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6화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렌즈 너머로 대회를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맨도, 관객석의 관객들도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옆에서 진행되는 아침드라마를 관람하던, 바로 옆 부스에 있는 임진혁이었다.
‘화상을 입겠어. 멍청한 놈, 자업자득이군.’
그는 저런 어리석은 녀석을 위해서 움직일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무대 뒤쪽에는 소화기도 준비되어 있으니 다른 이들이 알아서 행동할 것이다. 적당히 놀란 척하면서 옆으로 비켜 주려고 했다. 어떤 음색으로 비명을 지르면 좋을지 고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불꽃이 뿜어내는 열기가 슬슬 이쪽에도 느껴지기 시작하자 진혁은 마음을 바꾸었다.
‘기껏 만들고 있는 초콜릿 벽돌이 녹으면 곤란하지.’
빙결은령진(氷結銀嶺陣)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단전에서 흐르는 진기를 손끝을 통해 체외로 배출하며, 동시에 온도를 임의로 낮춘다.
‘북해빙궁(北海氷宮)의 한음장(寒陰掌)은 열 가닥의 진기가 휘몰아치며 몸속의 체액을 전부 얼려 버리는 악독한 장법이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한 가닥의 진기를 뽑아내 보내기에는 가장 적절한 장법이다.
‘불붙은 멍청이 놈이 극한의 한기에 얼어버리면 지나치게 괴상한 장면이 될 테니까 아주 조금만.’
바람 없는 실내에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나마 뺨에 흐르는 차가운 바람을 느낀 페이창은,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돌아왔다. 그는 떨리는 양손을 뻗었다. 불길이 옮겨붙은 앞치마를 그대로 벗어 내던지고, 발로 쾅쾅 밟았다.
「히이이익!」
그 과정에서 양 손가락 역시 화염에 노출되었으나 뜨거운 줄도 몰랐다. 굳은 것처럼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뒤늦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소화기!』
스태프들이 소화기를 가지고 달려왔다. 알리샤가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응급반! 응급반 어디야!』
관객석에 있던 이들은 흥분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안토니오 바트가 다급하게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잠시 대회를 중단합니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마이크를 무기처럼 꼭 잡고서 외쳤다. 아직까지 집중해서 만들고 있는 쉐프들을 향해서.
『출연자 여러분! 무대 아래로 대피하십시오!』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고 있던 페이스트리 쉐프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임시 휴식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시몬 리옹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까지 하고 멈추는 게 좋지 않을까?』
그는 무대 위에서 손을 놓고 서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을 바라보았다. 알버트 그림슨이 통통한 몸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3시간 이상 대회를 진행했어. 다들 이미 초콜릿 조각과 얼음 조각을 만들고 있는데. 지금 와서 대회를 연기할 수는 없지.』
알버트 그림슨에게 오베르슈타인이 반박했다.
『전원이 조각을 다시 얼렸다가 내일 같은 시간에 해동하면 공평해지지. 그러니 중단하고 혼란을 수습하자고.』
『이미 템퍼링이 끝나서 조각 중인 얼음을 다시 얼리면 다시 녹일 때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자네가 아무리 얼음 조각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러고도 르 꼬르동 블루의 마스터 쉐프라고 할 수 있나?』
알버트가 따지고 들었다. 심사위원들이 티격태격하자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말했다.
『심사 위원 여러분께서 의견을 통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몬 리옹이 쯧쯧, 혀를 찼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무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 수도 있으니 전부 멈추고 점검을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지. 쿠프 드 몽드라는 대회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의 올림픽과도 같아.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시설 문제로 부상을 입는다면 곤란하다고.』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잠깐, 그보다 나는 아직 이 사고 자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전체적인 영상을 보고 싶은데요.』
엘리자베스가 수긍하며 말했다.
『무대 풀샷으로 좀 부탁드려요.』
안토니오가 대답했다.
『지금 이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 그리고 그 사고 때문에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얼마나 영향을 받을지를 파악하고 나서 결정하는 것이 낫겠어.』
프로듀서가 전체 화면을 띄워주며 영상을 되감았다.
『5분 전으로 부탁드려요.』
처음에는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번 부스에서 중국어로 말싸움하는 소리가 들렸다.
「……!」
「……!!」
분노를 이기지 못한 페이창이 종이 리본을 쥔 채 주먹을 흔들었다. 하늘에 솟아오른 종이 리본은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며 불꽃을 만나 활활 타올랐다. 페이창은 한순간 멍하게 있다가 앞치마를 벗어던졌고, 관객석에서 비명이 올라왔다.
3번, 일본 부스에 있던 이들이 작업하던 손을 멈추고 중국 부스를 흘깃거린다. 그들만이 아니라, 무대의 끝쪽에 있는 다른 대회 참가자들 모두 이쪽의 사고에 관심을 보였다.
『대단한 집중력인데?』
하지만 2번 부스는 그렇지 않았다. 임진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초콜릿 판을 만들었다. 마리오는 역시 귀 쫑긋하는 일도 없이 모델링 초콜릿으로 덩어리를 만들어 양감을 부여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것은 거대한 3D 곰 인형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그 옆에 있는 루이스 역시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얼음 조각을 깎아내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 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외과 수술을 하는 군의관 같은 집중력이군.’
주영모는 세 사람의 모습에 저절로 눈을 빼앗겼다. 이번에 출전한 대한민국 팀의 세 사람은 특별했다. 웅성거리면서 작업하던 것을 놓거나, 아니면 떨어뜨리거나, 망치거나 하는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과는 태도부터 다르다.
『엄청난 집중력이군요.』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감탄하며 말했다.
세상에 자신의 작품과 자신밖에 없다는 듯이 집중해서 일하고 있는 젊은 쉐프의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다.
