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254화 (254/656)

제 254화

대회 원칙상 먼저 제출한 케이크부터 심사한다.

‘우승 후보라고까지 불렸던 일본 팀이 이렇게 늦게 내는 건 조금 의외지만 말이지.’

어쩌면 2시간을 꽉 채워 조금 더 완성도가 높은 케이크를 만들고자 하는 욕심일지도 모른다. 알리샤는 접시를 받쳐 들어 심사위원 한 명 한 명 앞에 내밀었다.

『음양 앙트르메(陰陽)입니다.』

『이번 케이크는 하나가 아니군.』

『화이트 초콜릿과 코코넛 바바리안 크림 케이크, 그리고

다크 초콜릿과 티무트 페퍼 바바리안 크림 케이크입니다.』

그것은 밤의 반달처럼 새하얀 곡옥(曲玉) 같은 케이크에 맞물리는, 칠흑 같은 밤처럼 새까만 케이크였다.

꼬리가 긴 반달 모양이 서로 엇갈려 태극(太極)을 만든다.

양을 상징하는 희디흰 케이크 위에는 금빛 초콜릿 원판이, 그리고 음을 상징하는 검디검은 케이크 위에는 은빛 초콜릿 원판이 올려져 시선을 모은다. 원판 위에서부터 출발한 은빛과 금빛 덩굴은 얼기설기 얽혀 반구형 모양이 되었다.

『오리엔탈 스타일의 케이크가 이렇게 우아할 수 있다니 신기한데.』

『음양의 조화를 케이크로 아주 잘 표현해냈군.』

다들 외형에 대해서 한두 마디씩 하는 사이에 주영모는 궁금해하며 시식을 기다렸다.

‘티무트 페퍼가 바바리안 크림이랑 잘 어울리려나?’

티무트 페퍼(Timut Pepper)는 히말라얀 지방에서 재배하는 특별한 종류의 후추다. 수백 년 동안 네팔에서 사용해 오던 이 향신료는 서양 세계에 소개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조그마하고 찌그러진 말린 포도알처럼 생긴 이 열매는 놀라울 정도로 풍미가 강하다. 척추까지 전율이 오게 하는 매운맛은 입안의 미각을 완전히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호사가들의 사랑을 받는 이 향신료는 건강에도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한동안 제빵계에도 유행했다.

‘하지만 티무트 페퍼는 밸런스를 맞추기가 아주 어렵지.’

할라피뇨 고추보다도 더 매운 이 향신료는 단지 열매 두세 개만 넣어도 치과에 간 것처럼 입안의 모든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 그래서 극히 미량의 가루를 사용해 다른 맛이 느껴질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 적절한 ‘정도’를 맞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빨리 맛보고 싶군.’

하지만 주영모가 음양 케이크를 보고 난 이후에도 시식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이 케이크의 형태에 크나큰 관심을 보였다.

『여태까지 보지 못 했던 모양이야.』

『자칫 심심할 수 있는 모양에 금색과 은색 덩굴을 올리면서 포인트를 줬어.』

『이것이 동양의 신비인가?』

다른 심사위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서 주영모는 어깨를 으쓱했다.

‘서양 사람들은 오리엔탈 스타일에 대해서 뭔가 엉뚱한 신비감 같은 걸 갖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 관심을 제대로 공략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케이크의 전시를 끝마치고 무대 가운데로 돌아온 알리샤가 집게를 사용해 음(陰) 케이크와 양(陽) 케이크 간의 간격을 벌렸다.

하얀 케이크를 절반으로 자르자 레이어라고는 없이 상아 색깔 무스가 보였다. 기포없이 촘촘하고 빼곡한 크림 무스에서 진한 코코넛 향이 풍겼다.

『아주 농밀한 코코넛 바바리안 크림이네요.』

새로운 칼을 들어 검은 케이크를 절반으로 자르자, 이번에는 새까만 케이크가 드러났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강렬한 향기는 주영모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티무트 페퍼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노골적으로 맵고 사나운 그 향기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조심스러우며 어둡다.

『여기까지 향이 느껴져.』

시몬이 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다크 초콜릿 티무트 페퍼 맛이 궁금한데.』

놀랍게도 알버트 역시 시몬에게 동의하였다.

