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8화
“왜 불렀어?”
졸린 눈을 비비며 다가오던 루이스가 멈추어 섰다. 눈앞에 있는 디저트의 종류와 양을 보고서 그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밤새웠냐? 컨디션 관리해야지.”
내일은 바로 대회 첫날. 쿠프 드 몽드 파티쉐리의 경우, 첫날에는 열 시간에 달하는 대장정이다. 이틀째 제출해야 하는 ‘대작 초콜릿’과 사흘째 제출해야 하는 ‘얼음 세공 작품’의 기틀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열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넉넉하지 않다. 대작 초콜릿은 2m 이하 1m 이상의 높이여야 하고, 얼음 세공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너, 오늘은 아예 푹 쉬는 게 낫겠다.”
진혁은 미소로 대답했다.
“이 크림 브륄레부터 먹어보라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리오가 팔짱을 풀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루이스는 신경 쓰지 않고 크림 브륄레를 마시듯이 입에 통째로 넣어버렸다.
“오.”
“얘가 이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우기는데, 형.”
“마리, 이 크림 브륄레는 진혁이가 직접 만든 거 맞는데.”
마리오의 동공이 흔들렸다. 루이스가 킥 웃으며 말했다.
“걔가 달걀 깰 때부터 내가 옆에 있었어. 쟤가 직접 만든 거 맞아.”
진혁이 당당하게 말했다.
“설거지 잘 부탁해.”
◈ ◈ ◈
프랑스와 대한민국 사이에는 8시간의 시차가 있다.
인천공항에서 새벽 6시, 이제 막 출국 심사를 통과한 임운정은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아들 녀석은 자고 있겠군.’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를 쓰며 배낭을 메거나 캐리어를 끌고 돌아다니는 광경은 그에게 있어 꽤 생소한 것이었다. 비행기를 타야 할 21 터미널로 터벅터벅 걸어가며 그는 아들 생각을 했다.
‘이게 다 진혁이 덕분인가.’
동네 제빵사로 오랫동안 일해왔지만, 세계대회 출전 같은 건 꿈도 꿔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맛있는 빵을 만들어서 전국에서 손님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정도다.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는 그는 닫혀 있는 면세점들을 힐긋힐긋 바라보며 천천히 인천공항의 터미널을 서성였다.
탑승까지 30분 정도 남았다.
임운정은 유일하게 열려 있는 커피숍을 겸한 작은 빵집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과 샌드위치 하나를 샀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
‘냉동생지를 받아서 아침마다 굽는 집이구만.’
종일 자그마한 카운터 앞에 서서 손님들을 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새벽부터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는 빵집 아가씨에게서 딸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 역시 비슷한 일을 하기에 뭔가 팔아주고 싶었다.
윈도우 베이커리에서 오너 쉐프를 겸한 페이스트리 쉐프.
말은 좋지만, 사실은 그냥 작은 가게 주인일 뿐이다. 공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몇 평 되지 않는 가게 안쪽에 갇혀 바깥세상에 나갈 수 없다.
만나는 사람들은 가족과 가게 손님들뿐이다.
오랫동안 자그마한 가게 안에서 자영업을 하다 보면 점점 더 세상이 좁아진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필요가 없이 매너리즘에 빠진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빵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지치기 때문에 다른 것까지 고려하기 어렵다. 그러던 와중에 새로운 빵을 개발하지도 않고, 기존의 빵을 개량하지도 않고 점차 매상이 줄어든다. 그렇게 점점 더 현재에 안주하다가 망해 버리는 가게 역시 적지 않다.
임운정은 맞은편에 프랜차이즈 빵집이 생겼을 때 이미 내심 패배를 예감했다. 경기도의 인근 동네에도 스위트 바게트 지점이 여러 개 생겼다. 기존 동네 빵집들은 스위트 바게트 앞에서 속속들이 문을 닫았다.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했지만, 아들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고, 대학 등록금은 적지 않게 부담이 된다. 아내는 적성에 맞지 않는 파출부 일을 계속했고, 밤에는 끙끙대며 신음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가게에 손님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한 건 자신이 아니라 아들이었다.
