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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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자리에 앉은 주영모는 목을 길게 빼며 한국 팀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연히 하얀 벽으로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임진혁 쉐프. 이번에는 이상한 짓 하지 않겠지? 결승전에서 만들었던 그 케이크 같은 걸 만들어 보라고.’
처음에는 어설펐던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 세계무대에 나와 있다.
그래도 기대감보다는 염려가, 걱정이 더 크다.
‘저놈 처음엔 싹수가 노래 보였는데 말이지.’
그는 자신이 임진혁을 처음에 어떻게 평가했는지 되짚어 보았다. 이렇다 할 경력 없이 어설픈 학생 대회의 수상 경력 하나 달랑 가지고 올라온 녀석을 보면서 짜증이 났다. 트위터니 뭐니, 그런 SNS 서비스에서 잠깐 화제가 되었다고 해서 추천한 PD의 안목이 썩었다고 생각했다.
적은 경력에 대뜸 전국 단위의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겠다고 신청한 그 모습이 대회를 우습게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적당히 테스트만 시켜 보고 내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겉멋만 든 애송이’는 의외로 기본기가 탄탄했다. 제과제빵을 이용해 SNS에서 유명해지고 TV에 나와서 연예인 같은 걸 하려는 어설픈 놈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재적인 재능을 깨달아 스스로 몸을 굴리며 자신을 세공해나가는, 다이아몬드 원석에 가까웠다.
처음에 임진혁을 보았을 때 애송이 취급하던 그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경력이 짧은 만큼 다른 이들을 따라가기 위해 거쳤을 끊임없는 연습 시간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감탄할 수밖에 없다. 탄탄한 기본기와 예민한 손끝, 예술가적 감성을 고려하면 그는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차세대 페이스트리 쉐프다. 아니,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우승하고 존부의 인턴 자리를 걷어찬 그때부터 그는 이미 한국의 페이스트리 쉐프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차지했다.
‘나도 늙었지, 늙었어.’
주영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A블록의 심사위원 중 동양인은 그 한 명뿐이었다. 자기들끼리 네트워크가 있는 프랑스 출신의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서로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귀찮을 정도로 다른 쉐프들이 모두 몰려들어 말 한마디라도 걸고 싶어 했겠지.’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그는 그저 동양에서 조금 유명한 쉐프 한 명일 뿐이다.
한국 최초로 유럽의 제빵 레시피를 정리하고 출간했다거나, 주영모 베이커리와 아카데미를 성공적으로 운영했다거나 하는 과거의 업적 따위는 별것도 아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심사위원들 모두 제과 레시피 책은 물론이며 자신의 이름을 단 학교 역시 한두 개쯤은 다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있다.
『머나먼 아시아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여독 때문에 많이 피곤하시겠습니다. 여기까지 힘들게 오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전학생을 놀리는 초등학생도 이것보단 더 세련되게 놀리겠다.’
주영모는 통통한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슈 시몬. 3년 만에 뵙는군요.』
마스터 오브 딜리셔스니스(Master of deliciousness), 맛좋음의 주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시몬 리옹은 파리 르 꼬르동 블루의 마스터 쉐프다. 그 자신 역시도 뛰어난 페이스트리 쉐프지만 그가 정말로 유명한 분야는 따로 있다.
『이번에도 한국 팀이 출전했네요. 예선을 통과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주영모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너 같은 놈한테 배운 새끼들 인성도 거지 같겠다. 차라리 한국 팀은 작년에 예선 통과 못 했으니 올해도 못 할 거라고 악담을 퍼붓지그래?’
놀랍게도 시몬 리옹은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내는 훌륭한 교육자로 유명하다. 올해 프랑스 팀에서 출전한 세 사람 중 두 명이 시몬 리옹의 제자일 정도다.
주영모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값 역시 낮지는 않다. 베이킹 쪽에서는 후진국에 가까운 한국인인데도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내가 페이스트리 쉐프로서 뛰어나서가 아니야. 책이 많이 팔려서지.’
레시피 작가의 경우에는 책이 얼마나 팔렸는가가 중요하다. 주영모가 쓴 레시피 백과사전의 경우에는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16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1억 권 이상이 팔렸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 심사위원이 되어 와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쉐프들을 수십 명 길러낸 시몬과 시몬 사단에 비하면 못하다.
‘진혁이 녀석을 꼬드겨서 제자로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그저 그런 제자 스무 명보다, 뛰어난 제자 한 명이 낫다.
주영모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앙트르메가 도착할 시간이다.
‘한국 팀, 잘 하고 있겠지?’
아무리 목을 빼 보아도 회색 벽 너머의 참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심사위원들은 A블록과 B블록으로 나뉜다. 이번에 주영모와 시몬 리옹은 A블록에 속해 있기 때문에 앙트르메의 ‘맛’을 보고 그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역할에 속한다.
반면에 B블록의 심사위원들은 요리를 만드는 태도와 정리정돈을 어떻게 유지하는지 등을 살핀다.
시몬이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누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모르는 채로 점수를 매겨야 하는 역할을 맡아서 고민이시겠습니다.』
이 말은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너희 나라네 팀은 매년 예선에서 탈락하니,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을 텐데 어느 팀인지 몰라서 곤란하지?> 라는 이야기다. 주영모도, 한국팀도 평가절하하는 말에 주영모가 웃음을 띤 채로 반박했다.
『무슈 시몬의 고민인가 보군요. 난 아무 고민도 없습니다.』
다른 심사위원 중 한 명이 킥, 하고 웃음을 흘렸다.
『방금 누굽니까?』
인상을 찌푸린 시몬이 돌아보려 하는데, 보조 진행자인 알리샤가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평가를 받을 첫 번째 앙트르메가 도착한 것이다.
