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9화
“지금 이대로라면 너무 예상하기 쉽잖아,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건 아니야, 정말로 아니다. 아니라고.”
진혁이 하는 말을 들은 마리오가 중얼거리면서 반대 의사를 표현했다. 루이스는 한 마디로 잘라서 말했다.
“테마는 ‘전통적인 건축물’이라고. 도대체 거기에 갑자기… 아니, 지금 와서 왜 좀비야?!”
“인공물에 더해진 자연물, 누구나 거기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먹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좋지. 좋은 전시물이 될 거야.”
마리오가 따지고 들었다.
“좀비를 봤을 때 연상되는 감정은 절망과 좌절, 공포밖에 없다고. 대한민국 아포칼립스를 떠올린 심사위원들이 어떤 점수를 매길지는 상상이 안 되냐?”
루이스가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진혁이 너. 다른 것들도 많은데 하필 좀비를 떠올린 이유가 뭐야?”
“원래 탑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소원을 빌잖아. 우리 민족의 전통 탑돌이, 알지?”
“우리나라에 그런 옛날이야기가 있었나….”
어린 시절에 프랑스에 이민을 간 강 씨 형제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루이스는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으나 마리오는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진혁이 그 모습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좀비로 변하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야. 탑이 자신을 변치 않게 해줄 거라고 믿고 찾아온 거지. 인간으로 죽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면서 탑을 빙글빙글 돌다가 그대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거라고.”
루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순간까지 단 하나의 염원을 위해서 달려온 인간이라.”
“좋지? 그리고 좀비가 된 후에도 탑 주변을 계속해서 도는 거야. 밑에 링을 설치해서 돌리면 돼.”
“좀비가 생전 하던 일을 반복해서 한다고?”
“비슷해.”
진혁은 대충 얼버무려 넘겼다.
한국 설화에 따르면 자살하여 저승에 가지 못한 액귀(厄鬼,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귀신)나 지박령 같은 귀신은 죽기 전에 했던 행동을 반복한다. 반면 좀비는 사망 직전 했던 일을 계속하기보다는 먹을 것, 즉 살아있는 인간을 쫓아다니느라 바쁘다.
‘나도 진희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테지만, 역시 이들도 모르는군. 반복행동은 좀비가 아니라 귀신이 하는 일이라는 거.’
예전에 진혁은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백설 공주 이야기를 생각해내지 못했고, 결국 엉뚱한 과제를 제출했다.
이번 대회 출전 전에 진희는 그런 경우가 다시 있으면 안 된다며 스스로 조사한 자료를 가득 가져왔다. 안데르센 이야기나 그림 형제 동화를 비롯한 서양의 옛날이야기나 한국의 옛이야기 따위였다.
“테마별 디저트에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몇 년 전에는 쿠프 드 몽드 대회의 주제 면에서 인어공주 이야기를 테마로 내놓기도 했고.”
…라는 주장이었다.
한국의 다양한 귀신 이야기를 다루면서부터 진혁 역시 재미를 느껴 꽤 들이 팠다.
‘하지만 강 씨 형제는 그런 설화는 잘 모르는 것 같군.’
루이스가 떨어진 정을 주워들며 말했다.
“목적을 잃었지만, 수단만 남은 상황의 아이러니를 절묘하게 표현하는군.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지도 생각해볼 수 있겠어. 철학적이고 예술적인데? 그 이야기 자체는 조금 괜찮은 것 같기도 해.”
루이스가 호응하자 진혁이 밝은 미소를 보였다.
“그렇지?”
“뭐?”
마리오는 순간적으로 초콜릿 판을 우그러뜨릴 뻔했다. 오른손에서 힘을 빼고 진혁이 쓸 초콜릿 판자를 차곡차곡 구분용 PVC 필름 위에 쌓으며 그가 따졌다.
“루이스 형. 미쳤어?!”
“진혁이 네 의견에 일리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좀비는 곤란해.”
“….”
“우리 작품의 장르가 바뀐다고. 다보탑이 좀비의 배경이 되어버릴 거야. 탑을 죽이는 게 아니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자연물을 생각해 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렇다면 이건 어때?”
그가 보여준 스케치를 본 마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정말로 괜찮은데. 이대로만 되면 아주 아름답겠다. 아주 좋은데?”
루이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마리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보다 훨씬 낫다.”
결국 루이스와 마리오는 진혁이 새로운 자연계 조형물을 추가하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일로 돌아갔다. 임진혁은 흐뭇해하며 새로 작업에 착수했다.
‘좋아, 생각한 대로 됐다.’
다보탑 하나만 만드는 것도 힘들다며 새로운 자연물을 추가하는 것을 열렬히 반대하던 강 씨 형제다.
‘좀비를 추가해도 좋지만, 이것도 좋으니까.’
진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 ◈ ◈
『프랑스 팀의 주느비에브는 원래 미술을 전공하던 조각가였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솜씨가 뛰어나군요.』
『뭐, 그렇죠.』
시몬 리옹은 자신의 제자가 칭찬받자 어깨를 으쓱했다. 알버트 그림슨이 웃으며 독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당신에게 배우면서 그다지 많이 배우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프랑스식 고딕 건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지고 있으니 말이죠.』
시몬이 쏘아붙였다.
『완성되고 난 후에 평해주길 바라네, 그림슨 쉐프.』
『하지만 우리들은 이 과정도 지켜봐야 하니까요.』
유난 취가 끼어들었다.
『하인리히 윙켈은 목수 집안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페이스트리 쉐프는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필요로 하니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페이스트리 쉐프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탈리아계 쉐프인 안토니오 바트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저도 방금 알았어요. 우리에게 그렇게 유능하고 매혹적인 선배가 있는지 몰랐네요.』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웃으며 대답했다.
