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5화
다보탑은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신라 시대 혜공왕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사방에 계단이 있는 방형(方形) 평면을 아래로 두고 네 개의 석주가 사각 천장을 받친다. 방형 즉 ‘네모’ 모양은 땅을, 그리고 사각에서 발달해 팔각이 된 ‘팔각형’은 인간, 상륜부의 ‘원형’은 하늘을 뜻한다. 이는 불교 경전을 그대로 건축으로 승화한 불교미술의 걸작이라 불린다.
하지만 진혁이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그런 미학적인 아름다움이나, 한국의 전통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모양이 익숙하니까.’
10원짜리에 나와 있는 탑이기 때문에 어떤 모양인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어서, 구상하기가 쉬웠다. 동전에 나와 있는 만큼 유명하기 때문에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알기 쉬울 것이란 계산 역시 있었다.
‘그냥 다보탑과 석가탑을 나란히 세우는 게 좋았을까.’
하지만 하나만 만들기도 어려운 탑을 두 개나 하고 싶다고 하자 강 씨 형제 두 사람이 격렬하게 말렸다. 그래서 결국 다보탑에 집중하기로 했다. 대신 루이스가 이야기했던 1.5m 대신 진혁이 원하는 만큼 탑의 전체적인 높이를 높여 크기를 키웠다.
“여기, 계단 벽돌.”
마리오가 하나씩 초콜릿 벽돌을 건네주었다. 벽돌을 받아든 진혁은 레고 블럭을 끼워 맞추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토대를 쌓아나갔다.
“기둥이나 계단별로 만드는 게 아니고 벽돌을 만들어서 쌓는다고 할 때 솔직히 믿기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잘 되네, 이거.”
진혁을 바라보며 마리오가 중얼거렸다.
지금 만드는 탑은 높이가 1.7m에 달한다. 그래서 진혁은 위쪽에 올라갈 초콜릿 조각들은 아예 짜 맞출 수 있는 얇은 판들을 만들어 붙여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위쪽에 가해지는 무게를 부담해야 하는 아래쪽 기단은 이야기가 다르다. 아직 얼음 바깥쪽을 긁어내고 있던 루이스가 말했다.
“임진혁. 네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 나나 마리오한테 부탁할 게 있으면 말해 줘.”
“그래, 임진혁. 돌사자까지 일일이 다 만들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마리오가 형의 말에 동의하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사각 판을 얇게 떠내기 위해 초콜릿 반죽을 부어놓은 진혁이 잠시 고개를 들어 마리오를 바라보았다.
‘특별히 모자랄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여유 있는 편인데.’
그가 말을 꺼냈다.
“모든 일을 꼭 내가 해야 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진혁과 마리오는 둘 다 손을 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 초콜릿을 붓고 굳혀내 커터로 잘라냈다. 진혁이 만든 얄팍한 판은 두께와 넓이가 일정했으나 마리오가 만든 것은 울퉁불퉁해 위쪽을 다시 다듬어야 한다.
‘저 녀석, 확실히 루이스보다 느리긴 해.’
진혁이 판 세 개를 만드는 동안 그는 한 개를 겨우 만들어냈다. 루이스였다면 두 개는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얼음을 다듬어야 하니 이쪽을 도와줄 수는 없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완벽하게 맞물려야 하는 판자와 벽돌보다 다른 걸 맡기는 쪽이 낫겠군.’
차라리 틀을 미리 만들어 초콜릿 판을 찍어내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진혁은 마리오에게 다른 일을 주어보기로 했다.
“돌사자 하나는 네가 직접 만들어 줘, 마리오.”
“뭐, 뭐라고…!?”
진혁은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래서 좀처럼 자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진혁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을 들은 마리오가 눈을 빛냈다.
“…임진혁 네가 내 실력을 믿고 이렇게까지 부탁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내가 제대로 한 번, 초콜릿 모델링으로 만들어 볼 테니까 맡겨두라고.”
마리오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팀으로 출전했는데 진혁이 어려운 것을 혼자 다 하려고 해서 난감해하고 있었던 차에 듣기 좋은 말이었다.