놀랄 정도로 맛있는 치즈 케이크를 원가밖에 나오지 않는 저렴한 가격으로 한정해서 판매한다. 그것만으로도 갑자기 손님이 확 늘었다. 치즈 케이크를 사러 온 사람들은 다른 빵들도 하나둘씩 집어가기 시작했다. 진혁이는 기존에 없던 다양한 메뉴를 속속들이 내놓았고, 매출은 로켓처럼 치솟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금천복 노인을 통해 마라톤 대회에 카스텔라를 기증하기도 했다. 강남의 큰 가게로 스카우트되어서 간 후에도 시간을 내어 노인정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해 웨딩 케이크를 내놓기도 했다. 디저트 쇼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 우승하기도 하였고, 지금은 우리나라 대표로 프랑스에 있다.
‘내 아들이 쿠프 드 몽드에 참가하는 최연소 쉐프라니.’
아들 생각을 하면 가슴 한구석이 몽글몽글하고 따뜻해진다. 갓 태어났을 무렵 쪼글쪼글한 원숭이 같았던 두 남매를 품에 안았을 때와 똑같다. 자랑스럽고 행복하며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임운정은 목표로 했던 터미널 앞에 도착했다.
가족 단위로 함께 온 중국인들이 웃고 떠들며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열 살 전후로 보이는 남녀 쌍둥이가 부모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것을 보니 저절로 어린 시절의 진혁이와 진희가 떠올랐다.
‘형편이 어려워 애들 데리고 해외 한 번 가보지 못했지.’
그리고 지금 아들을 보러 파리에 간다. 같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뒤따라서 가고 있다. 저절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사실은 대회 첫날부터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해 주고 싶었지만, 스케줄 상 그건 무리였다.
아내와 딸 역시 오고 싶어 했지만, 가게를 비울 수 없어 혼자 출국하기로 했다.
스마트폰이 띠롱, 하고 울었다.
<아빠, 비행기 무사히 탔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진혁이한테 안부 좀 전해줘요.>
딸이 보낸 문자였다. 진혁이 돌아올 때까지 일봉이 진혁의 빈 자리를 메꾸고, 딸은 일봉이가 있던 자리를 대신한다. 가게의 헤드 쉐프 역할을 맡는다고 잔뜩 긴장해 있던 임진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임운정은 살짝 웃었다.
30여 년 전, 작은 빵집을 개업하면서 그 역시 그렇게 긴장해 있었다.
‘이번에 제대로 해낸다면, 진혁이 말대로 진희 역시 가게 하나를 맡을 정도 실력은 충분히 된다는 얘기가 되겠지.’
그는 진희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가게 일 잘 하고.”
“아빠! 아직 비행기 안 타셨네요. 매니저님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기도 했고, 전 괜찮아요. 잘 다녀오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래.”
“캐리어에 현수막 넣어놨으니까 응원하면서 흔들어주시면 돼요.”
조그만 태극기 깃발을 부탁했는데, 딸은 뭔가 더 준비한 모양이었다.
“현수막이라고 해도 거창한 게 아니고 한 손으로 흔들 수 있는 거니까, 조그만 태극기하고 같이 넣었어요!”
조금 과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으나 임운정은 마음을 바꾸었다.
“그, 그래.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 해라.”
아들을 응원하는 것이니 과해도 좋다. 통화를 마친 그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프랑스에 있는 아들은 이미 밤이 늦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는 짧은 문자를 보냈다.
<잘 자고, 잘 해라.>
둘째 날 객석에 나타나 아들을 응원할 생각을 하니 설렌다. 놀라며 기뻐할 진혁이를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졌다.
“좋아하겠지.”
◈ ◈ ◈
대회장의 주방은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서 사용하던 스튜디오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진혁과 루이스, 마리오는 한국 담당인 2번 주방에 서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뭘 좀 아는 분들이 설치했네.”