『양아버지가 페이스트리 쉐프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마지팬과 설탕 공예용 재료들을 장난감처럼 만지고 놀며 자라났다고 합니다. 열일곱 살이 되어 화가의 공방에서 3년간 경력을 쌓은 후에는 식당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기도 했고요.』
이전에 레시피 책을 쓰느라 다양한 일화를 조사했던 주영모가 말했다.
『그 이야기는 저도 들어본 것 같습니다. 식중독 사고 말이죠?』
『주영모 쉐프는 아시는군요.』
『예. 불행한 식중독 사고로 상사들이 전부 죽어버려서 주방 보조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느닷없이 헤드 쉐프를 맡게 되었던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예. 그리고 술집에 직접 개발한 아름답고 섬세한 요리들을 내놓았다가 매출이 떨어져 해고당했죠. 사람들이 원하는 건 예쁘게 장식된 세련된 요리가 아니라 싸고 양이 많아 술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안줏거리들이었으니까요.』
『하하하.』
『펍에 어울리는 음식과 연회장에 어울리는 음식은 다르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레오나르도는 20대 때 연회 준비를 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외국에서 온 공주님의 로얄 웨딩을 위해 당시 전무후무했던 아이디어를 냈어요. 백여 명의 사람들이 앉을 식탁과 의자를 케이크와 크림, 설탕공예로 만드는 거였죠. 비단 식탁과 의자만이 아니라 그 위에 올라가는 모든 것, 즉 은촛대부터 은 포크와 나이프, 냅킨과 꽃바구니까지 전부 다 먹을 수 있는 거로 만든다는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와! 대단한데요. 설탕이 고가의 물품이던 때로 기억하는데.』
『성공했더라면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대연회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안토니오 바트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엉망진창으로 대실패를 했죠.』
주영모는 과거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었다.
『예, 안토니오 바트 쉐프님은 아시는군요. 수백 마리의 쥐 떼들이 달려들어 식탁과 의자를 습격했기 때문에 연회 준비는 엉망이 되어버렸고, 결국 결혼식 자체를 미루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하.』
라이언 윈체스터가 끼어들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이야기보다 그가 남긴 다른 메모를 더 좋아합니다만.』
알버트 그림슨이 궁금해했다.
『아, 그건 저도 알 것 같습니다. 그거죠?』
『사실 이건 다빈치의 문제라기보다 마지팬이라는 재료 자체의 문제죠. 마지팬은 너무 맛있으니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이 정성 들여 조각한 마지팬 조각품을 후원자와 그 식구들이 먹어치워 버린 걸 보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트에 ‘이제는 맛없는 재료를 찾아서 그 재료로 조각을 해야겠다.’라고 일기를 썼죠.』
『아! 그 이야기, 저도 제과사 수업 시간에 들었던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주영모 쉐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꽤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는 다재다능한 발명가이자 조각가이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페이스트리 쉐프가 아직 전문직이 아니던 시절에, 깊이를 더해준 선배이기도 하죠.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이야기를 들으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더 좋아졌는걸요.』
『그렇게 재능있는 인물도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질렀군요.』
유난 취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페이창 같은 인물도 한 번쯤은 용서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토니오 바트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먼저 차갑게 잘랐다.
『미안하지만 취 쉐프,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페이창이 대회 출전 금지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메이링이나 구난시는 오히려 피해자입니다. 다른 팀원들은 내년 대회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실 수 없을까요?』
심사위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까 CCTV 영상을 보면 구난시는 그냥 계속해서 자기 얼음 조각에 집중하고 있긴 하지, 마지막에 말리려고 한 것 같긴 해.』
『메이링은 상대를 진정시키려고 대화를 하다가 자기가 화를 냈죠.』
안토니오 바트가 말했다.
『알리샤, 혹시 오늘의 화재에 대한 보도자료가 이미 전부 나갔습니까?』
『사상자 0명, 부상자 1명이라는 정보만 나갔어요, 쉐프.』
『조금 더 의논해 보아도 좋을 것 같군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주영모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야기를 처음에 꺼낸 자는 안토니오 바트 쉐프다.
‘구난시와 메이링은 봐주고 싶은 거군.’
◈ ◈ ◈
무대 위에서 잠시 있었던 소규모 화재는 아까 진화되었다. 초콜릿 작품을 조각하는 제과 경연이 다시 시작된 지도 시간이 한참 지났다.
리암 에이든은 아직도 아까 그 순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진짜야.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을 중시하는 진정한 사내다.’
그는 뉴욕 신문사의 기자다. 새끼 기자 때는 요리 면을 맡기도 했지만, 지금은 사회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베테랑이다. 르완다나 시리아, 북한 등 위험한 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취재를 해왔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순간, 기자 리암 에이든은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임진혁 쉐프는 혼자서 자신만의 전쟁을 하고 있었어.’
통상적으로는 불꽃 때문에 동요하는 중국인 쉐프에게 더 시선이 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불꽃의 위험보다도, 생명의 위기보다도 날카로운 집중력.』
그는 시리아 내전에서 전우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병사를 보았다. 기껏해야 열서너 살도 안 되어 보이던 병사는 전우를 구하기 위해 대인 지뢰가 깔린 곳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발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은 간과하고서 오직 하나만을 보고서 달려간다.
오로지 한 가지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때 임진혁은 분명히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리암 에이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표현은 별로야.’
『놀라운 집중력.』
리암 에이든의 손가락이 키보드의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렸다.
‘단순히 맛있는 당과류를 만드는 동양계 페이스트리 쉐프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집중력까지 겸비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