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9화
등 뒤에서 낯익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임진혁 쉐프! 오랜만이야!』
미식축구 선수처럼 거대한 덩치가 좁은 주방에 가득 찼다. 솥뚜껑 같은 손이 날아오자 진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을 마주쳐 하이파이브했다.
3개월간 H&J에서 매일같이 동고동락했던 얼굴을 다시 보자 반가웠다.
『리처드 베이커 쉐프.』
쉐프복의 왼쪽 가슴 위에 수 놓인 미국 국기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리처드 베이커가 말했다.
『오, 정말로 이제는 말이 통하잖아. 진작 좀 공부할 것이지.』
아버지의 과로사라는 괴로운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진혁을 걱정했던 페이스트리 쉐프다. 윈도우 베이커리를 오래 경영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H&J 베이커리에서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었다.
『이제는 저보다 2배 더 일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까?』
진혁이 몫보다 2배는 더 잘 일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가 간신히 2/3 정도까지 하는 데에 그쳤다. 베이커가 씩 웃었다.
『리처드 베이커 1인분의 일을 하고 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진혁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니까.』
한참 후배뻘 되는 쉐프보다 느리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도, 기죽는 일 없이 씩씩하다. 진혁은 그 패기를 높이 샀다.
‘조금 더 여력이 있으면 이 사람을 스카우트해 오면 좋겠는데.’
혹여 미국 지점이라도 오픈하게 된다면 1순위로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빵집인 ‘미스터 앤 주니어 베이커(Mr & Jr. Baker)’에 애착을 갖고 있으므로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미스터, 자기가 주니어라고 했지.’
진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잭 프로스트 케이크는 덕분에 잘 팔고 있습니다.』
『겨울 한정이잖아. 이제 봄 한정 케이크를 새로 만들어서 팔고 있을 것 아니야?』
『그건 그렇죠.』
『아 참, 나만 인사할 게 아니지. 여기 반가운 사람이 한 명 더 왔다고.』
리처드 베이커가 비켜나며 뒤에 있는 사람을 소개했다.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진혁이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말했다.
『브라이언 쉐프!』
『임진혁 쉐프, 루이스 쉐프. 반갑습니다.』
브라이언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유부남이 되어서 그런지 머리 모양도 조금 더 단정하고, 수염도 깔끔하게 깎았다. 루이스와 진혁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뒤쪽에 서 있던 마리오가 팔짱을 끼며 조그만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니, 난 소개도 안 해주나?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못 나간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고?』
진혁이 킥하고 웃으며 루이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루이스가 뒤를 돌아보고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브라이언, 리처드. 여기 마리오는 내 동생입니다.』
『바, 반갑습니다.』
당당하게 투덜거리던 것과는 다르게 마리오는 쭈뼛쭈뼛하게 인사를 했다. 리처드 베이커가 그런 그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와. 형제 쉐프라니. 쌍둥이는 아니지?』
브라이언 역시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난 외동아들이라 불가능한데. 두 사람 팀워크가 좋겠는걸.』
그때 진행 요원의 방송이 들려왔다.
『여러분 이제 행사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그럼 우리는 돌아가야겠군.』
아쉽다는 듯 리처드 베이커가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낡은 회중시계를 조리복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브라이언이 웃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라고.』
『물론.』
두 사람이 돌아갔다. 다른 부스에 있는 이들이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호흡을 맞춰봐야 할 순간에 인사 놀이나 하고 있다니.』
『수준 참 알만하군.』
진혁은 두 칸 너머 부스에서 비웃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기억해두었다.
‘턱수염 한 명, 그리고 가는 눈썹 한 명.’
『….』
진혁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마리오에게 주의사항을 말했다.
『마리오, 작업 방법하고 태도, 작업 안전과 정리 정돈까지 포함되어 있잖아.』
『응.』
『너, 뺑 오 쇼콜라를 굽고 나서 조리대 정리랑 내 얼음 조각 사이로 흐트러지는 것들 좀 부탁해』
『음. 임진혁 너는? 정리 부탁할 것 없어?』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잖아, 알아서 하는 거.』
마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콜릿 모델 깎을 때 생기는 부스러기들은 내가 한꺼번에 치울게.』
‘부스러기 안 생길 텐데.’