『저 집중력만큼 실력도 좋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시몬 리옹이 이죽거렸다.
『좋은 쉐프라면 주변 상황 정도는 파악해야 할 텐데 말이야. 저러다가 주방에 불이 나도 모르고 요리만 하다가 타죽겠어, 아주.』
『말이 너무 심합니다, 시몬.』
『예이 예이, 조심하면 되잖아, 조심하면.』
『어쨌거나 우리가 지금 이야기 나눠야 하는 건 한국 팀의 놀라운 집중력이 아니에요.』
영상을 보며 상황을 파악한 심사위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맞아, 그런 무능력하고 충동적인 녀석 때문에 쿠프 드 몽드 대회가 시궁창에 빠지게 생겼다고…!!』
시몬 리옹은 프랑스어로 욕설을 내뱉으며 페이창을 욕했다. 오베르슈타인이 말했다.
『주방에서 감정 조절을 못 하다니, 바로 실격이야.』
『용케 국가대표로 뽑혀와서 여기까지 왔군.』
『저런 놈은 페이스트리 쉐프의 자격이 없다고.』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불쾌해하였다. 알버트가 하는 말에는 족족 딴지를 걸던 시몬마저 동의할 정도였다.
『모두 영상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화재 원인은 시설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재(人災)로 보이는군요.』
안토니오 바트가 선언했다.
『신성한 주방에서 벌인 감정적인 행동. 이는 규칙 제6조에 어긋나는 사항입니다. 이에 따라서 중국 팀은 실격으로 처리한다. 모두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시몬 리옹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향후 3년간 출전 정지.』
심사위원 중 한 명이 화를 냈다. 말레이시아인인 스테피였다.
『페이창 쉐프가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 하지만 고의로 한 실수가 아닌데 너무하지 않은가. 그리고 다른 두 명의 팀원들은 무슨 죄야?』
『기본적으로 제빵이란 원래 팀원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해야 하는 건데, 중국 팀은 협동 자체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3년은 너무 심하다고. 양손에 2도 화상이면 당분간 칼도 못 잡을 텐데 말이지.』
『부상과 잘못은 상관없죠.』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 역시 대회를 망쳐 버린 페이창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안토니오가 물었다.
『그렇다면 2년은 어떻습니까?』
심사위원들이 뜻을 좁혀가며 의논했다. 그러던 중 알리샤가 하이힐을 신은 채 달려왔다.
『안토니오 쉐프! 엘리자베스 쉐프!』
그녀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페이창 쉐프는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양손에 2도 화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는군요.』
『대회에서는 탈락이지만 말이지.』
시몬이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아까 안토니오 바트 쉐프가 말씀하신 대로, 무대와 시설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1시간 휴식을 주는 것이 적당할 것 같군요.』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말하자 안토니오 바트가 물었다.
『지금 30분이 지났지. 앞으로 30분의 시간 동안 정리하자는 이야기지?』
『예. 다시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요. 1번 부스의 화구는 앞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됩니다.』
주영모가 따졌다.
『이대로 중단없이 계속한다면… 화재 바로 옆에 있었던 2번과 3번 부스는 지나치게 불리하지 않습니까?』
얇은 합판을 통과한 열기가 얼음 조각과 초콜릿 조각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고 그가 열변을 토하자 시몬 리옹이 차갑게 말했다.
『2번 부스가 남한이었지. 자기 나라를 대변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주영모 쉐프. 당신은 지금 국가대표로 나와 있는 게 아니야. 모두에게 공정한 심사위원으로서 여기에 있는 거라고. 그러니 심사위원의 역할을 다 해.』
‘젠장…! 임진혁, 루이스, 마리오. 미안하군.’
주영모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 ◈ ◈
대회 참가자 대기실.
각 나라의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모여 있는 곳은 심사위원들의 회의장 못지않게 시끌벅적했다.
부스별 페이스트리 키친은 관객들과 심사 위원들이 잘 볼 수 있게 일자형으로 죽 뻗어 있는 탓에, 이들은 현재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잘 몰랐다.
『어디서 불이 났다는 거야?』
『중국 팀인가 봐, 아까 중국 대표가 실려 가는 걸 봤어.』
『누가 크게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반면 사건이 아니라 작업을 걱정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중간에 제빵 작업을 중단하게 된 이들이 초조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하다 만 반죽을 그대로 놓고 나온 기분이야.』
가십보다 자신의 작업에 더 관심이 많은, 리처드 베이커가 투덜거렸다. 브라이언 신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 하반신 모델링 반죽을 붙이던 중이었으니까, 하다 만 반죽을 놓고 나온 게 맞지.』
뒤늦게 대기실로 걸어들어오는 진혁을 보고 리처드가 반갑게 말했다.
『임진혁! 잘 하고 있나?』
『물론.』
『중국 쪽에 일이 벌어진 것 같던데, 바로 옆 부스잖아. 괜찮아?』
리처드 베이커가 진심 어린 걱정이 담긴 눈으로 진혁의 어깨를 잡았다. 브라이언 역시 일어나 말했다.
『진혁 쉐프.』
『물론, 우리는 셋 다 멀쩡해.』
진혁의 뒤에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강 씨 형제가 따라 들어왔다.
『루이스, 마리오. 오랜만.』
마리오는 형에게 막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아니, 형. 진짜야. 옆에서 무슨 불이 났다는데 전혀 몰랐거든. 내 집중력이 신의 경지에 올랐나 봐. 형은 알았어?”
“나도 몰랐는데? 엄청 작은 불이었나 봐. 큰 불이었으면 내 얼음도 다 녹아버렸겠지.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완전히 멀쩡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