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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247화 (247/656)

제 247화

연습용 주방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다. 새것처럼 반짝이는 고급 오븐을 만져보며 진혁이 중얼거렸다.

“아예 가게를 차려도 될 정도로 꾸며놓으셨는데. 연습용으로만 쓰기엔 아까워.”

“우리가 사용한 후에는 젤로스 사의 개발팀에서 사용한다고 들었어.”

“나쁘지는 않네.”

하품하며 말한 마리오가 기지개를 쭉 켰다.

“난 잠깐 아이디어 좀 생각해 볼게.”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그는 팔을 괴고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장시간의 비행으로 피곤해 온몸이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죽죽 늘어진다. 반쯤 잠든 마리오의 귓가에 형과 임진혁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오늘 뭘 하려고?”

“프랑스의 대표적인 디저트라면 뭐가 있다고 생각해?”

“음? 그렇게 갑자기 말해도….”

루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오페라? 이탈리아에 티라미수가 있다고 하면, 프랑스에는 오페라가 있지. 치즈가 아닌 버터크림과 에스프레소, 초콜릿 케이크니까.”

“주영모 쉐프가 백과사전에서 소개하기도 했지. ‘해와 달’ 강남점에서도 내놓고 있는 메뉴고.”

“그렇지. 너 오페라는 잘 만들잖아.”

“밀푀유와 몽블랑, 마카롱도 그렇고.”

“음. 거기에 에클레어와 마들렌 정도일까? 그리고 크림 브륄레?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아까 먹었던 디저트를 다시 만들어 보려고.”

진혁의 말에 루이스가 반박했다.

“아까 그 크림 브륄레(Cream Brulee) 말이야? 너, 그거 쉽지 않다. 생 어거스틴의 헤드 쉐프인 어거스틴은 그 크림 브륄레로 5년 전의 3구 디저트 대회에서 우승 상을 받았다고. 데미쉐프들에게도 레시피를 공개하지 않고 혼자 만든다고 소문이 자자해.”

너무나 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반쯤 잠들어 있는 마리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형에게 동조했다.

‘맞아, 데미쉐프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리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랑비에가 미리 챙겨두었는지 냉장고에는 신선한 달걀이 가득하다. 다른 재료들 역시 포대에 담겨 라벨이 붙은 채 햇빛이 들지 않는 공간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마리오가 잠들어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진혁은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얼마를 담아야 할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은 빠른 손놀림이었다.

진혁이 달걀노른자를 여덟 개째 분리해내자 호기심을 참지 못한 루이스가 물었다.

“전에 만들던 크림 브륄레하고 다르잖아? 아니면 그 두 배의 분량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아니, 아까 그 가게의 크림 브륄레는 노른자를 더 많이 써.”

“그걸 먹어보고 알았단 말이야?”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리는 루이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진혁이 중얼거렸다.

“바닐라 익스트랙트가 아니라 씨앗을 긁어낸 바닐라빈을 썼고.”

“그건 나도 먹어보면 알지.”

“루이스 형도 먹어보면 안다며? 그러니까 나도 먹어보고 알 수 있지.”

진혁은 대답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스테인리스 보울 안에서 주황빛에 가까운 선명한 노른자가 설탕과 함께 뭉개지고 으깨진다.

‘내가 저으면 저런 속도가 안 나는데.’

선명하던 노을 빛깔이 하얀 가루를 빨아들이고 녹여내어 노르스름한 레몬 빛깔이 되기까지 3분. 능숙한 페이스트리 쉐프인 자신이 해도 5분 이상 걸리는 작업을 순식간에 끝내버리는 임진혁을 보며 루이스가 혀를 내둘렀다.

“언제 봐도 정말로 손이 빠르단 말이지.”

“하하.”

‘이 정도는 괜찮아.’

진혁이 씩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수 없는 작업을 통해 소량의 진기를 불어넣는 데에는 도가 텄다. 연습용 작업실에 굳이 오행진을 설치할 생각은 없었기에 달걀노른자와 설탕이 고루 섞이도록 미미한 양기를 넣어 온도를 맞추는 정도로 만족했다. 달걀노른자가 익을 정도로 뜨겁지 않으면서, 설탕이 흔적없이 녹아버릴 정도로만 보내는 것이 포인트다.