무대 위에 조리대와 싱크대가 있고, 창고가 가운데에 있던 스튜디오와는 동선부터 다르다. 1m 높이가 넘는 초콜릿이나 얼음세공품을 만들어야 하는 만큼, 일반적인 제과 주방과 조리실 공간이 같은 팀 내에서도 벽을 이용해 분리되어 있다.
『미리 신청하신 재료가 누락 없이 준비되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공지사항은 영어로 한 번, 프랑스어로 한 번씩 방송되었다.
“내가 냉장고를 확인할게.”
진혁은 냉장고를 열어 미리 주문한 식재료들이 제대로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버터와 달걀, 우유는 충분해. 초콜릿과 과일류도 제대로 있고.”
브랜드나 유통기한 역시 미리 부탁한 대로다. 다른 재료들을 살피던 루이스가 똑똑히 대답했다.
“밀가루, 설탕, 드라이 이스트, 코코아 파우더. 장미수….”
각 팀에서 사용할 냉장고는 전부 별도로 준비되어 있으며, 미리 주문한 필요한 식재료가 들어차 있다. 하나의 창고에서 재료를 가져와야 했기에, 혹시 다른 쉐프가 먼저 소량의 재료를 다 가져가 버리면 곤란해지는 디저트 서바이벌 쇼 때와는 차이가 있다.
루이스는 어떤 브랜드의 제품이 얼마나 있는지, 빠진 것은 없는지 확인을 마쳤다.
그동안 냉동고를 열어 1.5m 높이의 얼음 기둥을 확인한 마리오는 장갑부터 꼈다.
“형! 얼음 꺼내는 것 좀 도와줘.”
“응.”
강 씨 형제는 낑낑대며 얼음 기둥을 바깥으로 꺼내려고 했다.
“도와줄까?”
“아니, 우리가 꺼낼 수 있다.”
조리복을 갖추어 입고 조리모까지 쓴 진혁은 먼저 손부터 씻었다.
하지만 진혁이 기다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아직 얼음 기둥을 제대로 꺼내서 올려놓지 못했다.
진혁이네 주방을 둘러싼 다른 팀들, 1번 팀인 중국과 3번 팀인 대만 역시 얼음 조각의 원재료부터 꺼내느라 바빴다.
“얼음 조각 세팅 정도는 미리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이건 조각하는 솜씨랑은 상관없는 문제잖아.”
마리오가 투덜거리자 루이스가 말했다.
“그럼 얼음이 녹잖아. 조각하기 전에 꺼내는 게 당연하지.”
“우리도 직전에 꺼내는 건 아니잖아. 30분 전에 꺼내잖아.”
셋 중에서 이번에 얼음 조각을 맡은 것은 루이스, 그리고 초콜릿 공예를 담당한 사람이 임진혁이다. 마리오는 뺑 오 쇼콜라 굽기와 보조를 맡았다. 루이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 얼음 질이 안 좋으면 빨리 바꿔 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대회 시작하기 직전까지니까. 지금 체크해야지.”
두 형제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임진혁이 다가왔다.
“이거 그냥 내가 꺼낼게. 잠깐 비켜 봐.”
“어어?”
“어?”
얼음 기둥을 꺼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무겁기 때문이 아니다. 기둥을 깨뜨리거나 금이 가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서 그렇다. 자칫해서 무게중심이 한 축으로 쏠리게 했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지나치게 차가워 잘못 만졌다가 동상을 입으면 감각을 잃어 대회에 지장이 간다.
“이제 됐어?”
하지만 진혁은 그 무거운 얼음 기둥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서 받침대 위에 놓았다.
“야, 무겁지도 않아?”
“올려놨으니까 됐잖아.”
대회가 시작하기 전까지 앞으로 30분. 다시 한번 안내 방송이 울렸다.
“스마트폰은 꺼두라는데?”
“극장인가.”
진혁은 핸드폰을 꺼내 끄기 전에 새로운 메시지가 온 것을 보았다.
“누구지?”
아버지가 보낸 짧은 메시지를 본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할게요, 아버지.’
새삼스레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