『바닥에 미리 종이 깔아놓았다가 한꺼번에 치울 테니까 괜찮아, 네 형 쪽을 좀 더 신경 써.』
장대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순간적으로 무대의 불이 전부 꺼졌다. 불안하게 부스 안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쉐프들이 전부 발걸음을 멈추었다.
흰 머리를 길러 묶은 건장한 백인 남자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프랑스어로 말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제12회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금발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같은 말을 영어로 반복했다.
진혁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나 루이스와 마리오는 놀라워하며 속삭였다.
“안토니오 바트가 심사위원이 아니라 진행자를 하잖아?”
“엘리자베스 포크너도.”
“저 두 사람, 유명한 사람들이야?”
“그것도 몰라? 바트 쉐프는 미국 팀장으로 처음으로 쿠프 드 몽드에서 우승한 사람이야.”
“엘리자베스 포크너는 <강철의 페이스트리 쉐프>의 심사위원 겸 디렉터야.”
‘뭐야, 그건.’
디저트 서바이벌 쇼와 유사한 미국의 TV 쇼인 모양이다. 심사위원들이 한 명씩 들어오면서 소개는 계속되었다.
『한국인 쉐프 주영모를 소개합니다!』
“저 아저씨 세계대회에서도 심사위원을 맡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어?”
“저 아저씨라니. 제과 백과는 프랑스어 번역판도 나왔어. 현대 빵 레시피를 정리했다고 해서 프랑스 제과협회에서 명예 협회원으로 인정도 받았다고.”
“…흠.”
심사위원들의 입맛이 어떤지 미리 조사하는 것은 이번에는 불가능했다. 쿠프 드 몽드의 심사위원들은 면밀하게 선별되어 대회 당일 발표되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중얼거렸다.
“뺑 오 쇼콜라하고 초콜릿 밑 작업, 그리고 얼음세공 밑 작업. 첫날은 그것뿐이지?”
“응.”
“잘 하자고.”
그가 손등을 내밀자, 마리오가 자연스럽게 그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어쩌라고?”
“자, 이렇게 하면 돼.”
세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두 놈 다 엄청나게 긴장했는데.’
땀으로 축축해져 있는 사내놈들과 손을 마주 얹고 있노라니 암천대에서 처음으로 살행(殺行)을 가던 때가 생각난다.
‘죽어서 돌아오거나 아니면 죽이고 돌아오거나.’
단순히 무대 위에서 케이크를 만들 뿐이다.
아무도 죽지 않고, 죽일 필요도 없는 짧은 여행.
새삼스럽지만 즐겁다.
“화이팅!”
진혁은 피식 웃으며 팀장인 루이스의 말에 따라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화이팅!”
『심사위원 유난 취를 소개합니다. 중국의 페이스트리 쉐프인 유난 취는….』
160cm 정도나 될까, 키가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의 동양인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주영모 옆에 서자 키다리와 난쟁이 같아 보였다.
총 8명의 심사위원 중에서 아시아인은 총 2명, 주영모와 유난 취밖에 없다. 다른 여섯 명 역시 진혁에게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세상이 넓긴 넓어.”
진혁은 내심 새로 나타난 심사위원들을 살펴보았다. 당당하게 서 있는 그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심사위원들의 손끝에 있는 굳은살과 상한 관절들을 살피고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한 명 빼고는 다들 아직 현역에 있는 사람들이군?’
유일하게 한 명, 손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근육과 신경이 완전히 죽어서 못쓰게 되어 있다.
진혁이 물었다.
“오른쪽 끝에 있는 사람은 요리사가 아니지?”
루이스가 고갯짓했다.
“라이언 윈체스터? 은퇴한 제빵사. 미식 평론을 쓰는 사람이야.”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웬일로 진혁이 네가 아는 사람도 있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손을 보면 알지.”
