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2화
『확인해 보겠습니다.』
임진혁은 진행요원이 자리를 뜨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주최 측에서 온도 조절을 해 주던, 해 주지 않던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니 상관없다. 갑자기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한기를 느끼며 온몸이 오싹해진 루이스가 순간 어깨를 떨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효과가 좋은데.”
“저쪽에서 뭔가 해주었나 보지.”
진혁은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루이스 앞에 서 있는 얼음 기둥을 살폈다. 어쨌든 멋대로 한쪽이 녹아버리는 일은 막았다.
“휴, 이제 된 것 같다. 템퍼링을 다시 해야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녹지는 않겠어.”
루이스가 안심하고 다시 정을 들었다. 쨍하는 소리가 울린다. 마리오는 진혁이 사용할 초콜릿을 천천히 중탕했다. 다크 초콜릿과 밀크 초콜릿, 그리고 장미수를 넣은 로즈 초콜릿까지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마리오 녀석도 정신 차린 것 같군.’
일행이 제대로 역할을 하는 것을 확인한 진혁은 기감을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9번, 독일! 제출합니다.』
독일 페이스트리 팀의 헤드쉐프 하인리히 윙켈이 체리가 올라간 케이크를 내밀었다. 동시에 조제프 역시 앞으로 나서며 스퀘어 초콜릿 케이크를 올려 들었다.
『7번, 프랑스! 앙트르메 제출하겠습니다!』
알리샤가 시계를 보며 외쳤다.
『1시간 45분, 동시 제출입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동시에 제출했습니다!』
보조 스태프가 나라별 두 개씩, 총 네 개의 케이크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관객석에 있던 프랑스 응원단이 붉은색과 파란색, 흰색의 국기를 휘날리며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힘내라, 조제프!』
『비바 프랑스!』
그에 질세라 반대편에 있던 독일의 응원단들도 플랜카드를 펄럭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윙켈! 윙켈!』
◈ ◈ ◈
동시에 제출했다고는 해도 몇 초 차이로 독일이 조금 더 빨랐다. 알리샤는 먹음직스러운 빨간 과일이 올라간 초콜릿 케이크를 들어 올리며 모델처럼 걸어 심사위원들 앞을 지났다. 시몬 리옹이 희미하게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알리샤를 바라보았다.
‘1시간 45분. 이제 조제프 녀석이 케이크를 제출하겠군.’
케이크가 가까워지자 체리가 올라간 원형 홀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영모가 중얼거렸다.
『슈바르츠발더 키르쉬토르테?』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로군.』
슈바르츠발더 키르쉬토르테(Schwarzwalder Kirsch-torte). 본디 독일에서 기원한 케이크로, 영어권에서는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Black Forest Cake)라고 부른다.
원래는 흰 생크림으로 샌드한 초콜릿 스폰지 케이크에 얇게 썰린 다크초콜릿 슬라이스와 붉은 체리로 장식한다. 초콜릿 스폰지 케이크 시트는 키르시와서(Kirswasser)라고 불리는 독일의 체리주를 섞어 만들어, 진한 초콜릿 맛과 함께 독특한 체리 향을 내뿜는 것이 특징이다. 단지 지금 알리샤가 들고 있는 이 케이크는 하얀 생크림이 아니라 진한 갈색 초콜릿 크림이 베이스라는 사실만이 달랐다.
하지만 어쨌건 이 케이크는 독일의 전통적인 음식이다.
케이크를 조제프가 내놓았을 리가 없다.
첫 번째 케이크에 이어서 두 번째 케이크에서도 배신당한 시몬이 씁쓸한 신음을 흘렸다.
『쓰으읍.』
‘지금 저 케이크가 조제프 녀석 것이었어야 해. 지금이 보통 녀석이 케이크를 제출하는 타이밍인데.’
모의 실습을 할 때 조제프가 케이크를 완성하는 시간이 보통 그 정도였다. 1시간 45분. 두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케이크를 제출해야 하며 최우선으로 제출한 팀이 타임보너스를 받는 것을 고려하면, 전략은 두 가지다. 일찍 낼 것, 또는 완성도를 높이고 높여 2시간의 타임 리미트가 지나가기 전에 낼 것.
