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4화
◈ ◈ ◈
쿠프 드 몽드 대회가 시작 직전의 일이다. 기자나 방송인들 말고도, 한국에서 대회를 주목하며 방송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다.
“여러분, 안녕! 파리 제빵 월드컵 실시간 스트리밍 BJ 옥빵상제입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난 소년이 활기차게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특별 게스트, 이재희입니다.”
짧게 자른 단발머리인 여고생이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국어책을 읽듯이 말했다. 도을이가 신나게 재잘거렸다.
“재희 누나, 누가 이런 데서 본명을 써. 닉네임 없어, 닉네임? 아니면 내가 하나 지어줄게. 럭키재희 어때?”
“그게 본명이란 뭐가 다른데?! 그리고 자칭 옥빵상제한테 이름 달라고 하고 싶지 않다고.”
도을이 킥킥대면서 말했다.
“재희 누나가 럭키하긴 해요. 진혁이 형 팬클럽 회원 중에서 유일하게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당첨돼서 실제로 샘플 케이크를 먹어본 사람이거든요. 진~짜 부러워서 내가 그때 TV 뚫고 들어가고 싶었어.”
“그거 말고도 평소에 자잘하게 운이 좋은 편이에요.”
“로또를 사면 1억이 당첨되는 레벨?”
“5천 원 주고 사면 오천 원 당첨되는 정도.”
“진짜 애매하네.”
“진혁 쉐프님 쇼에 당첨되려고 기운을 다 뽑아 써서 이제 안 남아있나 봐요.”
“아-나도 당첨되고 싶은데! 난 운이 없는 편이야.”
“대신 옥빵상제 너는 인기 있잖아.”
옥빵상제라는 이름으로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주로 하던 김도을이다. 그가 유튜브를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두 달 정도 됐다.
태권도 대회에서 받은 상금으로 최신형 스마트폰과 소형 마이크를 샀고, 직접 사 먹은 빵에 대한 리뷰를 동영상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봐주는 사람이 몇 명밖에 없는 초라한 채널이었으나 지금은 적어도 천 명 이상의 팔로워가 있다.
‘진바라기 회원들이 우르르 찾아오면서 금방 커졌지.’
이재희는 김도을을 힐끔 바라보았다.
‘얘는 진혁 쉐프님을 형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 좋겠다.’
그냥 얼굴만 보면 평범한 중학생인데 의외로 이것저것 재능이 있다. 빵을 먹고 맛을 알아내는 것도 잘 하고, 그 맛을 표현하는 능력도 좋다. 직접 쓴 대본에 맞게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솜씨도 나쁘지 않다.
“도을아. 나 어색해?”
대본을 보면서 읽던 이재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도을이 카메라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음- 차라리 대본을 찢어버리는 게 낫겠는데요, 누나.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
재희가 고개를 떨구었다. 도을이 풀죽은 여고생을 보더니 코를 슥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누나, 저거 보니까 어때요?”
그는 임진혁이 케이크를 만드는 동영상 클립을 재생하고 재희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금 크림 짜면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진혁 쉐프님, 너무 멋있는 거 아니야?”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외치는 그녀는 솔직하고 귀여워 보였다. 도을이 손뼉을 탁 쳤다.
“차라리 이렇게만 합시다!”
“오?”
“대본 보고 읽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트리밍 영상 보면서 말하는 게 낫겠는데요.”
“응.”
“그때 방송 나왔던 것만큼만 해 봐요. 이제 금방 결승 편 스트리밍 시작할 테니까.”
프랑스 시각으로 아침 9시에 시작하는 쿠프 드 몽드.
한국에서는 오후 4시다.
“어차피 우리가 중요한 게 아니고, 형이 빵 만드는 게 중요한 거니까.”
대본을 찢어 버리고 카메라 앞에 앉는 도을을 바라보며, 재희가 물었다.
“그런데 도을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너는 이 방송을 왜 하는 거야?”
“어? 글쎄, 그건 너무 당연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난 임진혁 쉐프님이 세계 대회 나간 걸 보고 더 널리 알리고 싶으니까 하는 거잖아. 진바라기 회원이니까. 그런데 넌 진바라기도 아니고.”