사실은 1초 만에 섞어버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수상쩍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살짝 빠른 정도로만 시간을 맞추었다.

“진혁아, 끓인 생크림 여기에 있다.”

“고마워.”

진혁은 여유롭게 생크림과 노른자를 저었다. 표정은 편안한데 손은 마치 자동 거품기처럼 빠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이스가 킥킥 웃었다.

“어째 방송 때보다 더 빨라진 것 같냐.”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 느직느직하게 젓다가는 달걀이 익어버려 설탕 범벅 계란 프라이가 되어 버린다. 거품이 일 정도로 잘 섞인 노른자와 생크림을 냄비에 남아있는 혼합물 위에 천천히 부으며 뒤늦게 진혁이 대답했다.

“기분 탓일걸.”

“음.”

루이스는 그새 옆에서 체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주방이라 어디에 무엇이 있을지 헷갈릴 법도 한데 눈치가 빠르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뭐 만들어보려던 것 아니었어? 내 보조만 하고 있네.”

“네가 정말로 거기 크림 브륄레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해서.”

“음, 그건 나중에 결과물만 봐도 되잖아.”

“지인짜 궁금해서 그렇다.”

진혁이 마지막 혼합물을 거품기로 휘젓는 것을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만드는 걸 직접 눈으로 봐야 믿을 수가 있지.”

“뭐, 내가 거기 크림 브륄레를 사다가 바꿔치기라도 할까 봐?”

루이스는 말없이 눈만 깜빡이다가 하품을 했다. 그 역시 눈가에 그늘이 짙었다. 체력이 좋다, 좋다 해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흐아암.”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럼 거기 앉아서 뜬눈으로 지켜보든가.”

“잠깐만 쉰다.”

루이스는 마리오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숫제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 동생을 보고 루이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 완전히 잠들어버렸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따라오지를 말지.”

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잠든 동생 위에 덮어 주었다. 임진혁을 흘깃흘깃 바라보며 등받이가 있는 푹신한 사무용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자 갑자기 잠이 확 몰려왔다.

“하아아암.”

루이스는 두어 번 더 하품했다. 그러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고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을 닦고 다시 임진혁에게 시선을 향했다.

‘어라?’

조금 전에 임진혁이 막 오븐에 갓 만든 커스터드 크림을 넣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샌가 저쪽 끝에서 생크림을 짜고 있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 아까 전까지는 없었던 올망졸망한 디저트들 역시 눈에 띄었다.

“임진혁!”

분명히 한순간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다. 저것들을 전부 구워낼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을 리가 없다. 루이스가 졸린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지금 몇 시야?”

“아침 10시.”

“뭐?! 내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

루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불편하게 의자에 누워서 잤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근육통 없이 온몸이 상쾌하다. 그는 옆에서 코 고는 소리도 없이 자고 있는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야, 강마리오! 일어나!”

“으으음. 혀엉, 나 5분만 더.”

“5분은 무슨!”

걸쳐 주었던 재킷을 순식간에 빼앗아 걸친 루이스가 진혁에게 물었다.

“너, 지금 밤을 새워서 이걸 다 만든 거야?!”

“진혁이가 뭘 만들었는데?”

“넌 가서 세수나 하고 와!”

졸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마리오의 등을 떠밀어 화장실로 보냈다.

“흠,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을 텐데.”

“어?”

“크림 브륄레. 먹어보고 똑같은지 말해줘야지.”

“아. 맞다. 그랬지.”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외쳤다.

“그것보다 너!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해도 컨디션 조절은 했어야지!”

“나도 눈 좀 붙였어.”

“그럴 리가 없어. 이렇게 많이 만들었는데.”

“이쪽 기온이랑 습도가 궁금해서 만들다 보니까 조금 많이 만들었네.”

“…이건 조금 많이 만든 정도가 아니지.”