『다루기 힘든 재료를 썼네.』

『맞아.』

알리샤는 금방 케이크 조각을 나누어주었다. 주영모는 설레하며 포크를 찍었다. 당연히 다크 초콜릿 티무트 페퍼 바바리안 크림 케이크-즉 다크 케이크 먼저다.

‘오.’

티무트 페퍼 특유의 톡 쏘는 맛은 없다. 다크 초콜릿의 중후한 단맛이 묵직하게 내려앉고 부드러운 바바리안 크림이 깃털처럼 혀 위를 간질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혀 한쪽 끝이 멈춘 것처럼 굳었다가 풀어졌다.

아주 소량의 티무트 페퍼다.

『흐.』

아주 잠깐 감각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단맛이나 짠맛, 신맛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각의 부재다. 그것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주영모는 잠시 눈앞의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내려보았다. 단 하나에만 집중했지만, 그것을 아주 잘 표현했다. 이 케이크 하나만 있었어도 좋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떤가 볼까.’

새하얀 케이크의 부드러운 바바리안 크림은 화이트 초콜릿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다크 초콜릿 케이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개성과 독특함, 이변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맛이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싶었나.’

티무트 페퍼를 화이트 초콜릿 케이크에 넣었다면 어땠을까? 담백하고 잔잔한 맛을 해치는 개성이 되었을까?

케이크를 만든 이들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며 주영모는 생각에 잠겼다.

『두 개의 초콜릿 케이크를 동시에 먹는 게 더 맛있군.』

알버트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주영모가 두 개의 케이크를 하나로 뭉개 크림을 섞었다.

‘어떤가 볼까.’

다크 초콜릿 케이크의 농후한 초콜릿 향과 페퍼 향에 코코넛과 바바리안 크림, 그리고 화이트 초콜릿이 어우러지자 아주 산뜻하고 독특한 맛이 탄생했다.

『…이건 아예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내놓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는데.』

『접시 위에서 합쳐지면서 완성되는 종류의 디저트 요리야.』

『앙트르메는 즐거움을 가져다주어야 하니까, 나쁘지는 않은데.』

아주 훌륭한 케이크였지만 시몬 리옹은 마지막까지 트집을 잡았다.

『하지만 그렇게 먹지 않았을 때는 화이트 초콜릿 케이크 맛이 조금 싱겁지.』

◈          ◈          ◈

『마지막 케이크 심사가 있겠습니다!』

알리샤가 받쳐나온 케이크를 보고서 심사위원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케이크는 전혀 먹을 수 있는 물건처럼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케이크입니다.』

접시 위에 있는 것은 일반적인 금괴보다 한참 더 큰 크기의, 금속 주괴 모양 케이크였다.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모두가 금을 사랑하죠.』

『저도요.』

섬세하고 매끄럽게 얹힌 식용 금박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곳이 케이크 대회장이 아니고 이 금괴가 올라가 있는 곳이 접시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이 빛나는 금괴가 케이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아름답군요.』

『저 크기라면 5kg은 되어 보이는데.』

심사위원들이 농담을 나누었다. 이 놀라운 금괴 모양의 케이크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지만, 모두의 눈길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금속 주괴의 형태를 띤 이 케이크가 어떤 것인지 알리샤가 간단히 설명했다.

『골든 패션후르츠 초콜릿 바 케이크입니다.』

금괴 표면에는 섬세하게 ‘쿠프 드 몽드’ 라는 글자와 대회 날짜가 양각되어 있다.

알리샤가 케이크를 보여주며 걸었다. 가까이에서 금괴 케이크를 보며 심사위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저 색깔과 광택을 보면 골든 리프 사의 24k 제품이군. 저 사이즈의 케이크를 전부 덮을 만큼 큰 사이즈가 나오는 줄 처음 알았네.』

식용 금박은 고급 요리에 화려함을 더해주기 위해 흔히 사용된다. 불순물이 없는 24k 금박은 24k나 17k보다 더 태양처럼 밝은 금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실제 금 같은 느낌을 준다.

