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3화
방금 전에 아주 진한 케이크를 맛보았기 때문일까? 상대적으로 초콜릿 트리아농의 맛이 연하디연하게 느껴진다. 시몬이 착잡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마저 떴다.
‘한참 부족한데. 왜 미리 의논했던 초콜릿 장미 크림을 하지 않았지?’
이번에는 포크에 바닥의 크러스트까지 전부 포함해서 한꺼번에 맛보았다. 파삭파삭한 크러스트가 부서지며 진한 초콜릿 무스와 함께 새로운 질감을 선사한다. 갈아낸 비스킷 가루와 직접 볶아 갈아낸 헤이즐넛 가루를 섞은 크러스트가 풍기는 진한 커피 향은 연하기 그지없던 초콜릿 무스와 섞여 새로운 차원의 맛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조제프가 미리 선보였던 맛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 촉박한 대회에서 이전까지 연습했던 맛을 버리고 새로운 맛을 개발해낸 것이다.
『맙소사, 아주 좋은데!』
저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시몬은 흡족해하며 접시를 바닥까지 깨끗이 비웠다.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대회는 일찍 끝낸 이들도 수준이 높군.』
『아몬드와 헤이즐넛으로 초콜릿 맛을 강조하고 있어.』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작년까지는 1시간 45분~50분 정도에 한 팀이 제출하고, 다들 2시간에 맞춰서 제출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올해의 앙트르메 제출은 아주 빠르네요. 4년 후의 쿠프 드 몽드에서는 더 빨라질까요?』
『케이크를 만드는 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1시간 45분이라고 생각해요, 더 줄어들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1, 2분이라면 모를까 더 이상 줄이기는 무리라고 저도 생각한답니다. 알리샤, 지금 시간을 확인해주세요.』
『10분! 10분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1번 부스의 중국 팀이 손을 들었다.
『중국, 앙트르메 제출합니다.』
호리호리한 중국 팀의 남자 쉐프, 페이창이 케이크를 내놓았다.
그것은 케이크라기보다 건축물에 가까운, 기묘한 형태의 케이크였다. 직육면체 형태의 하얗고 검은 초콜릿 케이크는 나무블럭 쌓기 게임처럼 불규칙적으로 쌓여, 하나의 거대한 탑을 이루었다.
직육면체가 그다지 크지 않아, 총 여섯 단까지 쌓여 있는 케이크는 단수에 비해 높이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일반적인 이 층 케이크보다 조금 큰 정도다.
알리샤는 그 케이크를 들고서 B 블럭의 심사위원들 앞을 지났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구두 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
『케이크의 외형 심사를 부탁드립니다.』
『호오….』
전통적인 앙트르메와는 다른 특이한 양식에 심사위원들이 시선을 주었다.
주영모가 말했다.
『이건 보통 초콜릿 케이크보다는 초콜릿 조각에서 사용할 법한 기법인데 말이지.』
알버트는 체코에서 온 심사위원인 마테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팀도 모험을 했군.』
『모험이라고 하면 아까 맨 처음에 보았던 그 피 흘리는 케이크가 최고였지.』
『그건 모험이라기보다 그냥 자랑 아닌가? 나는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슈가크래프트를 할 수 있다, 이런.』
주영모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냥 칼과 피를 좋아하는 쉐프일 수도 있지.』
『그런 쉐프가 어디에 있어? 스릴러 드라마 팬도 아니고.』
주영모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지만 심사하는 장에서 대회 참가자의 취향이나 평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이 초콜릿 블럭 케이크는 심사평이 갈릴 수도 있겠어.』
겉으로 보기에 그 작은 초콜릿 건축물을 이룬 벽돌들은 모두 같은 맛처럼 보였다. 똑같은 진한 흑색 초콜릿으로 코팅된 데다가 모양 역시 전부 같았기 때문이다.
『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주 쉐프.』
알리샤는 그때 마침 블럭 케이크를 반으로 자르고 있었다.