실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유쾌해진 그는 갑자기 의기가 충천하여 장갑을 바꾸어 끼었다. 돌 사자를 만들만한 중심이 될 기둥부터 설치하려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진혁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연습할 때 다 같이 돌사자 모델링을 만들어 보았으니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이 모델링 초콜릿 반죽을 넘기며 말했다.
“그럼 두 마리, 부탁해.”
“잠깐?! 왜 두 마리가 필요해?”
“원래 네 마리잖아. 유실돼서 한 마리만 남아있는 거고.”
“어….”
마리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나라 잃은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길 잃은 개 같은 얼굴을 보며 진혁이 덧붙였다.
“두 마리는 내가 만들 거야. 탑 본체를 세우는 게 끝나면 나도 도와줄게.”
“아, 알았어! 해볼게”
◈ ◈ ◈
미국 부스 역시 분주했다.
새끼줄을 감은 1.65m의 기둥은 양다리로 나뉘었다가 위에서는 하나로 합쳐져 있는 모양이었다. 심 겉에는 랩을 씌웠고, 그 랩 위에는 초콜릿을 부어 끈적끈적하게 만들었다. 두 발이 될 아랫기둥은 이미 초콜릿으로 만든 발가락과 발등으로 덮여 있다.
럭비 선수처럼 덩치가 큰 붉은 머리의 백인이 오른쪽 발등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발목에 초콜릿 덩어리를 붙였다.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양팔에는 무게가 느껴진다.
『하나, 둘, 셋.』
열기가 치밀어 오르는 주방에서 브라이언이 틀에 천천히 초콜릿을 부었다. 덩어리지지 않도록 신경 쓰는 그에게 리처드 베이커가 물었다.
『브라이언, 어떻게 되어 가?』
『책은 잘 만들어질 거야.』
리처드가 수건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발가락과 발등은 끝났어. 난 이제 발목부터 만드는데, 아까 네가 미리 만들어 준 치맛자락은 어디에 있지?』
그는 새하얀 초콜릿 반죽을 덧붙여나가며 오른 발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브라이언이 급속 냉각기 앞에 서서 소리쳐 대답했다.
『치맛자락 B는 여기에 있어. 내가 갖다줄게.』
『왼발은 어디에 있지?』
『여기!』
리처드 베이커와 브라이언 신 두 사람을 보며 토마스가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 연습할 때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호흡이 잘 맞네. 한국에서 무슨 대회를 같이 나갔다더니, 거기서 같은 팀이었어?』
리처드 베이커가 씩 웃었다.
『아니, 거기서는 전혀 다른 팀이었지.』
브라이언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같이 일해본 적이 없어.』
토마스가 물었다.
『뭐? 리처드 쉐프는 한국의 가게에서 잠깐 일했던 적이 있다며. 그때 당연히 브라이언이랑 같이 일한 줄 알았는데』
『내가 같이 일했던 사람은 브라이언 쉐프가 아니라 임진혁이라는 한국 쉐프야.』
『그래?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디저트 서바이벌 쇼 시즌 2의 우승자야. 이번 대회에 한국 팀으로 출전했지. 엄청난 실력이야.』
『흐음. 여기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다들 지역 대회 우승 정도는 했다는 거잖아. 진혁이라는 사람한테 뭔가 대단한 점이라도 있어?』
토마스가 정을 놓지 않고서 말했다. 얼음 조각은 20% 정도 완성된 상태다. 전체적인 덩어리를 잡았고 이제 쭉 뻗은 오른팔이 도드라질 수 있게 다른 부분을 깎아내고 있다.
그 역시 미국 서부의 얼음조각대회에서 우승한 실력자다.
『특별히 한국을 얕보는 건 아니야. 하지만 4백만 명이 사는 국가와 몇억 명이 사는 국가의 지역 대회는 수준이 다르니까 말이지.』
미국의 인구는 3억 명이 넘고, 남한의 인구는 5000여만 명에 달한다.
『한국 인구는 4백만 명을 훨씬 넘어, 토마스.』
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그가 새로운 초콜릿을 틀 형에 붓는 사이에 리처드 베이커가 대답했다.
