 아버지를 쳐다보자, 아버지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정말로 그 자리에서 빵을 만들어 파는 데에 순수하게 만족하고 있다면, 여기까지 와 있겠냐?”

아버지는 양팔을 벌려 양쪽에 있는 이국적인 건물들을 가리켰다. 꼬불꼬불한 프랑스 글자로 적힌 간판과 표지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

‘그냥 둘 다 동시에 할 수 있을 것 같고,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한다고 한 거였는데.’

하지만 대회에 나오기 위해서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도 사실이다. 진혁이 무언가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기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아야지.”

진혁이 머뭇거림 없이 바로 말했다.

“아버지 옆에서 빵을 만들어서 가족 전부 다 넉넉하게, 모자람 없이 살게 해주려고 했는데요.”

아버지는 이미 자신보다 한참 커버린 아들의 머리에 손을 올려, 슥슥 쓰다듬었다.

“네가 얼마나 착한 녀석인지는 안다. 책임감이 강한 것도 알고.”

바람이 불어 구름이 움직였다. 구름 사이에 가려져 있던 달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보름달이었다.

“넌 이제 사회에 막 발을 내디뎠어. 아직 어리다.”

달빛 아래에서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남의 밑에서 일하면서, 독립해서 자신만의 가게를 갖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적지 않아. 하지만 막상 진짜로 자신만의 가게를 갖게 된 후에는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지. 철우도 그래서 고민하다가 어렵게 열었던 가게를 팔고 호텔로 다시 돌아갔지. 고구려 호텔의 페이스트리 키친의 헤드로 일하면서 만족하고 있잖아.”

“황 씨 아저씨가 개인 가게를 열었던 적이 있었어요?”

“너는 어렸을 때라 기억이 안 날 거야. 반년 정도 열었다가 바로 처분했거든. 자기는 천상 호텔 체질이라고 하더라.”

아버지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다. 지금 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시하면 좋겠구나. 가족들은 이미 충분히 잘살고 있으니까 말이야.”

“…예.”

진혁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니 그렇지 않아도 가까운 길이 더욱더 짧게 느껴졌다.

“깔끔한 방이네. 젤로스 사에서 꽤 대접해주고 있는 모양이야.”

아버지는 진혁의 방이 꽤 괜찮다며 만족스러워하셨다.

“그걸 보려고 오신 거예요?”

“가끔 대회 후원한답시고 이상한 방에 머물게 하는 곳도 있더구나.”

그리고 어서 자라며 자리를 떴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오냐.”

창문 아래로 찻길을 건너는 아버지의 신형이 내려다보인다. 진혁은 아버지가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보았다. 기감을 발동해 무사히 아버지가 잠자리에 든 것까지 확인한 후, 그는 결가부좌로 앉았다.

운기조식을 취하는 그의 머리 위에 세 개의 연꽃 모양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단순히 평범하게 살아가며, 가족들을 도우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기존의 빵에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빵과 음식을 개발하는 것이 즐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욕망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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