시몬 옆에 있던 알버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감탄성을 토해냈다.
『아서 왕?』
국적도 테마도 알 수 없는, 둥글고 반들반들한 초콜릿 케이크.
하지만 이 케이크를 처음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매끄럽게 윤기 나는 초콜릿 코팅도, 달걀처럼 둥근 모서리도 아니다.
케이크의 중심부에 칼이 한 자루 꽂혀 있다는 점이다.
조명을 반사하며 투명하게 빛나는 검신은 수정처럼 아름답다. 금빛 크로스가드와 광택 없는 은색 그립과 초록빛 보석이 박힌 폼멜까지 본다면 작은 보석 장신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날카롭게 날이 세워져 있는 날면과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파내져 있는 검 안쪽 내부의 디테일까지 살피면 이 검은 결코 장난감처럼 보이지 않았다.
『심사 위원 여러분! 집중해 주세요.』
심사위원이 적지 않아, 앙트르메의 경우 1개로는 미각 심사를 마칠 수 없다. 그래서 항상 2개를 제출해야 한다.
보통 이 2개는 완벽하게 동일한 모양의 케이크를 제출하게 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이자는 검은 같게 하되 색깔을 다르게 했다.
한쪽 검은 은빛 손잡이에 금색 크로스가드, 그리고 투명한 칼날을 가졌다.
다른 쪽 검은 금빛 손잡이에 은색 크로스가드, 거기에 흑요석처럼 반들거리는 검은색 칼날을 뽐낸다.
‘…아름답다.’
주영모는 그 대칭적인 아름다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첫 번째 앙트르메의 외면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평가를 받을 첫 번째 앙트르메.
그 이야기는 이 앙트르메가 제일 먼저 제출되었고, 시간 점수에서 보너스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서 왕의 검을 테마로 쌍검이라. 우리 영국 팀인가?』
영국 출신의 심사위원인 페이스트리 쉐프, 알버트 그림슨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스터 알버트. 아시는 대로 첫 번째 앙트르메를 어느 팀이 제출했는지는 모든 앙트르메 제출이 끝나고 채점이 끝날 때까지 비밀이에요! 알려드릴 수 없는 걸 이해하세요.』
올라와 있는 접시를 든 보조 진행자, 알리샤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영모는 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수준의 슈가크래프트라면…한국 팀은 아닌 것 같군.’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보았던 임진혁은 놀랄 정도로 손이 빨랐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쉐프들만치 손이 빠르고 정확했기에, 이번에도 첫 번째로 제출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저런 스타일의 설탕공예 ‘검’은 임진혁이 여태까지 만든 물품 중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아는 한, 진혁이 손댄 것은 초콜릿 공예와 일반적인 베이킹 뿐이었다.
‘저런 수준으로 슈가크래프트를 하려면 저것만 몇 년 동안 팠을 게 분명해. 강 마리오는 정통 베이킹과 마지팬 데코레이션을 파고 루이스 역시 정통 베이킹하고 얼음세공을 하느라 슈가크래프트는 둘 다 초급 수준이야. …하아. 그래도 시몬 녀석, 저 찌그러진 얼굴을 보면 최소한 프랑스 팀에서 만든 건 아닌 모양인데.’
주영모는 그 케이크를 진혁이네 팀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했다.
진혁이 브라이언 신의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주는 대가로, 높은 수준의 설탕 공예 기법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영모뿐만이 아니다. 나란히 줄지어 앉아 있는 심사위원들은 케이크 위에 꽂힌 검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마지팬이라면 저렇게 투명할 수가 없지. 웨이퍼 페이퍼는 저런 손잡이를 지탱할 정도로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으니까.』
『저 정도 솜씨면, 장신구로 만들어서 머리에 꽂아도 되겠어요.』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높은 퀄리티의 설탕 공예품이다.
다른 이들은 놀라움과 신기함, 의아함이 뒤섞여 웅성거렸다.
『올해 앙트르메는 수준이 높군요.』
『누군가 한정된 자원을 잘못 사용했을 수도 있지.』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고작해야 2시간뿐이다.
같은 시간 동안 케이크가 아닌 ㅐ탕 공예에 이 정도 정성을 들였다면, 그만큼 다른 데에 신경을 못 썼을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앙트르메에서 아서 왕의 검을 보다니 놀랍군요!』
『그러게요. 에펠 탑이나 개선문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시몬의 태도가 이번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대놓고 주영모를 놀리는 시몬을 그다지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심사위원들이 앙트르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몬을 비웃었다.
『겉보기에 좋은 꽃이 마음도 아름다울지는 두고 봐야 하는 법이죠.』
심사 위원 전원이 케이크의 외면을 바라보며 점수를 매겼다. 주영모는 종이에 적혀 있는 점수 칸을 보며 잠시 갈등했다.
‘우리나라는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점수를 깎을 수는 없다. 그는 점수 칸을 보면서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Q1. 케이크다운 외형을 갖추었는가?
Q2. 아름다운가?
Q3. 완성도가 높은가?
셋 전부, 만점을 줄 수밖에 없다. 관련 분야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보면 설탕이 아니라 유리나 수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저 검날을 보면 완성도를 깎을 수가 없었다. 본심대로 점수를 매긴 주영모는 기지개를 켰다.
『자, 그러면 이제는 케이크의 내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심사위원 전원이 체크를 마친 것을 확인한 알리샤가 빵칼을 들어 케이크를 반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케이크가 반으로 갈라지면서 마치 바위가 갈라지며 피를 흘리는 것처럼, 한없이 투명색에 가까운 붉은 시럽이 번졌다.
“…임진혁.”
주영모는 저절로 그 이름을 내뱉었다.
‘이건 딱 네 취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