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0화
“흐음, 그게 안 된단 말이지.”
임진혁은 H&J 카패 앤 베이커리 시절, 어깨너머로 배우기는커녕 레시피를 떠먹여 줘도 수십 번 연습해야 간신히 하나의 빵을 완성시키던 김은동을 떠올렸다.
‘일봉이나 유키코 쉐프는 알아서 잘 하던데.’
진혁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나 힐끗 보았다.
랑비에는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임운정 씨 숙소는 어딥니까?”
“13구에 있는 호텔입니다.”
“다행히 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네요.”
에일린은 아들들에게 당부하는 중이었다.
“자, 네가 부탁했던 신발.”
“엄마! 고마워요!”
비닐에 감싼 신발 상자를 받아든 마리오가 흥분해서 콧김을 뿜으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에어이지 레드디셈버, 이건 발매 전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건데.”
“아기야, 아기.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이런 운동화에 집착하는지 몰라.”
에일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가 아직 이 신발의 매력을 몰라서 그래요.”
“어차피 발은 두 개밖에 없잖니? 한 번에 신을 수 있는 신발도 한 켤레고. 루이, 마리는 잘하고 있어?”
“요즘 아주 진지해요. 실력도 많이 늘었고.”
“그래, 형 하는 만큼만 해라.”
“엄마. 형이랑 나랑 이제 분야가 다르다니까. 나는 계속 정통 제빵을 하고 있는데, 형은 아예 얼음 조각 쪽으로 분야를 확 바꿔버렸잖아요.”
“네 형이 겨울마다 얼음 조각을 한 지 몇 년은 됐어. 이번에 빡세게 준비해서 대회 나갈 정도로 실력을 키운 거지.”
“….”
“너, 꼭 한국에서 학교 다니고 싶다고 조르더니 한국 학교 자퇴하고. 유투버로 먹고 살겠다고 하더니 방송도 안 하고. 제과제빵에 집중하겠다며.”
“알아서 할 거예요.”
마리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루이스가 물었다.
“어머니, 그럼 오늘 바로 뉴욕으로 돌아가시나요?”
“아니, 이번 주는 있다가 갈 거야. 쿠프 드 몽드 참관하는 거래처들은 만나고 가야지.”
“마리도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알았다.”
아들들과 이야기를 끝낸 에일린이 임운정에게 말을 걸었다.
“임운정 쉐프님, 그리고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괜찮은가요?”
“예?”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세요?”
뜻밖의 질문에 임운정이 눈을 크게 떴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진혁 쉐프도 피부가 좋던데. 잡티나 기미가 없고 주름도 덜하셔서 부자라기보다 형제처럼 보여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특별히 쓰고 계신 화장품은 없으세요?”
“그런 건 없습니다. 면도할 때 쉐이빙 폼 쓰는 것 정도…?”
에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식이요법과 운동을 하면서 관리를 하시나요? 건강기능식품을 드신다거나.”
“농약 없이 기른 유기농 채소와 우리 밀로 만든 빵을 주로 먹기는 하지요. 그렇다고 특별히 식사를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아 참, 아들이 가르쳐준 기 체조를 하는데 그게 효과가 아주 좋아요.”
“저는 필라테스 개인 교습을 몇 년째 받고 있는데, 자세는 많이 좋아졌지만, 체중 조절과 피부 관리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 그 아드님이 알려 주신 체조는 어떤 건가요?”
“어…그게.”
가로등이 환히 켜진 파리의 거리 한복판이다. 임운정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서 조심스럽게 양팔을 움직여 보였다.
“이렇게요?”
그는 진혁이 몇 번이나 훈련시킨 태극권의 기본자세를 했다. 기본자세라고 해도 단순히 서 있는 것뿐이다. ‘먼저 양발을 벌린 다음에 척추를 곧게 펴고 신체를 안정시켜, 몸을 움츠리지 않고 어깨를 편 채로 양팔을 편안하게 늘어뜨리고 긴장을 풀고 자연스럽게 서 있는….’
집에서 몸뻬 바지를 입고 아내와 함께 흐느적거리며 할 때는 자연스럽게 되던 자세인데, 낯선 사람 앞에서 하려니 어색하다. 임운정이 뻘쭘해 하며 웃었다.
“대충 이렇게 시작하네요.”
누구나 서 있을 수 있지만,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서 있는 자세’는 아흔두 종류의 투 권으로 막힘없이 진행할 수 있는 가장 기본자세로, 몸의 어느 한 부분도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레 서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팔이나 다리 등 한 부분의 근육이 긴장해 수축해 있다면 반응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기 때문이다. 진혁이 수백 번, 수천 번을 다그쳐 만들어낸 이 자연체(自然體)의 자세다.
문외한인 에일린은 이 자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정말로 그저 서 있는 것뿐인 자세를 보고 그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드님이 계속 제빵만 해 온 거로 알고 있었는데 운동도 따로 하셨나 봐요.”
“군대에서 배워 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아들은 방송이니 뭐니 한다고 군대를 미루었는데, 빨리 갔다 와서 저한테도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는데.”
“아마 부대마다 다를 겁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에일린이 진혁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말과 함께 이야기를 건넸다.
“아까 한 말은 진담이에요. 우리 회사는 최근에 아이들을 위한 제빵 DIY 키트를 개발하고 있는데, 거기에 진혁 쉐프가 만든 ‘맛있는 모델링 초콜릿’이 들어간다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현재 유통 목표로 프랑스와 미국부터 시작해 유럽과 캐나다까지 내다보고 있으니, 진혁 쉐프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말에 진혁이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당분간은 대회 때문에 이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상 거절에 가까운 말이나, 에일린은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천천히 생각하고 답을 주셔요.”
