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0화
◈ ◈ ◈
『어이, 올해는 어느 팀이 우승할 거라고 생각해? 내기하자. 나는 프랑스에 5달러 걸지.』
프랑스의 제빵 잡지, 파티쉐리의 기자가 말했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표정이 자신만만하다.
『그럼 난 프랑스에 15달러.』
옆에 있던 프랑스 신문 기자가 농담처럼 대답했다. 그들은 서로 손뼉을 마주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국가 출신의 보도 기자들이 킥킥거렸다.
『전혀 내기가 안 되잖아.』
미국에서 파견 온 기자, 리암 에이든이 끼어들었다.
『나는 다른 나라에 걸고 싶은데.』
『역시 미국인의 애국심인가?』
독일 출신의 기자가 끼어들었다.
『나는 프랑스에 50유로.』
『왜? 하인리히 윙켈에게 걸지 않고.』
『애국심이 밥 먹여 주냐? 이길 가능성이 제일 높은 편에 거는 게 당연하지.』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걸고 싶어.』
리암 에이든이 씨익 웃었다.
『진심으로 한국 팀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에이든? 이혼 소송 중이라더니 머리도 돌아버렸어?』
보스턴 언론 대학원 동기인 제이슨은 친한 친구였지만 입이 험하다.
‘이런 놈을 내가 친구라고.’
리암은 제이슨을 무시하고 다른 프랑스인 기자들에게 말했다.
『아까 화재 사고, 봤지? 그때 제일 가까운데도 침착한 모습을 보인 건 한국 팀이라고.』
『초콜릿 작품 점수를 매길 때 집중력 역시 평가 대상이긴 하지.』
『하지만 불이 났는데 그 상황에서 차분하지 못했다고 점수를 깎는 건 인권 침해 아닐까?』
곧 그 이야기는 심사 위원의 판정 기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다른 기자들이 떠드는 걸 들으며 리암은 속으로 덧붙였다.
‘그 팀에서 만든 걸 먹어봤는데 맛있었거든.’
◈ ◈ ◈
하인리히 윙켈의 이마에 송골송골 솟은 식은땀을 팀메이트 필즈너가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거의 끝나가, 하인리히.』
『후우.』
라즈베리와 루바브, 두 가지 맛을 섞어서 만든 케이크에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초콜릿 글레이징을 씌웠다. 그리고 그 위에 세운 탑은 현재 독일에 존재하는 탑이 아니었다.
『22세기에 등장할 탑.』
SF 영화에서 볼 수 있을 것처럼 기묘한 생김새의 탑이 하늘 끝까지 닿을 듯 솟아있다. 세 개의 원형 고리는 어떻게 서로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각도로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다. 위층에는 셋 중 가장 작은 흰 원형 고리가, 그 아래에는 중간 크기의 하늘빛 고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퀘어 케이크에 놓인 남색 고리가 있다. 이 남색 고리는 셋 중 가장 크다. 가운데가 텅 빈 남색 고리의 바깥에는 세밀하게 새겨놓은 작은 창문들이 보인다.
『정말로 아름다워, 하인리히.』
조그마한 창문 안쪽을 들여다보며 필즈너가 감탄했다.
닫혀있는 창문들은 진줏빛 광택으로 빛나고, 열린 창문으로는 헬멧을 쓴 인간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늘색 고리 사이의 빈 공간에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초콜릿 자동차들이 있다. 필즈너는 킥킥거리며 자동차들을 하나씩 구분했다.
『공중부양 페라리에 람보르기니라. 나도 한 대 갖고 싶다.』
이 자동차들은 투명한 실에 매달려있기 때문에 허공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자동차 중 몇 대는 하늘색 고리 주변을 감싸고 허공에 떠 있으며, 몇 대는 그 안의 빈 창문-즉 차고들로 들어가고 있다. 이 놀라운 마천루는 하인리히 윙켈이 스스로 디자인한 미래적 건축물로, 현실의 독일에는 존재하지 않는 건물이다.
하지만 필즈너는 주거 지역인 첫 번째 고리와 주차장인 두 번째 고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세 번째 고리라고 생각했다.
