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4화
‘캐리어 때문에 풀이 죽어있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폴짝폴짝 방정맞게 뛰어다니는 게 더 낫네.’
“그래, 그래.”
진혁은 어린아이가 재롱을 피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한 달 전에 예약해야 하는 미슐랭 스타 가게라고. 내가 일부러 신경 써서 준비한 거란 말이다.”
마리오가 호들갑을 떠는 동안 루이스가 메뉴판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는 동안 진혁이 물었다.
“여기는 뭐가 추천 메뉴야?”
“주방장의 ‘오늘의 메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디저트는 커스터드 푸딩.”
루이스가 대답했으나,
“하지만 넌 고민할 필요가 없어! 이미 코스 C로 주문이 들어간 상태거든. 예약할 때 전부 주문했어.”
진혁은 신나서 떠드는 마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호 녀석이 털을 세우는 것 같아.’
뭐라고 한마디 하면 바로 시든 벼 이삭처럼 고개를 숙이고 쭈그러들 것이 뻔하다. 차라리 사형수들의 목을 베는 게 낫지,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난감하다.
진혁은 루이스에게 대답했다.
“정통 프랑스식 디저트가 아니라?”
“그렇지? 조금 다르지만 맛있어. 너도 먹어보면 알걸.”
빵을 만들면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요리 역시 만들어 보았다. 하지만 현지에서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를 코스별로 먹어보는 경험은 처음이다. 중국에 가서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진혁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한 번 먹어보고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내서 아버지에게 해달라고 해야지.’
곧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종업원이 오르되브르를 담은 접시를 들어 내왔다.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세 종류의 에피타이저가 놓였다.
제일 처음 보인 것은 엄지손가락 세 개만 한 크기의 미니 바게트와 그 위에 올라간 참치 크림이었다. 참치와 마요네즈, 그리고 이름 모를 소스를 섞어 올리고 맨 위에는 얇게 썬 할라피뇨가 올라갔다. 핑거 푸드답게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다.
“이거 맛있네.”
순식간에 입에 집어넣은 진혁이 말했다.
‘이건 응용해서 만들 수 있겠다. 단단하고 바삭바삭한 바게트하고 부드러운 크림, 마지막에 확 깨는 매운맛 대신 상큼함을 넣는 거지.’
아이디어를 하나 얻어 흐뭇하다. 진혁이 미소짓자 마리오가 유쾌하게 말했다.
“진짜 맛있지? 그 옆에 있는 퓨전 감바스가 더 맛있어.”
감바스는 올리브유에 껍질을 벗긴 새우를 넣어 향신료로 간해 끓이는 이탈리아식 요리다.
“전통적인 프랑스식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국가와의 퓨전이 테마야?”
“다양한 국가라기보다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퓨전이라고나 할까? 부부 쉐프가 운영하는데 남편은 프랑스인이고, 부인이 이탈리아인이야.”
“그래서 그렇구나.”
퓨전 감바스 접시 안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새우가 두 개, 올리브유에 푹 잠겨있다. 송송 썰어 올라간 향신료는 바질과 월계수 잎이다. 아낌없이 사용한 향을 맡으며 진혁이 새우를 씹었다.
탱탱한 새우 살은 포크를 한 번은 튕겨내리만큼 육질이 살아있다. 새우 살이 톡톡 씹히며 입안에서 터졌다. 잘 배인 바질 향 올리브유 역시 입안에서 감돌며 향미를 더했다. 곁들이로 올라간 삶은 콩은 부드럽게 으깨져 뒷맛을 더 깊이 있게 해주었다.
“오믈렛이라.”
얇게 썬 당근과 파프리카, 양파 등이 들어간 오믈렛은 마치 길쭉한 치즈 케이크 같은 모양이었다. 위쪽 표면과 가장자리는 먹음직스럽게 갈색으로 그을렸고 안쪽은 보들보들하고 노랗다. 진혁은 오믈렛을 통째로 입안에 넣었다.
‘이게 셋 중에서 제일 맛있네.’곁에 준비된 토마토소스를 찍어 발랐다. 시큼 달큼한 케찹과 달리 새콤하며 단 소스는 오믈렛과 잘 어울렸다. 입안에서 침에 녹은 오믈렛은 단단한 계란말이같이 풀어지며 토마토소스를 만나, 황홀한 조화를 이루었다.
