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1화
그가 아는 임진혁은 ‘피’를 좋아했다. 파도치는 바다에 보랏빛으로 번졌다가 점차 쪽빛 파도에 물드는 선혈을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했는지 모른다.
‘새로 개업한 윈도우 베이커리. ‘해달’인가? ‘달해’였나? 거기서도 딸기 시럽을 응용해서 피 흘리는 쿠키를 만들어서 팔고 있다고 했어.’
끔찍하고 잔인한 죽음의 순간을 팝아트적인 감성으로 희화화해서 시리즈 쿠키로 팔고 있다고 들었다.
주영모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보조 진행자 알리샤는 반으로 자른 케이크를 펼쳐 그 완벽한 안쪽 레이어를 펼쳐 보였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총 아홉 개의 레이어가 있었다.
알버트가 욕설처럼 중얼거렸다.
『Holy god! 지금 1시간 39분 만에 제출했잖아. 그런데 레이어 아홉 개를 전부 했다고?』
조금 전까지 웅성거리던 심사위원들이 저마다 감탄하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 레이어를 하는 동안에 다른 건 전혀 손도 못 댔겠군.』
『미쳤군!』
『저 깔끔한 층간 구별 좀 보게나.』
다른 심사위원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시몬 리옹이 말했다.
『짧은 시간 동안 9개의 레이어로 케이크를 만들어내는 것과 그 케이크가 맛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지.』
심사위원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저쪽 부스에서 중계하고 있던 사회자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방향을 틀어 케이크를 보러 왔다. 레이어드 케이크를 살핀 그녀가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첫 번째 앙트르메에 레이어를 아홉 개나 만들다니 대단한데요?』
엘리자베스 포크너는 케이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진한 갈색과 크림색, 그리고 연갈색 다시 상아색으로 층층이 쌓여있는 케이크 층 가운데에는 붉고 둥근 구형의 무언가가 보인다.
『이 사랑스러운 딥 레드 컬러는 뭘까요? 흔적이 슬쩍 보이는데.』
『딸기 시럽으로 보입니다.』
알리샤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조그맣게 케이크를 잘라 한 조각씩 접시 위에 얹었다.
『그럼, 심사위원 여러분. 정정당당하고 공정하게 이 케이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세일러복을 입은 소녀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접시를 하나씩 들어 각 심사위원 앞으로 다가왔다. 이름 모를 소녀가 케이크를 내려놓기 전 주영모는 코부터 킁킁거렸다. 강렬하게 풍기는 초콜릿 향이 콧속으로 흘러들어와 뇌 속 신경계까지 벼락처럼 내리꽂힌다.
저절로 입안에 군침이 고인다.
‘한시라도 빨리 저걸 맛보고 싶은데.’
주영모는 초조함에 발을 동동거렸다. 한 입만 먹어보면 임진혁이 만든 건지 아닌 건지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메인 진행자인 엘리자베스 포크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리샤, 심사위원들에게 케이크를 서빙해 주세요.』
『예, 쉐프!』
『즈-연모 쉐프님 케이크입니다.』
주영모는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잘못 발음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제일 먼저 위층에 있는 한 겹의 글레이즈드 코팅을 살폈다. 둔한 빵칼에 잘리며 번져 바로 아래쪽의 상아색 레이어를 조금 더럽힌 상태다. 그는 먼저 이 훌륭한 케이크를 한 층 한 층 살펴보기로 했다.
옅은 상아 색깔 시트는 진한 초콜릿향 때문에 정확히 무슨 맛인지 알기 어렵다. 흘러내린 글레이즈를 벗겨내고 안쪽 시트를 파고들어가자 어떤 맛인지 확정할 수 있었다.
“바닐라 시폰 케이크 시트라….”
촉촉하면서도 탄력 있는 시폰 시트에서는 아주 희미한 바닐라 향이 난다. 왜 제일 마지막- 맨 위 레이어에 시폰 시트를 올려놓기로 선택했는지,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누구나 안다. 가볍고 부드러운 시폰 케이크는 위에 무거운 것들이 올라간다면 바로 무너져 망그러질 것이다.
“두 번째 층은 초콜릿 시트인가.”