전통적인 강호, 프랑스 팀은 언제나 제일 먼저 케이크를 제출했다. 이번에도 그 타임 보너스를 기대하며 1시간 45분을 마지노선으로 케이크 만들기를 연습했다. 혹독한 시간, 끊임없이 연습을 시켰는데도 어디에서 누군지 모를 놈들이 속속 튀어나와 그의 예상을 깨뜨린다.
시몬이 불쾌한 듯 말을 내뱉었다.
『이걸 초콜릿 앙트르메라고 할 수 있나? 체리와 생크림이 메인이잖아.』
『맛을 보기 전부터 너무 까다롭게 구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군, 시몬.』
유태계 독일인 페이스트리 쉐프, 오베르슈타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시몬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두 사람에게 주목하였으나 둘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외모 평가가 끝난 후에는 바로 시식 평가가 이어집니다.』
알리샤는 과장된 몸짓으로 빵칼을 들어 깔끔하게 케이크를 절반으로 갈랐다. 반으로 잘린 케이크 안쪽에는 전통적인 초콜릿 시폰 케이크 시트와 흰 생크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검은색과 갈색, 흰색에 가까운 연갈색 세 가지의 층이 보일 뿐이다. 중간중간에 붉은색 체리가 콕콕 박혀 있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단순한 레이어드 초콜릿 케이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이 케이크를 한 조각씩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각 심사위원 여러분께서는 맛을 평가하시고 기록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제출한 케이크이기 때문에 No.2라고 쓰인 종이에 따로 표기해야 한다. 주영모는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에 포크를 찍었다.
‘이건…화이트 초콜릿, 밀크 초콜릿, 그리고 다크 초콜릿인데.’
이자들-아마도 독일 팀-은 임진혁과 전혀 다른 방향을 택했다. 진혁이 초콜릿과 바닐라를 통해 초콜릿으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간식거리 전부를 케이크 안에 밀어 넣어버린 것에 비해서, 이쪽은 초콜릿 자체에 집중했다.
기본적으로 초콜릿은 ‘카카오 열매’를 가공하여 만드는 음식이다. 즉, 단순한 농작물이다. 초콜릿의 맛이 단순하게 ‘달콤하고 씁쓸하다’라고 알고 있는 일반인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식물은 자라나는 토양과 기후에 따라서 놀랍도록 맛이 달라진다.
에콰도르에서 자라난 카카오빈의 경우 과일 향이 나는 새콤한 산미를 즐길 수 있다. 볼리비아산 초콜릿의 총알처럼 공격적이고 씁쓸한 맛이나, 페루산 마린다 콩을 사용해 재배한 초콜릿처럼 고소하고 베리 향이 나는 맛 역시 특별하다.
독일 팀은 케이크가 아닌 ‘초콜릿’을 완전히 다른 맛의 세계로 끌어올렸다.
‘이건 완전히 전문 쇼콜라티에의 솜씨인데?’
우물처럼 깊고 농후한 다크 초콜릿 무스 층은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향을 풍겼다. 처음에 밀크 초콜릿이라고 생각했던 중간층은 전혀 다른 맛으로 주영모를 놀라게 했다.
“이건 완전히 버찌 향이 배어 있는데….”
굳이 명명하자면 ‘체리 초콜릿’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크 초콜릿 무스와 체리 초콜릿 무스만이 아닌 마지막 층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화이트 초콜릿 무스가 아니라 바닐라 초콜릿 무스로군.』
『바닐라빈을 제대로 갈았는데요? 향이 좋아요.』
주영모 역시 양쪽에서 들려오는 평가에 동의했다. 다크 초콜릿과 체리 초콜릿, 그리고 바닐라 초콜릿이 함께 초콜릿 크림과 함께 연주해내는 오케스트라는 충분히 세계 수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바로 전이 임진혁의 케이크가 아니었으면 더 높은 점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질감이 똑같았다. 중간중간 씹히는 체리의 과육이 독특한 식감을 가져다주었지만, 세 종류의 레이어 모두 같은 텍스쳐였다. 이미 임진혁의 케이크를 맛보았기 때문에 여기에 만점을 줄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야.’