『임진혁의 대단한 점은 경력이 짧다는 거야.』
『경력이 짧은데 이런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거야? 도대체 무슨 실력을 감추고 있는 거지?』
『압도적인 체력과 빠른 속도로 연습을 계속해서, 모자란 경험을 순식간에 커버한다는 점이 놀라운 거지.』
브라이언이 초콜릿 덩어리를 더 가져왔다.
『리처드! 종아리와 무릎 파츠는 여기에 있어.』
『오케이, 고마워. 자, 자. 집중하자고, 집중! 시간은 지금도 계속 가고 있다고.』
◈ ◈ ◈
화기애애한 다른 국가 팀에 비해서 중국 팀은 그리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런, 모델링 초콜릿이 완전히 잘못되어 있어.」
모델링 초콜릿을 반죽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만든 초콜릿 반죽을 식혀서 사용할 수 있게 하려면 두 시간 이상 걸린다. 중탕한 모델링 초콜릿에 옥수수 시럽을 섞어서 점도를 조절한다. 하지만 아까 앙트르메를 만들기 전 준비해 둔 모델링 초콜릿은 시럽이 지나치게 많이 섞여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준비된 초콜릿 반죽으로 조형만 해도 아슬아슬한 시간인데, 지금부터 모델링 초콜릿 반죽을 새로 만든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상상할 수도 없다.
앙트르메를 제출하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틀렸다.
「크윽….」
페이창이 시럽과 초콜릿의 비율이 잘못되어 덩어리를 형성하지 못하고 물러진 초콜릿 반죽을 바라보았다. 손끝부터 시작해 온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다정한 연인이 등에 손을 얹으며 위로의 말을 속삭였다.
「페이페이, 일단 심호흡부터 해. 다 잘될 거야.」
「우린 이미 틀렸어. 벌써 두 시간을 버렸다고.」
「진정해.」
감정이 격해진 페이창이 후회할 말을 내뱉었다.
「진정?!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어. 너처럼 귀하게 자란 백만장자 딸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번 대회에 목숨을 걸었다고!」
메이링이 조금 전까지 다독거리던 손을 떼고 한발 물러섰다. 얼음 조각에 집중하고 있던 세 번째 페이스트리 쉐프, 구난시가 끼어들었다.
「페이창, 갑자기 메이링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장 사과해.」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메이링이지!」
「페이창.」
메이링이 이를 갈면서 무어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페이창이 그 말을 끊었다.
「콘 시럽을 준비한 사람은 너였어, 메이링. 원래대로라면 네가 아니라 리슈이가 올라왔을 거잖아! 네가 돈을 쓴 거지? 아버지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잖아. 사과할 사람은 너야!」
「설령 메이링이 콘 시럽을 준비했다고 해도, 비율을 확인하지 않고 직접 섞은 건 너다, 페이창.」
「구난시 넌 내 친구잖아. 왜 메이링 편을 드는 거야? 너도 돈 먹었냐?」
페이창은 구난시를 밀치며 으르렁거렸다. 메이링이 심호흡한 후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헤어지자, 페이창.」
◈ ◈ ◈
낮고 빠르게 진행되는 중국어 대화다. 바로 옆 부스인 탓에 듣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왔다.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진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현대가 평화롭긴 해. 지금쯤이면 벌써 칼을 뽑아 들고도 남았을 텐데.’
◈ ◈ ◈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중국 부스의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계속해서 나지막한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헤어지자’라는 말을 들은 후 얼굴이 시뻘게진 페이창은 언성을 높였다.
「내 쪽에서 먼저 할 소리야!」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리본을 내팽개치며 바닥에 발을 굴렀다.
그 순간 종이 리본 끝자락이 허공에 휘날렸다.
메이링이 비켜선 그 자리 뒤에는, 그녀가 초콜릿을 새로 중탕을 하고 있던 화구가 있었다.
새끼손톱 크기로 불타오르던 불꽃은 순식간에 종이 리본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솟아오른 불꽃이 화르륵, 페이창의 쉐프복까지 닿았다.
「크아악!」
「꺄아아아악!」
『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