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1화
알리샤는 카트를 밀고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보탑 위에 앉아 있는 나비들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날개를 팔랑였다. 호랑나비의 검고 노란 얼룩무늬와 개나리처럼 선명한 노랑나비, 그리고 배추흰나비의 희디흰 날개들이 제멋대로 펄럭이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
알리샤가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임진혁 쉐프님, 이 나비 떨어지는 거 아니죠?』
웨이퍼 페이퍼로 만들고 코코아 버터로 색깔을 입힌 날개가 조명을 받아 빛을 반사했다. 진혁이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겁니다.』
안심한 알리샤가 조각품을 카트째 밀면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마리오가 중얼거렸다.
“저게 좀비가 아니라서 정말로 다행이야.”
루이스는 진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렇게 일찍 내도 괜찮겠어? 45분 동안 더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았을지.”
“괜찮아.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했어.”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재미있었어.”
◈ ◈ ◈
알리샤가 자를 가져와서 옆에 세웠다.
『지정 높이인 1.7m로 1.5m 이상, 2m 이하입니다.』
그녀가 수치를 보며 선언했다. 그러자 시몬 리옹이 말했다.
『과연 45분이나 일찍 제출할만한 완성도인지는 다 같이 찬찬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다보탑을 보고 첫인상을 말했다.
『동양적인 신비가 감도는 탑이에요. 각이 뚜렷한 인공물인데도 살아있는 것 같군요.』
『단순히 ‘탑’이라는 건물만 재현한 게 아니에요. 임진혁 쉐프는 우리에게 봄을 가져왔군요.』
안토니오 바트가 주영모에게 물었다.
『한국의 전통 건축물입니까?』
『신라 시대, 불교 사찰의 건물 앞에 세운 탑입니다. 고승의 사리를 안치하기도 하지요.』
주영모는 미리 부탁해두었던 실제 다보탑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스크린에 띄워진 사진을 보고 심사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흰색 퐁당을 씌운 건가? 돌 특유의 차가운 질감을 잘 살렸어요.』
『대리석 같기도 한데, 새 대리석 같지 않게 오래된 느낌을 냈어. 대단한걸.』
『사진과 다른 점이 있어. 돌사자가 네 마리 있는데 사진 속에는 하나뿐이야.』
시몬 리옹이 손가락질했다. 주영모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본래 4개가 있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현대에 유실되어 현재는 1개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임진혁 쉐프는 아직 돌사자가 전부 유실되기 전의 쇼피스를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거들었다.
『돌사자 위에 앉아 있는 검은 고양이는 나비를 잡으려고 펄쩍 뛰는 중이고, 나비는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이 파닥거리고 있어요. 나비가 잡힐 듯 말 듯 한 순간을 포착해서 묘사한 게 아주 아름답네요.』
『지금도 계속해서 날개가 조금씩 팔랑거리고 있어서 더 실감이 나네.』
태국인 심사위원인 우티니안이 말했다.
『태국에도 불교 사찰이 많습니다. 절에서는 자비를 숭상하기 때문에 길고양이들이 오면 먹이를 주죠. 절과 고양이라니 아주 잘 어울립니다.』
『보통 건축물만 만들고 끝인데 거기에 하나 더 해서 뜻밖의 즐거움을 주는군요.』
유난 취가 말했다.
『중국에는 호접몽(胡蝶夢)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장자가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며 꽃을 찾다가 그 위에 앉기도 하며 자연을 즐겼다고 하지요. 잠에서 깬 장자는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고, 내가 나비건 나비가 나건 아무 상관 없다-즉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다다라 깨달음을 얻었소. 그런 이야기입니다.』
◈ ◈ ◈
“그런데 진혁아, 왜 고양이나 나비만 하지 않고 고양이‘와’ 나비를 한 거야?”
진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알고 싶어?”
‘자비니 뭐니 하며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치를 숭상하는 척하는 중놈들의 탑이잖아. 그 탑 앞에 자연 속에서 이미 범람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을 보여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서?’