『아니야. 그냥 식용 금박을 덮어씌운 줄 알았는데. 금 스프레이를 뿌리지 않는 이상 그럼 저렇게 양각한 글씨가 자연스럽게 보이기는 힘들지.』

금가루를 스프레이로 뿌릴 경우, 금박을 바르는 것과 달리 골고루 펴기가 어려워 이런 느낌이 나기 어렵다.

『금을 이렇게 많이 쓰다니. 업장에서 판매는 어렵겠어.』

식용 금박은 진짜 금을 아주 얇게 편 것이다. 금박 공장에서는 기계를 사용해 이 금박을 260장이나 모아야 겨우 종이 한 장의 두께가 될 정도로 얄팍하게 펴낸다. 그래도 금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싸기 때문에 이렇게 케이크 전체를 덮어버릴 정도로 많이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도 먹으면 기분은 좋겠는데.』

알버트가 맛있어 보인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웅성거리는 심사위원들을 힐긋 바라본 엘리자베스가 마저 사회를 계속했다.

『심사위원 여러분, 주목해 주세요. 지금부터 케이크를 반으로 자릅니다!』

알리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따라서 빵칼을 치켜들었다. 그녀가 내리친 빵칼은 얇디얇은 금박을 가볍게 찢어버리고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잘랐다. 굵직하게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패션후르츠의 선명한 노란색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패션후르츠 무스인가.』

주영모가 중얼거렸다.

다크초콜릿 무스와 패션후르츠 무스, 그리고 화이트 초콜릿 무스.

‘이거 참, 순서가 나빴는데.’

방금 전에 맛본, 히말라야산 후추를 섞은 다크 초콜릿 무스가 지나치게 강렬했기에 이 무스는 그저 평범해 보일 뿐이다.

‘코코넛을 곁들였던 화이트 초콜릿 바바리안 케이크는 아까는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휘핑크림과 화이트 초콜릿을 섞어서 만들어낸 화이트 초콜릿 무스는 그것보다 더 평범해 보았다. 패션후르츠 무스가 상큼하고 산뜻한 맛을 주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또한, 금박은 데코레이션일 뿐,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다.

‘이 케이크를 먼저 먹었더라면 다른 평가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지.’

주영모는 케이크의 맛에 대해서 좋지 않은 점수를 주었다.

『초콜릿 케이크라고 하니까 다크 초콜릿과 화이트 초콜릿을 내놓는 건 너무 단순한 생각 아닌가.』

『좀 더 맛있게 할 수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지. 자신이 없으면 아예 이 주제로 만들지를 말았어야지.』

시몬 리몽만이 아니라 알버트나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그리 좋은 평을 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주영모는 조금 전 채점한 두 개의 케이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티무트 페퍼부터 패션후르츠까지, 좀처럼 서양식 디저트에서는 쓰이지 않는 재료들이다. 사실은 임진혁 역시 이런 식의 어프로치를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영모는 차가운 물을 마시며 입안에 남은 맛을 씻어냈다. 그는 희미한 기대감에 몸을 떨었다.

‘빨리 이 심사를 끝내고 임진혁 쉐프가 초콜릿으로 뭘 만들고 있는지 보고 싶군.’

◈          ◈          ◈

심사위원들이 마지막 초콜릿 앙트르메까지 심사하는 동안, 잠시 동안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불안해하는 참가자들이 무대에서 서성거렸다.

『마리, 화장실이라도 갔다 오지그래?』

『알았어, 루이스 형. 형은?』

『너 다녀오면 다녀올게.』

휴식 시간 동안에 쉴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작업을 해도 상관없다. 한 손에 정을 들고 멈추지 않고 얼음을 다듬고 있던 루이스가 외쳤다.

『임진혁! 너는 화장실 안 가?』

『난 괜찮아.』

임진혁은 손을 쉬지 않았다. 팔뚝만 한 초콜릿 블럭 조각을 올려 건축물의 토대를 굳건히 한다. 한 단 한 단씩 계단을 쌓아 올리며 그는 이 초콜릿 장식품이 다 만들어지면 어떤 모양이 될지 상상해 보았다.

‘국보 20호, 불국사 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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