“알겠습니다.”
에일린은 아들들을 격려한 후 돌아갔으나 임운정은 같은 차에 탔다. 늦은 밤, 세느 강변을 달리는 자동차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은 미묘하게 더 길고 낮았다. 서울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스카이라인 아래, 가로등 조명이 검은 강물에 반사되어 은은한 은백색 불빛을 점점이 수놓았다.
도착할 즈음, 마리오가 진혁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엄마가 말한 건 신경 쓰지 마. 나나 형을 신경 써서 엄마랑 계약할 필요는 없어. 엄마 사업도 아주 잘 되고 있으니까.”
진혁이 피식 웃었다.
“알아서 할게.”
“아니, 우리를 생각해서 양보하지 않아도 돼. 넌 원래 그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를 공개한다고 했잖아.”
랑비에가 놀라며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젤로스 사에서도 이미 로열티 계약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약을 포기하고 레시피를 공개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루이스가 거들었다.
“그래, 로열티 계약을 맺으면 네가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이 계속해서 들어오잖아. 왜 돈이 열리는 나무를 거절해?”
임운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혁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곁눈질로 바라본 임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말했다시피 이건 이미 전 세계에 공개된 거나 마찬가지인 레시피입니다. 유채꽃 오일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는 별도의 채널로 공개할 생각이고, 계약할 생각은 없습니다.”
랑비에는 조용해졌다. 운전을 계속했다.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아 한밤의 드라이브는 금방 끝났다.
“그럼, 내일 오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강 씨 형제가 먼저 무거운 장식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진혁은 랑비에에게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젤로스 사에서 후원해주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대회 전에 준비하면서 만든 로즈 오일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 등, 다른 일곱 가지 종류의 플라워 오일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는 있습니다만, 혹시 거기에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
랑비에가 신중하게 말했다.
“이미 시몬 리옹이 호평한 유채꽃 오일 모델링 초콜릿 레시피가 제일 좋습니다. 하지만 다른 레시피가 7가지나 더 있다니, 판매를 위해서는 더 좋기도 하겠군요. 제가 내일 대회가 끝나기 전에 계약 조건을 정리해 가져오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랑비에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임운정은 진혁을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젤로스 사하고 계약할 생각이었구나.”
“굳이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데서 속을 전부 밝혀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쪽에서 섭섭해할까 해서 그렇게 한 거냐?”
“에일린 씨는 원래 초콜릿을 취급하고 있다고 하니까요. 아이들을 위한 DIY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니까, 웨이퍼 페이퍼와 카카오 버터 물감으로 나비 만들어 그리기 장난감 키트 같은 거라도 제안할까 싶어요. 그건 애들이 만들다가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으니까.”
이야기를 들으며 주름이 거의 없는 얼굴에 어둑하게 미소가 번졌다.
“진혁이 네가 사람 다루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구나. 그런 것까지 생각해 놓고.”
임운정이 환하게 웃었다. 진혁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잘 가르쳐 주셔서 그렇죠.”
“전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었지? 하지만 그건 아니다. 나였다면 레시피 공개는 하지 않고 그냥 한 군데하고 계약하고 끝냈을 거야.”
아버지가 깊은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미리 제대로 소개서를 제출했다면 골드 메달도 가능했다고 이야기했지. …그것 때문에 레시피를 공개하기로 결정한 거냐?”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 보고 맛보면 알게 될 겁니다. 제가 대회에서 만든 초콜릿 작품이 실제로는 어떤 맛인지 말이죠.”
아버지가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었는지 입을 잠시 다물었다가, 진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나는 널 응원한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 숙소는 이 근처 어디에요?”
아버지는 진혁의 숙소에서 대각선 위치에 있는 호스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저기야. 맞은편이지.”
“진짜 가깝네. 일부러 여기로 구하신 거예요?”
“그래, 내일 대회에도 가서 응원할 거야. 진희가 플랜카드도 만들어 주었다.”
“플랜카드는 괜찮아요.”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학교 강의 일정이 있어서 이틀째, 사흘째 대회까지 보고 바로 귀국해야 한단다. 이틀 동안은 현수막으로 응원할 테니까 걱정 말거라.”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버지, 제가 숙소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바로 앞인데? 내일도 일찍 나가야 할 텐데 그냥 돌아가서 자는 게 좋지 않겠어?”
“파리 호텔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려고요.”
“그러면 따라와라.”
『손님, 2인 숙박으로 변경하십니까?』
『아닙니다, 들렀다가 바로 나갈 거예요.』
데스크에 있던 안내원과 짧은 대화를 나눈 후, 두 사람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도 헉헉거리지 않았다. 환골탈태 후에 체력이 늘어난 덕분일 것이다. 진혁은 뿌듯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방은 비슷하네요.”
“나쁘지 않아. 나는 손 좀 씻고 오마.”
아버지의 방은 진혁의 방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진혁은 방을 구경하는 척 돌아다니면서, 이틀 정도 효과가 있을 오행진을 새겼다.
‘오늘 밤에는 푹 주무실 수 있기를.’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그는 아까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묻지 못했던 질문을 했다.
“아버지, 정말로 별다른 일은 없으시고요?”
“그냥 너 응원하려고 왔지. 아 참, 선물도 있어.”
아버지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네가 좋아하는 옷이다.”
낯익은 빨간색 티셔츠를 본 진혁이 눈을 껌뻑거렸다.
“아버지, 그건….”
얼마 전에 어머니와 진희가 전부 갖다 버린 문제의 티셔츠다.
“이걸 잘 입었잖아. 그래서 일부러 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