이미 완벽하게 완성된 크림 브륄레만이 아니다. 한쪽 구석에 수북이 쌓인 마들렌과 에클레어만 해도 적지 않다.

“나 손 빠른 거 알잖아.”

“알았어,”

진혁이 크림 브륄레를 내밀자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치하고 와서 먹을게.”

“오케이.”

먼저 돌아온 마리오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어제 형이랑 이거 만들고 잔 거야?”

진혁이 씩 웃었다.

“뭐, 비슷하지.”

“혼자서 먼저 잠들어서 미안하네.”

“괜찮아.”

임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젯밤 어설프게 잠든 강 씨 형제 두 사람의 수혈을 짚은 것은 그 자신이다. 두 사람이 잠들어 있는 동안 신나게 무공을 발휘해 이것저것 만들었다. 최근 몇 달간은 혼자서 제빵을 하기보다 다른 이들과 내내 부대끼며 작업해야 했기에 꽤 즐거웠다.

‘역시 밀가루나 설탕도 허공에서 가루 단위로 섞는 게 편하고.’

어설프게 거품기 따위로 하는 더 귀찮다. 특히 거품기가 우그러지거나 망가지지 않게 미세하게 힘 조절해야 하는 게 신경 쓰인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허공섭물 따위를 썼다가는 곤란해진다. 그래서 재워버렸다.

“진짜 피곤했는데 잘 자고 나니까 가뿐하네.”

“그렇지?”

진혁이 흐뭇하게 웃었다.

나름 팀 동료인데 수혈을 짚은 것이 신경 쓰여, 잠든 틈을 타 미미하게 기운을 불어넣어 운기조식까지 해 주었다. 당장 내일이면 대회에 참가할 텐데, 거기서도 체력이 딸리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발목을 붙잡히면 곤란하다.

“내가 잘 잤다는데 네가 왜 그렇지야?”

마리오가 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혁은 대충 얼버무렸다.

“…나도 잘 자니까 몸 상태가 좋아져서.”

화장실에서 루이스가 양치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리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에 쌓인 디저트에 손을 뻗었다.

“이 크림 브륄레 먹어도 돼?”

“먹고 나서 평 좀 해봐.”

바삭바삭한 설탕 조각이 갈색으로 캐러멜라이즈되어 있는 그 아래, 진하고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있다.

달콤하지만 느끼하지 않고, 부드럽지만 액체는 아니다.

제일 좋아하는 간식을 집어 들어 한 스푼 떠서 맛본 마리오가 간단하게 평했다.

“야, 이거 네가 만든 거 아니잖아. 생 어거스틴에서 사 온 거네.”

포장지도 없이 크림 브륄레만 한쪽 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광경을 보면 아무리 마리오라도 의심했을 테지만, 그는 지금 잠이 덜 깬 상태였다. 그는 다시 한 번 하품하며 남은 크림 브륄레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진혁이 너, 아침 일찍부터 이거 사 오느라 고생했다?”

진혁이 슬며시 웃었다.

“내기할래?”

“내기? 무슨 내기?”

“설거지 내기.”

“엇….”

제과제빵은 좋아하지만, 그릇을 씻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마리오가 주춤했다.

“그 크림 브륄레가 생 어거스틴 건지, 아닌지 걸고 말이야.”

“그건 당연하지! 이건 생 어거스틴의 크림 브륄레가 맞아. 너야말로 이게 생 어거스틴 게 아니면 뭘 할 건데?”

“이 크림 브륄레가 생 어거스틴에서 사 온 게 맞다면 대회 마지막 날까지 연습 건 포함해서 설거지는 전부 내가 하지.”

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 미소를 본 마리오 역시 마주 웃어주었다.

강마리오는 자신의 입맛을 믿었다. 더군다나 데미 쉐프들에게도 레시피를 공개하지 않고 헤드 쉐프가 혼자 몰래 만든다는 생 어거스틴의 크림 브륄레다.

‘다른 디저트였다면 한 번 더 고민했을지도 모르지만, 이거라면 확실해.’

“좋았어, 콜.”

“루이스 형! 여기 좀 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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