“이 거리에서 손이 어떻게 보이냐?”
“….”
진혁이 입을 다물자 마리오가 말했다.
“그나저나 너무한 거 아니야? 여덟 명의 심사위원 중에서, 시몬 리옹 쉐프와 마르탱 쉐프 두 사람이 프랑스인이잖아. 여기는 아직 프랑스 중심이야.”
루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에는 절반 이상이 프랑스인이었는데 나아진 거지.”
“하지만 미국계 쉐프들도 다들 파리의 르꼬르동 블루나 르노트르, 페랑디에서 수학한 사람들이라고.”
“뭐, 그건 우리도 그렇잖아.”
예외라면 임진혁 정도일 것이다. 루이스는 힐긋 양쪽 부스를 눈여겨보았다. 3번 부스에 있는 일본 제빵사들이나 1번 부스에 있는 중국인 제빵사들 역시 낯이 익었다.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를 오가면서 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그들 역시 루이스나 마리오와 함께 프랑스의 제과학교를 다녔던 이들인 것이다.
『지금부터 각 팀은 뺑 오 쇼콜라 반죽, 초콜릿을 소재로 한 앙트르메, 그리고 아이스 카빙 준비를 시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앙트르메의 제출 시간은 2시간입니다.』
“이번 대회는 초콜릿 조각이 아니라 앙트르메부터야?”
마리오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루이스 역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황당해하고 있는 것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1번째 부스의 중국 팀이나, 3번째 부스의 일본 팀 역시 당혹해하며 서로 빠른 중국어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조각이 아니라고?”
뺑 오 쇼콜라나 바게트, 크루아상 중 한 가지가 나올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이틀에 걸쳐서 다듬는 얼음 조각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초콜릿 조각을 첫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첫날 예선을 통과한 자들만이 2차전에서 초콜릿 조각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앙트르메란 본래 ‘식사와 식사 사이’라는 의미로 식사 도중에 나오는 간단한 다과류를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심사위원이 말하는 것은 초콜릿이나 다른 재료를 겹겹이 쌓아 올린 레이어드 케이크다.
‘갑자기 주제가 바뀌었어! 진혁이는 긴장하지 않았나? 괜찮겠지?’
루이스는 문득 임진혁이 걱정되었다. 대회 참가 경험이라고는 고작 열 몇 명이 등장하는 텔레비전 쇼 하나밖에 없는, 토종 국내파 출신의 진혁이다.
이런 세계 규모의 대회에 처음 나온 진혁이다. 미리 만들기로 했던 주제가 아닌 다른 것이 나온 만큼 그의 상태가 어떨지 신경이 쓰였다.
‘진혁이 녀석,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어제 그렇게 많은 양의 디저트를 만들었던 걸지도 몰라. 긴장을 풀어주고 좀 도와줘야겠다.’
얼음의 템퍼링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한쪽이 지나치게 녹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골고루 녹여야 하므로 계속해서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1라운드에서 탈락해서 얼음 조각을 제출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면,
하지만 루이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반긴 것은 이미 마른 재료들을 전부 늘어놓고 준비하고 있는 진혁이었다.
심사위원이 방금 발표했을 텐데, 그 앞에 펼쳐진 스케치북에는 이미 완벽한 초콜릿 레이어드 케이크가 자리해있었다.
“너, 설마 벌써….”
“여길 보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루이스 형, 템퍼링 안 해?”
똑바로 세워진 얼음을 가리키며 그가 턱짓으로 말했다.
“마리오 너도 정신 차려. 일부러 가염 버터로 바꿨어? 레시피?”
뺑 오 쇼콜라의 레시피에는 가염 버터가 아니라 무염 버터를 사용하며 소금을 따로 넣는다. 넋 나간 듯한 표정으로 서 있던 마리오가 황급히 버터를 집어 들었다.
“어어, 어. 미안.”
루이스는 방금전까지 하던 걱정을 집어치웠다.
‘내가 도대체 누굴 왜 걱정한 거야? 내 일이나 제대로 하자. 저 녀석은 알아서 잘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