◈ ◈ ◈
진행자 엘리자베스 포크너 역시 심사위원들이 하는 심사를 지켜보며 입맛을 다셨다.
『놀라울 정도로 달콤한 초콜릿 향기에요. 저도 맛보고 싶네요.』
『저도요, 포크너 쉐프님. 하지만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지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심사위원 여러분! 조금 더 서둘러주세요. 1시간 45분, 같은 시간에 제출한 두 번째 케이크가 여러분의 심사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훌륭한 작품에는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서 평가해야 하는 법이죠.』
『오베르슈타인 쉐프님, 안타깝게도 이제는 더 이상 여유가 없어요!』
심사위원들은 케이크 당 최소한 15분 이상의 심사 시간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곧 끝났다.
- 땡, 땡, 땡.
종이 울렸다. 두 번째 심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드디어 알리샤가 세 번째 케이크를 들고 나왔다.
『세 번째 역시, 아주 아름다운 초콜릿 케이크입니다.』
검고 반들반들한 초콜릿 스퀘어 케이크 위에는 지그재그로 올라간 금빛 리본이 황홀한 선을 그린다. 한쪽 모서리에서 출발해 중국의 난초 그림처럼 뻗어 나가는 금색 초콜릿 판 리본은 보는 이들이 초콜릿 케이크의 표면 한쪽 끝에 시선을 집중하게끔 했다. 금빛 난초가 끝나는 그 끝에는 인어의 눈물처럼 성스러운 검은 진주 알이 우아한 광택을 더했다. 희고 검은 진주 알들은 불규칙적임 속에서도 어떠한 규칙이 있는 것처럼 매끄럽게 잘 어울렸다.
『초콜릿 트리아농.』
형편없이 구겨져 있던 얼굴이 드디어 펴진다. 시몬이 케이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들, 늦지 않았구나.’
초콜릿 트리아농(Chocolate Trianon), 초콜릿 로얄(Chocolate Royal)이라고도 불린다. 풀코스 요리의 디저트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 이 초콜릿 크림 케이크는 전통적인 프랑스 음식이다.
중간에 식히는 시간을 포함해도 1시간 20분 이내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에, 시몬은 프랑스 팀이 연습할 수많은 초콜릿 디저트 중 이것을 첫 번째로 올렸다.
‘1시간 45분이 아니라 1시간 20분을 목표로 해야 했어.’
데코레이션 때문에 25분을 더 소비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심사위원들이 초콜릿 케이크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순하지만 아름답군요.』
『화려한 기교보다는 기본적이고 단순한 데에 중점을 줬다는 느낌인데.』
조제프가 만드는 초콜릿 케이크는 천상의 음악처럼 달콤하다. 약속된 승리를 기다리며 시몬이 다시 한번 입가를 끌어올렸다.
알리샤가 빵칼을 높이 들어 올리며 미소지었다.
『케이크를 절반으로 자른 후 보여드리겠습니다.』
연한 우유를 탄 커피처럼, 온화한 갈색 무스 케이크가 세상에 드러났다. 바닥에는 바삭바삭한 쿠키 베이스와 진한 흰색 무스가 보인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케이크 안쪽에는 시럽을 흘리며 깨지는 사탕이나 체리 같은 기교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주느비에브는 다른 맛을 추가하는 것이 어떨지 의견을 냈지만, 시몬과 조제프는 이대로 충분하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베이스 기타처럼 깊이 있고 중후한 초콜릿의 맛, 그리고 거기에 비해 부서지는 비스킷의 맛, 그 조화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시식을 부탁드립니다!』
자신만만하게 케이크의 시식을 시작한 시몬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뭐지, 왜 맛이 연한 것처럼 느껴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