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67화 (267/656)

제 267화

시몬 리옹.

베이커리계의 원로로 군림하고 있는 그에게도, 초콜릿 한 조각이 황금처럼 귀하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다.

그는 사실 파리 출신이 아니다. 르와르라는 시골 마을 출신으로,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간식거리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다른 마을 사람들 역시 등골이 휘도록 일하지 않으면 입에 거미줄을 쳐야 하는 곳이었다. 어렸을 적 시몬 같이 몸도 약하고 비실비실한 소년은 하루 한 끼 얻어먹기도 힘에 겨웠다.

몸이 약하니 일을 할 수가 없고, 일하지 못하니 제 밥벌이를 할 수가 없다. 제때 끼니를 챙겨 먹지를 못 하니 몸은 점점 더 허약해진다. 악몽 같은 연쇄 사슬 속에서도 그는 어떻게든 허드렛일 한 조각이라고 하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다가 로랑 할머니를 만났다.

『너는 왜 우리 집 창문에 돌을 던지지 않니?』

빨간 지붕 집에 혼자 살던 할머니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른 동네 소년들은 할머니보고 마녀라고 하면서 돌을 던지거나 죽은 쥐 사체를 갖다 놓았다.

『…그냥요?』

하지만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바빴던 시몬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는 착한 아이구나.』

한여름 뜨거운 유채꽃밭에서 김매는 할머니 근처에 얼쩡거리다 보면, 할머니가 앞치마의 주머니 속에서 반쯤 녹아 은박지에 달라붙은 초콜릿을 꺼내 주었다. 단 것이라고는 스콘밖에 먹어보지 못한 소년에게 그것은 천상의 맛이었다. 폭력적이기까지 한 단맛. 그걸 받으면 은박지까지 먹어버릴 기세로 깔끔하게 핥아먹었다.

『너처럼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아는 애가 교육을 받아야 해.』

할머니는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주었고, 시몬이 상급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학비와 기숙사비를 대 주었다. 상급학교를 졸업한 후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시몬 리옹은 할머니가 좋아하던 초콜릿을 만질 수 있는 제과사의 도제가 되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돈이 필요했고, 할머니는 그가 도제로 들어갈 수 있도록 보증금을 내주었다.

벌써 몇십 년 전의 이야기다. 성공한 페이스트리 쉐프가 된 지금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된 옛 기억이다.

『하아….』

뜨거운 햇볕, 끈적해진 손, 등 뒤에 흘러내리는 땀, 강렬한 유채꽃밭의 향기.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로랑 할머니….』

시몬 리옹은 늪에 잠겨 들듯 옛 추억에 잠겨 있었다.

『다크 초콜릿에 유채꽃 향이라, 독특한데. 거기에 오렌지 맛 캔디에 깨지면 흐르는 검은 딸기잼도 아주 잘 어울려.』

라이언 윈체스터가 중얼거렸다.

『말랑한 모델링 초콜릿, 그리고 보통 다크 초콜릿에 딸기 사탕까지, 세 종류의 식감 차이를 두었어.』

『오렌지 맛 다크 초콜릿에 유채꽃 향을 낸 이유가 뭐죠?』

『너무 맛있는데.』

저 시몬 리옹까지 손가락을 빨면서 초콜릿 맛을 보고 있다.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몽롱한 표정을 하고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맛만 보겠다던 심사위원들이 마치 정식 심사를 하는 것처럼 열렬하게 토론을 시작하자, 참가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맛있는 모델링 초콜릿’을 원한다고 미리 공표했으면 우리들 역시 거기에 중점을 두었을 텐데 말입니다.』

체코 팀의 마렉이다. 그가 불길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푸른 눈으로 심사위원들을 응시했다.

『대회에는 미리 공표한 심사상의 가산점과 규칙이 있습니다. 초콜릿 쇼피스에서는 ‘맛’은 심사 기준이 아니고요. 그걸 내세워 상을 주는 것은 부당합니다.』

유일하게 초콜릿을 먹지 않은 보조 진행자, 알리샤가 대답했다.

『디저트가 맛있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미스터 마렉이 말한 대로, 초콜릿 작품을 제출하는 대회에서는 보통 맛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외면만을 봐요. 그런데도 프랑스 팀은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초콜릿 쇼피스라는 기준에 ‘맛있음’이 포함된다고 생각해서, 샘플을 따로 제출했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플러스가 된 겁니다.』

아까 발표한 공식 입장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이야기다. 초콜릿의 황홀한 맛에 전율하고 있던 엘리자베스 포크너 역시 거들었다.

『단순히 ‘맛있는 모델링 초콜릿’이기 때문에 가산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래된 한 채의 건물일 뿐이지만 혁명 이후 프랑스인의 국민성과 같은 달콤하고 강렬한 맛을 내면에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요.』

심사위원들은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의 심사위원이 편파적으로 점수를 준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임진혁 쉐프가 ‘맛’을 신경 썼는데도 심사위원에게 공개하지 않은 점은 정말로 아쉽네요.』

『그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심사가 끝났고 점수 역시 공표된 이상 더 이상 수정을 할 수는 없지요.』

『이 모델링 초콜릿은 충분히 상업화를 해야 할 맛입니다.』

방금 전에 맛본 초콜릿이 아무리 맛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발표한 수상 내역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의 권위 자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한 팀의 맛을 평가하고 점수에 포함했다면, 다른 팀의 맛 역시 제출하라고 해서 평가했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논란이 나오지 않게 말이죠.』

주영모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심사위원들의 토론은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다.