『주영모 쉐프가 맞군.』
블럭들은 저마다 다른 내부를 뽐냈다. 어떤 블럭은 브라우니처럼 진하고 촉촉하게 내부가 꽉 차 있었고, 어떤 조각은 하얗고 깨끗한 시트 안에 마블링처럼 초콜릿 무늬가 얼룩져 있다. 희디흰 빵 사이에 초콜릿 크림이 발라져 있기도 하고, 한국의 초코파이처럼 초콜릿 빵 사이에 하얀 크림이 샌드되어 있는 것도 있다. 모든 조각이 각자 자신의 맛을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다채롭고 화려한 초콜릿의 연회였다.
『하나의 케이크로 여러 맛을, 이라는 모토인가?』
케이크 조각은 총 여덟 종류의 맛이 있었다. 알리샤는 모든 심사위원이 8가지 맛을 전부 맛볼 수 있도록 분배하려 했지만, 구조상 불가능했다. 대신 그녀는 최소한 심사위원 한 사람당 두 개의 블럭 맛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접시를 채웠다.
곧 시식이 시작되었고,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조용히 입으로 조각을 가져갔다.
시몬 리옹이 따지듯 물었다.
『주영모 쉐프의 조각은 무슨 맛이지?』
주영모는 방금 맛본 두 개의 케이크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초콜릿 케이크 시트 사이에 마시멜로를 발라 놓은 케이크는 어디선가 먹어본 맛이 났다.
초콜릿 빵에 딸기잼을 샌드한 빵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능력 있는 쉐프가 새롭게 구상해서 계량해 만든 것이 분명한데, 놀랍게도 그가 아는 과자와 대단히 유사한 맛이 났다.
‘첫 번째 케이크 조각은 마시멜로를 발라서 그런 거고. 두 번째 조각은 일부러 다른 초콜릿 시트와 맛에 차별화를 두려고, 반죽을 다른 형태로 해서 얇고 바삭바삭하게 씹히게 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주영모는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초코파이랑 빅파이 맛.』
『그게 뭐지? 한국식 스위트 디저트인가?』
『뭐, 비슷한데. 시몬 리온 당신이 맛보는 건?』
『아몬드 초콜릿 브라우니. 아주 흔하고 진부한 맛이지.』
백발 아래 이마의 주름이 깊어지며 시몬이 단호하게 말했다.
『적당한 맛을 대충 아무거나 늘어놓는다고 해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어린아이들 생일 파티에는 괜찮을지도.’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맛을 배열하고 쌓아 올려 건축물처럼 만드는 것은 최근에 아이스크림 케이크에서 본 적이 있다. 그는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상업적인 아이스크림 케이크 브랜드를 떠올렸다.
‘체리 아이스크림에 초콜릿, 바닐라에 딸기 아이스크림 등을 블럭처럼 쌓아 올려 다양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먹을 수 있도록 했지.’
알버트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초콜릿 무스는 아주 괜찮군. 아까 초반에 먹었던 슈가소드(Sugar sword)만큼이나 달콤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맛이야.』
주영모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 초콜릿 무스 하나에만 집중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그는 이번만큼은 저 시몬 리옹의 말에 동의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제일 맛있는 케이크에 집중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 ◈ ◈
중국 팀의 페이창은 흘끔흘끔 옆의 부스를 쳐다보았다. 페이창의 연인인 메이링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국어로 물었다.
「페이, 왜 그래? 뭔가 걱정되는 점이라도 있어?」
「그냥, 내가 너무 무능한 것 같아서.」
「뭐가?」
「한국 팀은 지금 첫 번째로 제출하고 벌써 초콜릿 기둥의 토대를 짜고 있잖아. 타임 보너스를 두 번 받을 기세로 달려가고 있는데.」
「페이페이. 다른 팀은 신경 쓰지 마, 우리는 우리 일을 제대로 하면 되는 거야.」
메이링이 연인의 애칭을 부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옆에서 부지런하게 얼음을 쪼개고 있던 구난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1시간 50분 동안에 여덟 종류의 초콜릿 케이크를 구웠잖아. 너처럼 능력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가 또 어디에 있겠어.」
하지만 그 위로에도 페이창은 불안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한국 팀이 제출한 슈가크래프트 아트가 너무나 아름다웠어.」
「페이페이, 그런 건 어서 잊어버리고 빨리 여기서 초콜릿 판 까는 것부터 도와줘.」
그들은 중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진혁은 옆에서 전부 듣고 있었다.