“그치. 내가 동네 형 팬클럽에 들어갈 이유는 없지. 난 페이스북도 안 하고, 페이스북 그룹 메신저에도 관심 없어요.”
재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진바라기가 페이스북 기반의 팬클럽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일반 회원들은 이너서클들만 사용하는 그룹 메신저의 존재를 모른다.
‘이 녀석도 최소한 골드 회원 이상 급이네. 팬클럽 회원인 게 부끄러운 일도 아닐 텐데 왜 숨기지?’
도을이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말했다.
“솔직히 난 진짜 별 볼 일 없는 애였거든요?”
“어, 뭐가? 넌 태권도 대회도 나가서 상도 타고, 이렇게 방송도 하고, 대단하잖아. 난 중학생 때 그냥 학교만 다녔는데.”
“….”
“그냥 평범해서, 너 같은 애 보면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답답하다는 듯이 도을이가 대답했다.
“저 안 대단해요.”
“…!”
“엄마랑만 둘이 사는데 엄마가 맨날 일하느라 바빠서 나를 챙길 수가 없었어요. 키도 작고 별 볼 일 없어서 중학교 처음 올라왔을 때는 완전히 애들 시다바리였고, 사는 게 거지 같아서 맨날 학교 갈 때마다 그냥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했거든.”
김도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재희는 어쩔 줄 몰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안, 내가 괜히 물어봐서.”
“그런데 빵이 너무 맛있어서.”
“응?”
“그날도 다른 날이랑 똑같이 엿 같은 날이었거든요. 학교 가기 싫은 날. 그래도 아예 안 갈 수는 없으니까 가방 메고 일단 학교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동네에 있던 완전 구린 빵집에서 치즈 케이크를 미친 가격으로 파는 거예요.”
“그 얘기 들어봤던 것 같아.”
“솔직히 그전에 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한 번쯤은 먹어보고 싶었는데, 음. 엄마는 일하느라 바쁘니까 생일 때는 그냥 미역국으로 스킵하고, 뭐 친구들 불러서 파티할 것도 아니고. 여튼 그래서 그 케이크를 먹어봤는데 이건 뭐, 갑자기 벼락을 맞은 거죠.”
“벼락 맞은 맛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케이크지. 난 그전에 케이크를 먹어봤지만, 진혁 쉐프님이 만든 케이크는 정말 차원이 다르니까.”
“그걸 또 먹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까 너무 짜증 나는 거예요. 당장 먹고 싶은데. 그래서 내일이 오기를 기다렸죠. 밤에 이불 덮고 누워 있는 데 와, 진짜.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는 거야. 다음날이 기다려지고.”마치 종교적인 열정을 고백하는 것처럼 도을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케이크 한 조각 갖다 드리니까, 엄마도 좋아하시고. 솔직히 좀 주기 아까웠는데 그렇게 행복해하니까 일주일에 두 개 정도는 드려도 되겠다 싶고.”
“그럼 넌 몇 개 먹었는데?”
“일주일에 열네 개. 하루에 두 개씩 점심 도시락으로 먹었죠?”
“어, 그래…. 그래도 두 개나 양보했구나.”
“엄마는 일하는 집에서 점심 주니까 나처럼 두 개씩 먹을 필요가 없어서. 그리고 우리 엄마도 내가 맛있는 거 먹는 걸 보는 게 자기가 먹는 것보다 더 좋아해요. 내가 맛있게 먹는 게 제일 효도라고 했어.”
“어흠, 흠.”
감동이 조금 탈색된 재희가 헛기침을 했다. 도을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원래 빵 좋아하긴 했어요. 소보루빵이나 곰보빵, 팥빵 같은 동네 빵 이것저것 하나씩 사서 먹고 리뷰 올리고 있었는데. 진혁이 형네 케이크 처음 먹어보고 나서는 한동안 거기 리뷰만 계속 올렸고…. 다음 해가 되니까 갑자기 키도 크고 근육도 생기고 몸이 좋아져서 나를 따돌리는 애들도 없어지고. 태권도부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엄청 잘한다고 하다가 대회 나가고. 생각해보면 그 치즈 케이크가 내 인생을 잘 풀리게 해준 것 같기도 하고요.”