나비를 찢어발기는 장면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루이스가 극구 말렸다. 한쪽 날개가 찢어진 채로 바닥에 떨어져 파닥거리는 나비는 마리오가 거부했다.
“나 왠지 알아.”
“마리 네가 어떻게 알아?”
“진혁이네 집에서 고양이 키우잖아. 그러니까 그 고양이를 넣고 싶었던 거지.”
마리오가 으스대며 말했다. 진혁이 헛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마리오, 나한테 뭐라고 할 때가 아니야. 이제 한 시간 있으면 오늘 얼음 조각 손질시간도 끝이라고. 네 형을 도와.”
“아, 맞다!”
‘쯧쯧쯧.’
◈ ◈ ◈
『45분이나 먼저 제출하다니!』
『맙소사, 저들이 가져가는 타임 보너스를 생각해 봐. 그것만으로도 20점은 넘게 가져갈 거 아니야. 앙트르메에서도 빨리 가져갔다고.』
이제 막 카테리나 궁 건물 위에 꽃잎을 끼워내던 마렉이 초조해하며 발을 굴렀다.
『아까 사고 낸 놈들…그 화재만 아니었어도 우리도 벌써 완성했을 텐데.』
덩굴줄기와 꽃잎, 꽃받침 그리고 암술과 수술은 전부 만들어져 있으며 끼우고 나서 에어 스프레이로 최종적으로 색깔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된다.
『마렉, 서두를 필요 없어. 우리는 우리 페이스대로 하자고.』
『알았어. 마틸다, 여기 접착용 벨코라데 초콜릿 좀 발라 줄래?』
『비켜 봐. 내가 바를 테니까.』
동요하는 것은 체코 팀만이 아니었다. 아직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부족한 대만 팀 역시 초조해했다.
『장치앙린, 외부면 필름은 전부 다 되어 있어. 붙이기만 하면 돼.』
『삐딱하게 붙이면 안 되니까….』
최신형 스마트폰 화면에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것과 요령은 다르지 않다. 공중에 물을 조금 뿌려 날아다니는 먼지를 잡아 가라앉힌 후, 멸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스크래퍼를 집는다. 필름을 붙일 표면 위에 먼지 하나, 울룩불룩함 하나 없이 깔끔하게 긁어낸 후에 카카오 버터 물감으로 미리 그려놓은 식용 필름을 들어 올린다.
『아흐으으읍.』
장치앙린은 기합 소리를 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심혈을 기울여 붙인 필름은 스크래퍼로 미리 긁어놓은 보람이 있어 애초부터 정육면체의 바깥쪽에 그려진 그림인 양 찰싹 달라붙었다.
『예이!』
『역시 장 대형이야!』
왕웨이와 리우마오유가 손뼉을 마주치며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오늘 데이 1 끝나면 이 앞에서 거하게 한턱낸다.』
부잣집 출신인 리우마오유가 말하는 ‘한턱낸다’는 평범한 페이스트리 쉐프인 왕웨이나 장치앙린과는 돈의 단위가 다르다. 왕웨이가 금방이라도 침을 주르륵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둘째 사형의 은혜에 각골난망이오.』
장치앙린은 한일자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타이페이 트윈즈 타워 ? 높디높은 두 번째 건물의 왼쪽 아래가 좋을까? 아니면 그 옆이 좋을까? 그는 두 번째로 어디에 필름을 붙여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리우마오유가 장치앙린의 옆구리를 찔렀다.
『대형, 어서 마무리하고 머나먼 팔촌을 찾으러 가야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야. 어서 바르고 최종 마무리를 해야 한다.’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리우마오유, 두 번째 필름을 줘.』
『여기 있어, 장 대형!』
독일 팀은 세 번째 고리 위에 타고 올라오는 덩굴을 조형하는 중이었다. 애초부터 녹색을 섞어 만든 모델링 초콜릿이기 때문에 나중에 색깔을 넣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하인리히 윙켈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조명을 받지 못하는 아래쪽에 에어스프레이를 뿌려서 그림자를 주어 양감을 부각시킬 생각이었는데. 그것까지 하기엔 시간이 모자라겠어.’