짙은 초콜릿 향과는 달리, 초콜릿 맛은 상대적으로 연하다. 폭신폭신하고 부드럽기는 하지만 특별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세 번째 층 역시 흰색에 아주 약간 노란빛이 감도는 상앗빛이었지만 아예 결이 달랐다.
주영모가 이야기하기 전에 다른 쉐프가 중얼거렸다.
『바닐라 다쿠아즈?』
『이건 아드레아노 존부의 ‘그 케이크’하고 비슷하지 않나?』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아드레아노 존부가 선보인 시크릿 티아라 케이크. 제한 시간 세 시간 동안 8개의 레이어를 요리해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주문받아 일부 공개했던 제품이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임진혁이 그 케이크를 시크릿 링 케이크로 개량했다. 주영모는 그때 존부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했다.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데?』
그때 맛보았던 그 케이크와 비슷하다.
초콜릿 마카롱과 바닐라 크림 브륄레, 초콜릿 아몬드 크런치, 초콜릿 샹티이 크림에 마지막의 파이 크러스트까지 전부 맛보고 난 주영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이 점점 더 굳어진다.
‘그 녀석이야.’
일부 바닐라지만 나머지는 초콜릿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거기에 검을 뽑으면 피 흘리는 케이크 따위를 생각해내는 미친 페이스트리 쉐프는 단 한 명밖에 없다.
‘임진혁 녀석. 케이크를 자르는 순간에 터져 흘러나온 시럽. 그걸 도대체 어디에 넣어 놓은 거지?’
모든 레이어는 이미 한 번씩 전부 맛보았다. 그리고 주영모는 가운데 부분에 있는 분홍색 딱딱한 조각을 포크로 찔러 입가로 가져갔다. 딱딱하게 씹히는 날카로운 단맛의 정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사탕으로 껍데기를 만들었어?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한가.’
옆에서 다른 쉐프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렸다.
『아니, 아홉 개나 층을 쌓는 사이에 사탕 껍데기는 언제 조형한 거야? 그것도 여자가 가볍게 내리누르는 빵칼에 잘려 부서질 정도로 얇은 껍질로.』
알버트가 말하는 톤을 들어보면 이제 더 이상 영국 팀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각조각의 맛이 어떤지 확인했으니 이제는 전체 레이어를 한꺼번에 먹으면 어떤 맛이 나는지 알고 싶다.
바삭바삭한 아몬드 크런치와 젤리는 식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사탕 외의 다른 재료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는 아홉 겹의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떠서 포크 위에 올렸다.
“…!!”
그는 황홀함에 온몸을 떨었다. 봄에 활짝 피어나는 꽃잎처럼 싱그럽고, 한밤에 유혹하는 첫사랑처럼 짙다. 농밀한 초콜릿의 향이 감돌고 바로 푹신한 크림, 얇게 썰린 아몬드와 아삭하게 씹히는 과자 조각, 그리고 그 아래 파삭파삭하게 부서지는 파이지.
‘위쪽 레이어는 일부러 연하게 한 거야.’
따로 먹었을 때는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 않고 그저 부드럽기만 했던 시폰 케이크 시트 레이어가 다른 모든 진한 맛들을 하나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뜬금없이 아몬드 크런치에 마카롱이라니, 레이어를 많이 만들어 솜씨를 뽐내고 싶어서 과한 장치를 했어.』
시몬 리옹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영모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저놈 저거, 따로따로 먹기만 하고 한입에 먹어보지는 않았구먼.’
아드레아노 존부는 주로 영국과 호주를 무대로 활약하는 쉐프이므로, 시몬은 저 레시피의 기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흠잡을 데 없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케이크다.
거기에 맛까지 완벽하다.
‘그 아드레아노 존부의 레시피를 개량하고, 다시 한 번 초콜릿이라는 테마에 맞게 변화시켰지. 이건 누가 먹어도 맛있을 수밖에 없어.’
주영모는 가벼운 마음으로 평가지의 문항에 점수를 체크해 나갔다.
재료의 맛을 얼마나 살렸는지, 재료들이 서로 맛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재질은 적합한지 하나씩 평가하면서도 마음이 가벼웠다.
‘이 나인 레이어 초콜릿 케이크 하나만으로도 예선 통과는 확실해.’