“진짜 그렇네. 너한텐 정말로 쓰라린 추억이었겠다. 그래도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난 다음부터 좋은 일들만 생겨서 다행이네. 참, 똑같은 밀가루나 달걀로 만든 건데 진혁 쉐프가 만든 건 왜 이렇게 더 특별하게 느껴질까….”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도을이 바로 대답했다.
“그건 간단하죠. 진혁이 형이랑 큰 사장 아저씨가 열심히 만들어서.”
“어?”
“내가 아침에 학교 가려고 일어나면 6시 30분인데, 내가 아침잠이 별로 없어서 5시에 일어나거든요.”
“진짜 일찍 일어나네?”
“그런데 그 시간에 보면, 진혁이 형네 빵집이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안에서 사람이 움직여요. 하루도 쉬는 걸 본 적이 없어. 일요일이나 추석, 설날에도 다 있거든요. 그러니까 빵이 맛있죠.”
“…그렇구나.”
“이런 얘기를 내가 왜 했지. 누나, 이거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요. 난 원래 쿨한 절대자 컨셉으로 나가고 있으니까, 내 이미지 다 박살 나면 어떡해.”
중이병적 발언에 재희가 양손을 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해, 안 해.“
”오케이, 딜.“
도을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재희 역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걸고 약속?“
”꼭 지켜야 돼요. 우리 엄마도 이거 걸고 한 약속은 꼭 지킴.“
재희와 도을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가 풀었다. 시계를 본 도을이 화들짝 놀랐다.
”벌써 시작했겠다! 스트리밍 시작합시다. 누나, 실수하더라도 웬만하면 내가 커버칠테니까 당황하지 마요. 어차피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니까.“
재희가 방긋 웃었다.
”응!“
도을이가 방송 버튼을 눌렀다.
“여러분, 안녕! 파리 제빵 월드컵 실시간 스트리밍 BJ 옥빵상제입니다.”
“특별 게스트 럭키재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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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형 저거 빨간 딸기잼 만드는 거 아무리 봐도 피 같은데….”
“진혁 쉐프님이 만드는 피는 맛있으니까 괜찮아요!”
아름답기 그지없는 초콜릿 앙트르메가 만들어지고, 심사위원들이 미소를 지으며 외국어로 쏼라쏼라하고 이야기하였다.
대회 자체는 열 시간으로 진행되지만, 방송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중간중간 쉬었다. 그러다가 막 쉬는 시간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중계를 시작했는데, 엄청난 사고가 있었다.
“진혁이 형! 거기 불났다고! 당장 도망치라고!”
“쉐프님!”
화면 속의 진혁은 침착하고 능숙하게 초콜릿 짤주머니를 짜고, 스크래퍼로 초콜릿을 평평하게 펴 바르고 있었다.
“이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다행히 불을 낸 멍청한 쉐프 한 명 말고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대회가 재개되었고- 진혁이 초콜릿 작품을 완성하여 제출했다.
마지막 참가자들까지 마저 작품을 제출한 후, 드디어 첫날 점수를 매기는 시간이 다가왔다.
“저기 저 사람들은 제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못 만들어서 탈락했나 봐.”
“독일…팀이네? 안됐네요. 미리미리 좀 만들지. 진혁이 형처럼 빨리 제출할 필요는 없어도 시간은 맞춰야 할 거 아냐.”
미래적이고 신비로운 건물이었다. 고리 세 개에 장미 덩굴이 구불구불하게 얽혀 올라가고 있는데, 꽃이나 잎이 아직 제대로 달려 있지 않다.
“아니, 적당히 대충 하거나 아예 덩굴을 빼 버리지. 저 세 개는 완전히 다 만들고서 아깝네.”
“넌 누가 제일 잘 만든 것 같아?”
“당연히 진혁이 형이죠. 다보탑이 진짜 탑같이 나왔잖아요.”
북소리가 울리며 스피커에서 팡파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트리밍 화면 너머에서 양팔을 벌린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3등을 위한 브론즈 메달을 수여받을 팀을 발표하겠습니다, 미국 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