“오믈렛 만들고 싶다.”
진혁이 맛있다는 말을 간단하게 표현하자 마리오가 웃었다.
“오늘 숙소로 가서 만들면 되지. 그 정도는 거기 주방에서 만들면 돼.”
“재료는?”
“돌아가면서 장 보자.”
“좋아.”
루이스는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다음 메뉴는 수프였다.
수프 접시는 가장자리가 구불구불하게 울어 있어 희고 거대한 조개껍데기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수프를 담은 것처럼 보였다. 접시의 안쪽에는 금빛 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어 수프 바로 위를 원형으로 둘러 감쌌다.
“이건?”
“아스파라거스 크림 수프.”
“수프 말고 접시.”
“접시는 특별 주문해서 만들어서 이 가게에서만 쓰는 것 같은데? 봐, 여기에 가게 이름이 쓰여 있다고.”
그릇 안쪽에 금박으로 조그맣게 적힌 가게 이름을 보고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건 김가영이 보면 아주 좋아할 그릇인데.’
“그보다 수프를 먹어 봐. 이거 맛있어.”
하얗고 되직한 수프를 수저로 뜨며 진혁이 중얼거렸다.
“아스파라거스 크림 수프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녹색이 아니라 상아색에 가까운 흰색이었다. 베이컨이나 옥수수, 새우나 조개를 곁들인 크림 수프는 자주 보았지만, 아스파라거스 크림 수프란 것은 처음 본다. 진혁은 호기심을 품고서 수프를 한 수저 떴다.
아스파라거스의 향이 강렬하게 코에 훅 끼쳐왔다.
‘신선한 아스파라거스를 그대로 갈아 넣었군.’
크림보다 아스파라거스의 향이 더 짙다. 독특한 컨셉이었지만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아스파라거스의 장점은 ‘신선함’과 ‘아삭함’ 이다. 하지만 그 아삭함은 지금 줄기를 통째로 갈아 흐물흐물한 액체로 만들었을 때는 전혀 살아나지 않았다.
‘마리오 저놈은 아스파라거스에 환장했나? 왜 이게 맛있다고 하는 거지?’
진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은 아스파라거스의 향이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의 테이블에 있는 이들 중 아스파라거스 크림 수프를 먹으면서 불쾌해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행복한 얼굴로 수프를 맛보고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루이스와 마리오, 두 형제만 해도 기쁜 듯한 표정으로 수프를 즐기는 중이다.
‘이게 정말로 맛있나 본데?’
어쩌면 이게 입맛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진혁은 이렇게 애매하게 아스파라거스 향이 짙게 풍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소꼬리를 푹 끓여낸 꼬리곰탕이나 설렁탕 육수 같은 맑은 수프가 좋았다.
진혁이 조용히 물었다.
“이 아스파라거스 크림 수프, 맛있어?”
마리오가 눈치 없이 격찬을 늘어놓았다.
“분자요리도 아닌데 아스파라거스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수프로 만들다니 대단하지 않아? 우리도 이런 식으로 예상할 수 없는 재료가 튀어나오는 빵을 굽자고.”
루이스가 잘라 말했다.
“네 예상할 수 없는 재료는 너무 예상할 수 없어서 큰일이야.”
“왜?!”
“일단 저번에 시도했던 김치 향 밀크쉐이크부터 별로였어.”
“그건 음료수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그렇지. 한식을 퓨전해 보려고 한 거라고.”
“엽기방송용 콘텐츠 아니냐? 우리 평범하게 맛있는 빵을 만들자. 이상한 도전 좀 하지 말고.”
루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북선의 눈에 LED 전구를 심어서 불을 밝힐 필요도 없다니까. 우리는 전기 기사가 아니라 페이스트리 쉐프라고.”
“비주얼적으로 쩔어줄 것 같은데.”
마리오가 구시렁거리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들은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이쪽 입맛에 길든 사람들은 이런 맛에 익숙한 거야. 자주 먹던 채소를 다른 방식으로 접하니까 신선하고 맛있다고 느끼는 거고.’
동양에서 온 이들이 그동안 우승을 하지 못한 이유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접해온 ‘프랑스식 빵과 요리’의 맛 자체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열이 아니라 다름의 문제다.