◈ ◈ ◈
심사위원들이 첫 번째 심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참가자들은 쉬지 못했다.
여덟 시간 후에 제출할 초콜릿 공예 작품과 내일 제출해야 하는 얼음 조각이 있기 때문이다.
7번 부스인 프랑스 팀 역시 그중의 하나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조제프! 리옹 쉐프님이 처음으로 내라고 하셨잖아. 왜 이렇게 늦어? 그럴 거면 수제자 자리 내놔라.』
주느비에브가 정으로 얼음을 쪼개며 쏘아붙였다. 시몬 리옹의 수제자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조제프 쇠비어는 당황하지 않았다.
『빨리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맛있는 케이크가 중요하지.』
『시간 보너스를 놓치지 말자고 한 게 너였잖아. 너한테 앙트르메를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조제프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은 다물었어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희디흰 초콜릿 원판 위에 자줏빛 초콜릿 심을 얹고, 그 아래에 꼬치를 끼워 원판과 심을 고정한다. 자주색 꼭지의 위에 새하얀 크림으로 꽃봉오리의 심지를 짜낸 다음부터는 이제 꽃잎을 짜는 것만 남았다. 납작한 팁을 45도 각도로 돌리며 꽃잎 위에 크림을 짜내며 꼬치를 빙글빙글 돌린다. 납작하며 엇갈리게 짧게 끊기는 크림은 누가 봐도 흰장미 봉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장미 봉우리 바깥쪽까지 완전히 감싸서 초콜릿 심을 전부 가리고 나서, 원판까지 가리는 형태로 충분한 양의 꽃잎을 그려내어 꽃 한 송이를 완벽하게 피워내는 데까지 10초가 채 걸리지 않는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손이다.
『자, 이제 다 됐어.』
검디검은 초콜릿 케이크 위에 희디흰 장미꽃이 수십 송이 열렸다. 흑과 백이 대비되어 더 하얗게 느껴지는 크림 장미는 섬세하고 아름답다. 주느비에브는 감탄사도 없이 재촉했다.
『빨리 제출해, 서두르라고!』
『오케이, 오케이.』
『앙트르메를 첫 번째로 낸 애들은 좋겠다. 보너스 점수 있으니까 여유 있을 거 아냐』
하지만 그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달리 제2번, 대한민국 부스 역시 여유만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또 다른 어려움에 쫓기고 있었다.
“어쩌지?”
얼음의 바깥쪽을 끌로 긁어내던 루이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오른쪽이 과도하게 녹고 있어. 오븐에서 멀리 떨어뜨린다고 떨어뜨렸는데도 영향을 받나 봐.”
루이스는 얼음 기둥을 옮겨 보려고 했다. 하지만 얼음 기둥이 올라가 있는 받침대는 꼼짝하지 않았다. 조리대 정리를 하고 있던 마리오가 와서 섰다.
“형, 내가 이쪽에 서서 등으로 열기를 막고 있을까?”
루이스가 기가 막혀 하며 말했다.
“마리오! 이쪽 비닐이나 좀 치워 줘.”
사람 한 명을 인간 벽으로 두고 쓰기에는 시간도 촉박하고 인력도 부족하다. 마리오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내가 너무 긴장했어.’
마리오는 황급히 봉투에 비닐들을 담아 동선에서 방해되지 않게 오른쪽으로 옮겼다.
“이쪽이 너무 뜨겁다는 거지?”
옆에서 벽돌 모양으로 초콜릿을 자르고 있던 진혁이 일어났다.
“어, 그런데 방법이 없어. 이미 녹고 있는 얼음을 다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임진혁은 강 씨 형제를 바라보았다.
‘얼음을 다시 얼려 줄 수는 있지만, 이들에게 내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
진혁은 가볍게 대답했다.
“주최 측에 냉방 온도를 조절해 달라고 이야기하면 되지. 지금 내가 여유 있으니까 이야기하고 올게.”
극한의 음한지기를 불러내어 얼음 조각 주변에 감돌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외부적인 핑계가 필요하다.
“에어컨을 켠다고 해서 얼음이 덜 녹을까?”
의아해하는 강마리오를 뒤로 하고 진혁은 바깥쪽에 있는 보조 요원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이쪽 온도를 조금 낮추어주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