『하인리히, 어째서 정원을 3층으로 옮겼어? 원래 1층이었잖아.』
『덩굴 식물이 건물을 타고 하늘을 올라갈 거니까. 1층부터 올라가면 지저분해 보이잖아.』
세 번째 고리의 공중 정원은 희디흰 고리. 이 고리는 속을 채우지 않고 비웠으며 표범 무늬처럼 커다란 얼룩 모양으로 열려 있는 구멍이 특징적이다. 그 구멍에서는 수많은 줄기가 뻗어 나와 건물을 타고 오르며 천장을 향해 꽃을 피워냈다. 하트 모양 잎사귀가 풍성하게 자란 나팔꽃 줄기에는 갓 여문 봉오리와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 그리고 활짝 핀 보랏빛과 분홍색, 하얀 나팔꽃들이 가득하다. 검지만 한 자동차나 깨알처럼 작은 인간에 비해서 나팔꽃은 놀랄 만큼 거대했다. 람보르기니 세 대가 와도 나팔꽃 한 송이에 그대로 덮여 버릴 것이다.
『하인리히! 여기 이슬 있어.』
필즈너가 방금 만든 슈가 시럽을 내밀었다. 하인리히는 그 시럽을 받아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저쪽에서 얼음 조각에 매달려 있던 헬레나가 물었다.
『윙켈. 이제 그것만 하면 끝이잖아. 뭘 망설이고 있는 거야?』
『…나팔꽃을 완벽하게 돋보이게 해줄 만한 위치를 찾고 있어.』
그는 꼭지 부분은 희지만, 끄트머리로 가면서 점차 보랏빛으로 진해지는 나팔꽃 송이를 하나 골랐다. 하인리히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아까처럼 추태를 보일 수는 없으니까.』
그는 예정이 바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하인리히에게 아까처럼 느닷없이 대회 중단에 하던 일이 중단되고, 밑 작업을 해두었던 탑 아랫부분이 전부 무너져 버린 것은 크나큰 재앙이었다.
이곳이 세계 대회의 현장이 아니라 제과 수업의 현장이었다면 그는 그대로 수업을 중단하고 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
불쾌하고 기분이 나쁘며 괴롭다.
일정이 흐트러진 압박감에 숨을 몰아쉬며 하인리히가 슈가 시럽을 한 방울씩 짜서 얹었다.
-톡, 톡, 톡.
『와, 진짜 성격 봐라.』
필즈너가 입을 벌렸다. 멀리서 보던 헬레나 역시 잠시 얼음을 다듬던 손을 멈추고 킥킥 웃었다.
『하인리히, 그놈의 완벽주의가 언젠가 네 발목을 잡을 거야.』
보통 이런 종류의 시럽을 뿌리는 작업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흩뿌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달랐다. 그는 미리 계산해둔 위치에 정확한 한 방울이 떨어지기를 원했다.
『좋아. 잘 됐어.』
이슬방울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슈가 시럽이 방울방울, 그가 원하던 위치에 자리 잡았다.
활짝 핀 나팔꽃들은 이슬방울이 올라가자 더 돋보여, 생화처럼 생동감 있게 매력을 자랑했다.
『이번에는 프랑스를 이길 수 있도록.』
하인리히가 주문처럼 중얼거리자 필즈너가 손뼉을 쳤다.
『말 잘했다, 하인리히. 타도 프랑스!』
『이상한 승부욕 보이지 말고 완성에만 집중해.』
헬레나가 투덜거렸다.
그런 헬레나를 바라보며 바로 옆의 미국 팀 페이스트리 쉐프인 토마스가 농담을 던졌다. 그 역시 얼음을 조각하는 중이었다.
『이번에 윙켈 쉐프는 꽤 과감한 도전을 하는데. 오늘 대회 끝나고 가볍게 술 한 잔 어때요?』
『미국 남자에게는 관심 없어.』
한칼에 잘라 거절당했지만, 토마스는 다시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옆에서 브라이언 신이 제지했다.
『다른 팀 방해는 실격이야, 토마스.』
『쳇.』
헬레나가 브라이언 신에게 윙크했다.
『고마워요, 신 쉐프.』
『뭐야? 왜 브라이언은 괜찮고 난 안되는 건데?!』
토마스가 불평하는 사이에 헬레나는 미국 팀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흘깃 살펴보았다.
『푸와하하하학!』
부스와 부스를 가르는 합판의 높이는 약 1.5m.