『허, 참!』

『설탕물 섞어 얼음 조각하는 소리 하네.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야. 누가 얼음 조각을 보고 맛을 평가하냐고.』

『하지만 그게 지금 우리가 해버린 일이지.』

『대회의 권위가 실추되었어.』

『아까 화재 사고 때부터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죠. 지금 권위 따위가 중요한가요? 공정성 논란이 일면 곤란합니다.』

주영모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시몬 리옹이 말했다.

『대회는 아직 더 남아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뛰어나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실력을 발휘하겠죠.』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짧은 시간 동안 결론을 낸 심사위원들을 대표해 시몬 리옹이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 포크너에 이어 안토니오 바트가 말했다.

『종일 불과 얼음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참가자 여러분, 그리고 멀리서 와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 내일 이곳 같은 자리에서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회 첫날이 끝났다. 다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어 웅성거렸다.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발표도 끝나고 심사도 끝났는데 시식을 하다니.』

『초콜릿 조각을 먹고 난 다음에 심사위원들이 뭐라고 한지 모르겠네.』

『이상한 일이야.』

관객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참가자들은 무대 뒤편의 대기실로 향했다. 소란스러웠던 관객석과 달리 대기실은 조용했다.

탈락한 독일 팀은 조용히 가방을 챙겼다. 짐을 챙기는 두 사람, 필즈너와 헬레나 앞에서 하인리히 윙켈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헬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뭐. 다음에는 그 완벽주의 좀 버려.』

필즈너가 말했다.

『주방에 짐을 두고 왔어.』

『설마 그 뺑 오 쇼콜라 반죽 말이야? 내일 만들려고 했던 거.』

『그거, 가지고 갈 거야.』

『다 구운 빵도 아니고 반죽을 가져가서 뭘 하게?』

『집에 혼자 가서 구워 먹을 거다.』

『맘대로 해.』

대만 팀의 장치앙린 역시 시무룩해 있었다. 왕웨이가 스마트폰과 재킷을 챙기며 말했다.

「중국 팀은 아까 마지막 결승을 하는 동안에 이미 짐을 다 뺀 모양인데. 장 대형, 대회 결과가 나오면 말을 건다며?」

「우리는 예선을 통과했지. 하지만 중국 팀은 아예 예선 심사도 받지를 못했잖아.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내가 메이링에게 말을 걸어도 될까?」

「대형, 연락처는 알아?」

「모르지.」

리우마오유가 말했다.

「내 북경제과학교 동기인 유마오신 알지? 걔 고등학교 동창이 메이링과 사촌 사이라고 들었어.」

왕웨이가 킥킥 웃었다.

「뭐야, 그게? 사돈의 팔촌 옆집 사는 소리잖아. 그 동창하고 메이링이 사촌 사이인 건 어떻게 알았어?」

「웨이보(Weibo)에서 알았어. 장 대형이 용기를 낸다면 내가 웨이보에서 메시지를 넣어 볼게.」

장치앙린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은 모르겠다. 마오유, 일단은 이번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데 집중하자.」

「오케이.」

「고맙다. 너희들 같은 좋은 동생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오늘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고 걱정할 것 없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우리가 노력한 만큼 하늘이 지켜보고 있을 거야.」

「힘내자고.」

오히려 금메달을 받은 프랑스 팀 측이 어두운 분위기였다. 주느비에브가 투덜거렸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었길래 저 시몬 선생님이 손가락을 빠는 거야? 나도 먹어보고 싶네.』

필리프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진 거나 마찬가지야. 그 한국 쉐프가 내놓은 초콜릿 먹고 나서 스승님 반응을 봐. 우리가 만든 걸 먹었을 때 그런 얼굴을 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무슨 소리야, 필리프! 그래도 메달을 가진 건 우리라고.』

주느비에브와 필리프의 대화를 들으면서 조제프 쇠비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승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조제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얼굴은 처음 봤어. …사실은 이미 진 거나 마찬가지야. 내일은 제대로 솜씨를 보여야 해.’

그는 한국 팀의 사물함 쪽을 응시하며 결의를 다졌다.

반면에 미국 팀은 의외로 분위기가 좋았다. 브론즈 메달을 손에 쥔 리처드 베이커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하튼 임진혁 쉐프야. 깡이 좋다니까. 그 시점에서 그렇게 나가서 얘기할 줄은 몰랐어.』

브라이언 신은 임진혁보다 진혁이 만든 초콜릿에 더 관심이 있었다.

『리처드 쉐프, 식용 모델링 초콜릿을 맛좋게 할만한 테크닉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 나도 생크림과 마시멜로를 섞어서 부드럽게 할 수는 있어. 하지만 그 정도는 여기에 있는 우리는 물론이고 심사위원들도 다 할 수 있을걸. 도대체 뭘 다르게 한 걸까?』

『마시멜로를 섞으면 모델링하기가 힘들잖아. 진혁 쉐프가 만든 건 정말 궁금한데….』

『레시피를 공개해달라고 해도 공개하지 않겠지?』

토마스 브라운이 고개를 저었다.

『저 정도 되는 맛이면 이미 레시피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지 않겠어? 로열티로 돈방석 앉는 거 아닐까 몰라.』

『공장화가 가능한 레시피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          ◈          ◈

한국 팀원들이 대기실에서 나오자, 놀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부터, 플래쉬를 터트리는 사진사들까지 한둘이 아니었다.

『임진혁 쉐프! 이번 쿠프 드 몽드 대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한 말씀 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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