제빵과 제과를 하는 ‘방식’부터 다른데, 그 방식을 익힌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프랑스에서 나는 채소부터 곡물까지 사용하는 재료 자체가 다르다. 이 재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한 것들을 어렸을 적부터 자양분이 될 수 있도록 소화해낸 사람과 성인이 되어 학습을 위해 접한 사람은 수준이 다르다.
‘성인이 된 프랑스인이 한국에 와서 한정식 만들기를 배운다고 해도, 평생 한식을 먹어온 한국 사람과 비교하면 다를 수밖에 없어.’
즉, 경험치가 부족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진혁이 일부러 모르는 척 말을 꺼냈다.
“이제 다음이 메인 코스인가?”
“음, 아니. 먼저 파스타와 샐러드가 나와.”
“호오.”
“그리고 그다음이 생선, 그리고 고기 요리 순서야.”
“아아.”
마리오가 점점 더 콧대를 높이며 으쓱거렸다. 진혁이 말했다.
“맛있는 걸 사준다고 하더니 돈 많이 쓰네, 고맙다. 마리오.”
“어, 어어?”
마리오가 당황했다.
“이건 우리 경비로 하는 거 아니야?”
“네가 맛있는 걸 먹여준다면서 일부러 따로 예약했다며. 그럼 경비로 할까?”
자존심이 있는 마리오가 표정을 애써 일그러뜨리지 않으며 말했다.
“아, 아니야. 당연히 내가 사는 거지.”
개인 방송을 하며 꽤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니 이 정도 돈을 지불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기분이 다르다.
이번에 나온 생선은 도미구이였다. 한국에서는 회나 탕으로 자주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뼈를 발라내고 살만 베어내어 찐 소스 요리로 나왔다.
‘빵만이 아니라 프랑스식 요리를 좀 더 많이 먹어봐야겠어.’
와인 소스가 깊이 배어들어 연보랏빛으로 물든, 원래 흰색이었을 생선 살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맛있는데?”
치즈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맛에 진혁이 호평을 했다.
“그렇지! 여기가 진짜 맛있다니까.”
‘이 정도 맛이면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거군. 부드러운 식감에 졸인 와인 소스라.’
진혁은 마음속의 노트에 하나씩 하나씩 맛을 추가해나갔다.
“너랑 루이스는 완전히 입맛이 프랑스식이네.”
“아무래도 오래 먹었으니까. 그래도 한식도 좋아해.”
“나보다는 형이 한식을 더 좋아해.”
“한식하고 프랑스식 차이를 설명해 보면 어때?”
“음, 프랑스식 요리는 좀 더 재료의 맛을 살리는 느낌이 있어. 지금 도미 같은 경우도 소스는 일부러 약하게 해서 도미살 맛을 살리잖아? 그런데 한국은 좀 더 맵고 짜게 양념해서 씹는 감각이랑 향 자체를 즐긴다고 해야 하나.”
“호오.”
◈ ◈ ◈
두 사람이 하는 조언은 꽤 유익했다. 식사가 끝나가고 디저트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루이스가 새로 들어온 단체 손님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저 사람들은 미국인이네.”
진혁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유창한 프랑스어로 주문하고 있는데.”
영어 억양이라고는 전혀 없는 프랑스어였다.
“뭐, 저들이 아시아인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거랑 같은 거지. 난 미국인이랑 프랑스인을 구분할 수 있어.”
“호?”
진혁이 물었다.
“이목구비가 다른가?”
루이스가 턱짓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백인들을 가리켰다.
“아니. 저렇게 거대한 배낭을 멘 사람들. 거기에다가 반바지를 입었지. 휴가 복장을 하고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급하게 돌아다니면서 와이파이 패스워드를 묻는 사람들은 전부 미국인이야.”
진혁이 짧게 감상을 말했다.
“그거 어쩐지 굉장히 한국인에 대한 설명하고 비슷하게 들리는데….”
“미국인하고 좀 비슷할지도? 프랑스인들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느긋하게 돌아다니거든.”
그 일행 중에 있는 한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던 마리오가 중얼거렸다.
“저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 뭔가 낯익은데.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 같아.”
“아는 사람이야?”
“그런 건 아닌데… 아!”
그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낸 마리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캐리어!”