‘내가 만든 초콜릿 케이크는 총 9개 층인데. 저들이 나중에 알면 놀라겠군.’
◈ ◈ ◈
이미 케이크를 제출하고 나서 평가를 기다리는 동안, 중국 팀만이 아니라 다른 팀들도 그다지 분위기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프랑스 팀은 초상난 것처럼 분위기가 어두웠다. 아까 조제프가 했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주느비에브가 조제프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조제프, 아까 앙트르메에서 왜 마지막 순간에 장미를 버렸어?』
『지나치니까.』
『뭐가?』
대답할까, 말까 잠시 생각하고 나서 조제프가 대답했다.
『초콜릿 크림 장미를 올리면 초콜릿 맛이 너무 강해지니까, 밸런스를 맞추려면 그렇게 해야 했어.』
『완전히 망해버릴 수도 있다고!』
그녀는 명상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던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러잖아도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하던 순간, 갑자기 조제프가 스패츌라를 들었다. 그가 초콜릿 케이크 위에 짜놓은 크림 장미를 긁어내기 시작했을 때 주느비에브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크림을 펴서 아이싱처럼 순식간에 케이크를 뒤덮은 후, 그녀가 따로 쓰기 위해 만들어두었던 글레이징을 가져가 그대로 케이크 위에 뿌렸다. 그리고 역시 초콜릿 기둥 쪽에 쓰일 예정이었던 금색 초콜릿 판을 가져가 난초 모양으로 뿌리고, 진주 알을 더했다.
완성된 케이크는 아름다웠다.
처음부터 이런 모양을 생각했던 것처럼 완벽한 모양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원래 그들이 만들기로 동의한 형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갑자기 마지막에 디자인을 바꾸지만 않았어도 독일보다는 빨리 냈을 거라고.』
『워, 워. 주느비에브, 타임보너스는 첫 번째에만 있다고. 두 번째나 세 번째나 상관없어. 오히려 잘못된 밸런스를 고쳐서 내는 게 더 중요하지.』
그것은 심사위원들이 ‘초콜릿 젠가 케이크’를 심사하면서 했던 말과 닮아있었다.
『맛있으면 돼. 그리고, 주느비에브.』
초록빛 눈이 냉정하게 주느비에브를 응시했다.
『초콜릿 앙트르메는 내 책임이지만, 초콜릿 노트르담 성당을 만드는 건 네 책임이야. 기둥과 네 벽이 이미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
『!』
필리프가 끼어들어 중재했다.
『진정해, 조제프. 그리고 주느비에브, 너도 알잖아. 앙트르메를 어떻게 만들지 우리가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조제프가 결정하는 게 맞아. 우리가 네 노트르담 성당을 도울 수는 있지만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느비에브는 초콜릿 반죽을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미리 써버린 금빛 장식과 진주 알 때문에 내 초콜릿 성당 장식이 부족해지면 가만 안 둘 거야.』
『예이, 예이.』
◈ ◈ ◈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금발을 휘날리며 양팔을 벌렸다.
『2시간! 제한 시간 2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제출하지 못하시는 팀은 시간 초과로 탈락입니다! 여러분, 앙트르메를 제출해주세요!』
『일본 팀 앙트르메 접수합니다.』
조리모를 쓴 조그마한 일본인 여자가 둥근 돔형의 초콜릿 케이크를 내밀었다. 늦은 시간에 제출하는 만큼 장식이 화려했다. 황금색과 은색의 덩굴이 얽혀들어 간 앙트르메다.
『체코 팀 접수합니다!』
『3, 2, 1!』
삐이이이익 하는 긴 비프음이 회장 전체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