미국 팀이 만들고 있는 거대한 초콜릿 전신상의 머리와 횃불을 들어 올리며 추켜올린 오른손이 한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자, 자유의 여신상….』
미국 문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헬레나도 웃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왼손에는 책을 든 자유의 여신은 본디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지금 브라이언과 리처드 베이커가 손질하고 있는 여신은 표정과 자세부터 달랐다.
토마스가 킥킥대며 대답했다.
『미소짓는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레이디.』
오른손으로 들어 올린 횃불은 횃불이 아니라 횃불 모양의 아이스크림콘이다. 들고 있는 책은 법전이 아니라 하드커버 레시피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은 으레 봐오던 가시 돋친 관이 아니라 쉐프의 조리모다.
웃겨서 킥킥거리고 있는 헬레나를 본 하인리히가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팀메이트를 쏘아보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필즈너가 헬레나의 등을 찔렀다.
『헬레나! 다른 팀 작품에 신경 쓰지 말고 얼음 조각에 집중하자.』
『미안, 미안.』
그녀는 바로 자신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 ◈ ◈
완성되어 가는 미국 팀의 초콜릿 작품을 보면서 심사위원들 역시 크게 웃었다.
『유머스러운 점이 마음에 들어. 저건 역시 리처드 베이커 쉐프의 아이디어겠지.』
『자유의 여신이라기보다 쉐프의 여신이 아닐까 싶은데.』
『하지만 저 얼굴은 자유의 여신상하고 완전히 똑같아. 비율과 의상도. 그러니까 이 상이 웃긴 거지.』
실제 뉴욕, 맨해튼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구리로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아름다운 황동색이었으나 공기 중에 노출되어 산화된 덕분에 청록색으로 변색되었다. 브라이언은 원래 색깔인 구리색이 어떨지 의견을 제시했으나, 리처드는 청록색을 밀었다.
『평범한 미합중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자유의 여신상은 청록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토마스 웨인 역시 리처드 베이커의 의견에 동의했다.
『포즈를 바꾸니까 색깔과 얼굴 같은 건 최대한 똑같이 가자고.』
◈ ◈ ◈
4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마이크를 들고서 미소를 지으며 미국 팀 앞을 지났다.
『긴장되고 초조한 상황에서도 보는 이들을 웃을 수 있게 하는 점이 대단합니다. 이들의 유머 센스에 다들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바트가 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아직 45분 남았습니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고 있군요.』
-삐---이익
예상치 못한 벨소리가 울렸다.
대회 참가자 중 한 명이 심사를 요청하는 벨을 누른 것이다.
『이렇게 일찍?! 어디야?』
『한국이군요.』
알리샤가 벨 소리가 울린 2번 부스 쪽으로 향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들으며 임진혁이 앞으로 나섰다.
『2번 부스, 대한민국. 초콜릿 쇼피스(Chocolate Show-piece) 과제 제출하겠습니다.』
굳은 표정의 마리오와 루이스 역시도 그 뒤에 서 있었다.
『이런, 전대미문의 일이군요. 이전 대회에서 누군가 45분이라는 시간을 남겨두고 초콜릿 쇼피스를 제출한 적이 있었나요?』
『아니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초콜릿 작품 부문에서는 보통 시간을 꽉 채워서 동시에 심사를 받죠.』
심사위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앙트르메에는 타임 보너스가 있지만, 초콜릿 쇼피스에서 타임 보너스를 받았던 이들은 아무도 없어.』
『1분 1초가 소중한 시간에 저렇게 일찍 심사를 받겠다고 하다니, 차라리 완성도를 높이는 편이 좋을 텐데 말이지.』
『만용이야.』
심사위원들은 아직 진혁의 작품을 보지 못했다. 2번 부스는 무대의 왼쪽 끝에 치우쳐져 있어, 일부러 걸어오지 않으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임진혁의 작품을 본 알리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군요. 아주 아름다워요.』
그녀는 바퀴 달린 수레에 얹혀 있는 쇼피스를 흘깃흘깃 보면서 말했다.
『이 쇼피스를 무대 중앙으로 옮기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알리샤 쉐프님.』
안토니오 바트가 외쳤다.
『자! 첫 번째 초콜릿 쇼피스의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