그가 생각하기에 프랑스의 조제프 쇠비어나 자신이나 실력은 비슷비슷했다.
‘이런 종류의 세계 대회에 출전하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몇몇 풋내기를 빼놓고서는 대개 경력이 비슷하지.’
정말로 경험이 풍부한 이들은 심사위원으로 발탁되니 그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부분은 결국 세심한 디테일이야.’
장미 덩굴의 가시 하나하나까지 미리 찍어내서 붙이고 있다. 가시의 위치가 자연스럽게끔 하나씩 하나씩 손질하는 것을 보며 필즈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인리히, 도움은 필요하지 않아?』
『지금은 괜찮아.』
헬레나 역시 제안했다.
『나도 지금 잠깐은 마무리 도와줄 수 있어. 장미 넝쿨 위쪽에 잎사귀 붙이는 것 정도는.』
하인리히 윙켈은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붙이면 안 돼. 내가 미리 생각해둔 각도대로 붙여야 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필즈너와 헬레나는 서로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한편, 미국 팀은 셋 전부가 전부 여신상에 매달려 있었다. 원래 얼음 조각을 손질하고 있던 토마스까지 도우러 온 것이다.
『여신님이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 광택은 다 넣었다. 어때,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워 보이지?』
『좋아, 그러면 여기 손톱도 매끄럽게 다듬어 줘. 손톱 관리를 하지 않는 여신님같이 보이지 않게 말이지.』
『라져!』
리처드 베이커와 토마스가 힘을 합쳐 상부의 세부적인 디테일을 파고 있는 동안 브라이언 신은 좀 더 전체적인 흐름에 손을 댔다.
『이쪽 옷 주름은 흠집 하나 없어야 하는데.』
짧은 플라스틱 칼날이 소리 없이 지나가자 그리스식 드레스 자락은 새틴 옷감처럼 반들반들해진다. 산화된 구리 특유의 청록색으로 빛나는 색깔만이 아니라 질감 역시 재현하기 위해서 리처드 베이커와 브라이언 신은 오랫동안 고심해왔다.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주변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던 세 사람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깨닫고 리처드 베이커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알리샤가 다보탑이 올라온 카트를 밀어 중앙으로 옮기고, 심사위원들이 한창 평을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벌써 제출한 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처드 베이커가 핼쑥해져서 말했다.
『뭐야, 타임 리미트 얼마나 남았어? 설마 지난 건 아니지?』
토마스가 놀라 입을 벌렸다.
『35분 남았어. 미쳤네, 어디길래 이렇게 빨리 낸 거야?』
브라이언 신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았다. 동공이 저절로 흔들리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실제 돌로 빚어낸 것만 같은 아름다운 석조 탑, 사방을 지키는 돌사자 위에는 검은 고양이가 있다. 새하얀 돌사자와 눈부시게 대비되는 밤처럼 까만 고양이다.
검은 고양이가 금방이라도 도약하려는 듯 입을 벌리고 오른발을 내밀었는데, 그 발끝에는 노란 나비가 잡힌 듯 앉은 듯 사뿐히 자리했다.
고양이 꼬리 끝의 털 한 가닥 한 가닥까지 살아있는 놀라운 세공 솜씨다.
브라이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이네.』
『한국?』
『저 탑. 한국사 수업에서 사진으로 본 적이 있어. 십 원짜리 동전에도 그려져 있고.』
해외 입양아들을 위한 특별 코스였다. 그가 감개무량하게 중얼거렸다.
『고양이 귀엽다.』
반면 곤충을 사랑하는 토마스의 의견은 달랐다.
『나비가 불쌍해,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